미세 먼지에 뒤덮였던 하늘이 말간 얼굴을 드러낸 11월 어느 날. 청주시 흥덕구 비닐하우스 농가를 굽이 지나 서너 채 가옥이 밀집한 인가에 닿았다. 주홍색 감나무, 처마 밑에 널린 대추 같은 시골 특유의 정취를 반가운 마음으로 훑다 보니 풍채 좋은 옹기들이 수문장처럼 늘어선 작업장에 시선이 멈춘다. 이강효 작가가 며칠 전 가마에서 꺼냈다는 따끈따끈한 신작 ‘분청산수’ 서너 점이 가을볕 아래 나른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넉넉했던 우리네 인심처럼 굽이진 능선을 본뜬 도자는 바람의 움직임, 새의 포물선 같은 자연의 흔적을 한 폭의 추상화처럼 품고 있었다. 직접 혼용한 적토로 레이어를 쌓아 옹기를 만들고 유약을 바른 뒤, 즉발적인 ‘손의 감각’으로 완성한 작품은 흙으로 빚은 산수(山水), ‘자연’ 그 자체라 할 만했다.
WRITE 박나리(매거진 <아트마인> 콘텐츠 디렉터) PHOTOGRAPH 박우진(키메라앤 스튜디오) VIDEO 황승헌(매거진 <아트마인> 비디오 매니저)
시골에서 살아본 적 없는, '서울 토박이'였던 작가는 오로지 ‘자연 곁에서 도자 작업하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안고 청주로 내려와 스무 다섯해 넘는 시간을 도예가로 살고 있다. “멀어서 찾는 사람이 뜸하니 작업에 몰두하긴 더없이 좋다”며, 일본 출장 길에 가져온 호지차(焙じ茶)를 직접 만든 분청 다완에 건네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안다. 그가 전통과 현대 도예의 맥을 잇는, 전 세계 러브콜을 받는 작가라는 걸.
1983년 홍익대학교 공예를 전공한 작가는 적토를 쌓아 형태를 만드는 성형 기법을 통해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대형 옹기에 분칠하는 역동적인 퍼포먼스로 일찌감치 주목 받았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을 공예로 옮긴 듯 즉흥적이고 폭발적 에너지를 내포한 작업 과정은 전세계 아트 페어와 워크숍을 통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3년 샌디에이고 미국도자교육평의회(NCECA) 워크숍을 시작으로, 아트 마이애미(Art Miami), 소파 시카고(SOFA Chicago), 미국 보스턴 파커 갤러리(Parker Gallery), 대영 박물관(The British Museum) 등에 참여하며, 거의 공예로 참가할 수 있는 모든 대회를 섭렵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과 이탈리아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2014 밀라노 트리엔날레에서 열린 <한국 공예의 법고창신>에서 보여준 ‘분청 퍼포먼스’는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 한국의 도자를 널리 알린 대표적 아카이브로 꼽힌다. 특히 런던 골드마크 갤러리(Goldmark Gallery)가 제작한 35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옹기 마스터(Onggi Master)’는 유튜브 조회수만 약 83만 뷰, 코멘트가 346개에 이른다. 소장처의 면면 또한 화려하다. 영국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미술관, 프랑스 세브르 국립 도자기 박물관 등 해외 유수 뮤지엄이 품은 작가 이강효의 작품은 한국 도자의 미감을 알려왔다. “모든 요청을 수용하긴 힘들어 굵직한 전시만 참여한다”고 말하는 작가는, 내년에도 스웨덴 국립 미술관에서 ‘옹기 분청 퍼포먼스’를 앞두고 있다. 해가 뜨고 지는 모든 순간순간, 오로지 도자 작업에만 몰두해온 작가는 “그저 그리고 싶은 세상의 풍경을 흙으로 표현했을 뿐”이란다.
연고 없던 청주로 내려와 도예가로 살아온 지 어느새 서른 해예요. ‘서울 토박이’로서 전시나 주된 작품 판매처가 있는 서울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도예 작업을 하다 보니 시골로 내려와 작업하고 싶더라고요. 경기도는 건너뛰고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작은 도시를 끼고 살면 아이 낳고 키우더라도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아 청주로 왔죠. 경기도에 있으면 찾아오는 이가 너무 많을 것 같고. 청주공예비엔날레가 열리면서 자연스레 저와 인연 깊은 도시가 됐죠.
해외에서 도예가보다 ‘옹기 마스터(onggi master)’라 불리는 것이 인상적이에요. 시대가 변하면서 옹기를 만드는 작가가 많이 사라졌는데, 옹기 작업을 이어가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옹기는 우리가 생활 속에서 장을 담글 때 쓰는 ‘항아리’를 의미하는데, 실생활에서 쓰기 위해 만든 것이죠. 사실 우리가 집에서 편하게 봐와서 그렇지, 옹기 항아리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도예예요. 일상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매력을 인식할 수 없었고, 그렇다보니 소중함을 간과했던 도자의 한 종류죠. 장독에 효소나 장을 담그는 우리 고유 문화가 사라지면서 옹기를 쓰는 이들이 많지 않으니, 전통적인 장인들이 사라질 수밖에요. 토기 시대부터 우리 도자의 역사를 따진다면 큰 항아리를 만드는 기법은 5000년이나 된 거예요. 시대가 요구하는 옹기를 계승, 발전시켜 미학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현대 도예가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셨다고요?
예술가로 살며 그림을 그리고 싶어 1979년에 미대에 들어갔어요. 그 시대에는 예술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막연하게 ‘그림 그리는 이가 예술가’라는 개념 정도밖에 없던 시절이죠.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흙을 만져보니 나를 잘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 보니 제 작품이 조형성보다는 회화성이 짙고요. 사실 이제 예술의 경계는 없는 것 같아요. 아름다운 것만이 예술이던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예술가들이 인간의 감성, 내면의 고통, 추함까지 표현하잖아요.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가 과연 무엇일까?’ 잘 살펴보면서 그런 인간의 내면 감성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가들의 숙명이 아닌가 생각해요.
옹기 기법으로 성형한 도자에 분(粉)을 발라 산과 하늘, 자연의 풍경을 그리는 ‘분청산수(粉靑山水)’는 도예가 이강효를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어떤 과정으로 지금의 작업에 이르게 됐나요.
전통적인 산수는 흰 종이에 먹으로 그림을 그려요. 분청 기법은 반대로 어두운 흙에 백토로 물을발라 작품을 완성하죠. 우리 여인네들이 예뻐 보이기 위해 하얀 분을 발랐듯이 저는 저만의 백토물을 만드는데, 보통 한 작품에 5~6가지를 씁니다. 자연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이미지를 제가 만든 기물에 입히는 거죠. ‘분청으로 산수화를 빚는다’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분청산수라고 지었어요. 10년 정도 된 것 같아요. 그러다가 이따금 항아리로도 표현하고, 벽면에 걸 수 있는 회화 형태(wall piece)나 큰 접시에도 표현해보곤 하죠. 산과 물, 하늘과 나무 등 자연의 모든 풍경을 제 조형 언어로 담고 있습니다.
‘산수’ 가운데서도 작가가 개인적으로 가장 즐겨 그리는 풍경이 있겠죠.
즐겨 표현하는 소재는 하늘 풍경이에요. 하늘은 멈춰 있지 않고 시시각각 변합니다. 동이 텄다 노을이 지고, 이따금 바람이 불고 구름도 흘러가죠. 이미지를 하나씩 쌓으면서 마음으로 그려나가는데, 순간적으로 모든 형태를 관찰합니다. 침묵 속에서 작품과 호흡하고 대화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작업할 땐 라디오도 틀지 않아요. 20~30대, 40~50대 마음이 다르듯이 모든 것은 흐르고 변화해요. 꽃을 피우고 잎이 지는 것처럼 잘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시시각각 모든 것이 달라지죠. 그렇게 소리 없이 변해가는 자연을 그려요. 자연뿐 아니라 제가 변해가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이 시리즈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아무도 모르겠죠.
완성된 분청 작품은 색감과 유약의 흐름 등 모든 것이 각각 달라 더욱 감동을 주는 듯해요. 그 중에는 마치 쪽에 물들인 것처럼 색이 혼재되거나 부식된 금속품 같은 것도 있고요.
그런 것들은 소위 ‘불 맛’을 준 작품이에요.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갈라짐 같은 현상도 일부러 의도한 것이죠. 유약이 마르기 전에 갈대를 표면에 한번 쓱 댔다 떼요. 그러면 산과 바람의 느낌, 형상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와요. 불교를 믿는 이들은 미륵, 아미타불상을 그린 것 같다고 하죠. 감상은 온전히 느끼는 사람의 몫입니다. 작가의 작품이라는 건 그런 것이잖아요?
인터뷰를 이어가던 작가가 작은 수레 하나를 끌고 온다. 수년간 전국의 흙을 채집해 토련한, 작업에 최적화한 점토 꾸러미다. 툭툭, 한 묶음씩 바닥에 던진 작가가 그것들을 두 손에 들고 늘여 얇고 긴 실타래를 만든다. 마치 빵 반죽을 하는 제빵사의 모습이 겹친다. “도자기 빚는 게 밥 짓고 빵 만드는 것과 비슷해요.” 작가가 의도를 읽은 듯 웃으며 답한다. 이내 한 더미를 어깨에 걸치고 물레를 돌리며 본격적인 판 성형을 시작한다. 판을 한 줄 얹으면 틈과 틈 사이를 손가락으로 다듬으며 형태를 다져간다. 쌓고, 잇고, 마감하는 과정 속에서 금세 적토로 만든 삼각꼴의 ‘옹기’가 탄생했다. 작가는 이어 작은 방망이로 옹기 윗면을 툭툭 다져가며 서너 자락 능선을 자연스럽게 다듬어갔다. 상부를 실로 개폐한 뒤, 아직 마르지 않아 말랑말랑한 적토를 살짝 비틀어 입체감을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자연의 소재로 또 다른 자연을 빚는 공예의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큰 작품을 빚다 보면 개방부가 점점 좁아지면서 안쪽 부분처럼 전혀 보이지 않는 영역이 생기죠. 도예가들에게는 온전히 보이지 않는 영역을 빚는 ‘손이 기억하는’ 놀림이 있을 것 같아요.
좋은 얘기예요. 장인들의 손은 제2의 눈입니다. 경험을 통해 어떠한 형태를 만들지 눈과 협업합니다. 세상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움직여요. 사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10%도 되지 않는 것 같아요.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우리 예술가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해요.
작업 과정을 보고 있으니 새삼 도자에서 ‘흙’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
흙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색상, 성질 같은 것을 잘 이용하는 것이 도예가가 먼저 공부해야 할 부분이죠. 시간이 날 때면 전국 각지로 흙을 보러 다닙니다. 보통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천연토를 가지고 와서 먼저 구워봅니다. 일반적으로 좀 어두운 색상의 흙(dark clay)을 사용하는데, 분청 기법을 활용해 작품을 완성하기 때문이에요. 철분이 많이 함유된 흙을 찾죠. 철분은 불에 들어가면 녹기 때문에 굽고 나면 기존 색보다 짙게 표현돼요. 갈색 톤으로 나올 정도로 어두워진다고 보면 돼요. 한 가지 흙만 쓰는 것도 아니에요. 색상이 좋은데 만들기 어렵다든지, 만들기는 수월하지만 가마에서 불에 견디는 힘이 약하다든지 하는 흙이 있어요. 또 너무 곱거나 거친 흙도 사용하기 힘들기 때문에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그런 것들을 서너 가지 가지 섞어 구워봅니다. 산청과 하동 쪽 흙으로 주로 작업하고 있어요.
옹기를 빚을 때 어깨에 얹는 적토의 무게가 제법 나가 보여요. 체력적으로도 힘든 부분은 없나요?
사실 작가들은 작품 완성도로 보면 40~50대가 전성기예요. 도자 예술을 하려면 학문을 결합한 복합적인 공부를 해야 해요. 그래서인지 나이 들수록 좋은 작업이 나오는 것 같아요. 단순히 체력적인 부분으로만 얘기할 수 없는 게 예술이죠. 젊은 시절에는 불이나 유약을 다루는 데 여러 가지로 미숙하죠. 실패율이 높으니 ‘10개를 만들어 하나를 남긴다’는 마음으로 연륜을 쌓아가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니 일은 덜해도 좋은 작품을 얻는 기회는 더 많다고 봐야죠.
이강효 작품의 큰 맥락이라 할 수 있는 ‘분청 기법’에 대해서도 말씀을 듣고 싶은데요. 채색 작업은 어떻게 진행하는지 보여주시겠어요?
흙이 어느 정도 마르면 ‘천연 흙’으로 밑 채색을 합니다. 붉은빛을 띠는 갈색인데, 불에 구우면 훨씬 밝은 핑크빛이 돌아요. 밑색을 칠하면 하얀 백토를 물에 게워요. 그걸 주전자에 담고 백토의 농담에 따라 짙고, 옅게 전체를 흘려 덮죠. 백토물을 위에서 부으면 시냇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림이 그려지는데, 몇 번 덧입히는 과정에서 ‘숨은그림찾기’ 하듯 미세한 농담의 변화가 일어나요.
같은 백토지만, 물줄기의 강도나 유체의 흐름이 달라 더욱 자연스러운 멋이 있어요.
주전자 구경, 구멍의 크기에 따라 물줄기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그에 따라 그림 형상도 달라집니다. 물줄기의 흐름에 따라 그림을 그려나가는 거죠. 밑 채색을 옅게 한 부분은 선명하면서 시냇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모양이 나와요. 중간중간 손등이나 손가락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풀잎을 살짝 얹어 미세한 표현을 하기도 하고요. 산이 되기도, 바람이 되기도 하고. 힘의 강약에 의해 풍경이 자연스럽게 담기는 거죠. 불에 굽고 나면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선명해집니다. 지금은 모두 하얗게 보이지만 불에 구우면 밑에 배색된 색들이 쭉 올라옵니다. 이렇게 분칠한 뒤 2주 정도 자연 건조하고 초벌에 들어가죠. 한번 구운 작품에 유약을 입히고 1200~1300℃에서 재벌하면 흙이 돌처럼 단단해지면서 비로소 분청산수가 완성됩니다. 한 달 정도 걸리죠.
즉흥적인 선과 내부의 에너지를 끌어내는 퍼포먼스 작업 요소가 있다 보니 해외에서 선보인 ‘분청 퍼포먼스’가 유튜브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어요. 전통적인 작업을 하지만 그것을 소개하는 방식에 있어 미디어에 익숙한 요즘 세대와도 교감을 이루는 것 같습니다.
제 작업에 퍼포먼스적 요소가 있다 보니 유럽, 미국 등 큰 국제 행사의 개막식 참여 요청이 많이 들어와요. 내년에도 스웨덴 국립 미술관에서 여는 전시의 퍼포먼스가 예정되어 있죠. 사이즈 문제로 운송하기 힘들기 때문에 해외에서 점토를 주문해 미리 가서 만들고 시연합니다. 유튜브에 여러 영상이 있는데, 제 작품을 판매하는 런던 골드마크 갤러리 직원들이 한국을 찾아와 9일 동안 머물며 촬영한 영상이 잘 만들어져서 유럽 다큐 필름 페스티벌에도 출품했죠.
춤을 잘 추신다는 걸 영상을 보고 알았어요.(웃음) 사물놀이 음악을 틀어놓고 퍼포먼스를 하시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작품이 워낙 크다 보니 에너지를 얻기 위함이죠. 사물놀이는 우리나라 농악 예술로, 농사지을 때 겪는 고단함과 시련을 달래주잖아요. 우리의 정서, 시름, 한, 기쁨, 즐거움 등 모든 것들이 표출되는 거죠. 초반에는 음악에 몰입하지만 나중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오로지 작품과 나 사이의 교감만 존재하죠. 옹기 기법이나 분청사기 기법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해서 그런 에너지를 표출하는 데 적합한 음악이에요.
해외 컬렉터에게 '분청'이란 장르는 도자에서도 낯선 장르인데, 그들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지 궁금합니다.
분청이란 회화적 요소가 많은 도예 장르예요. 손으로 도자 표면에 색을 칠하거나 디테일을 더하는 작업이 외국에도 있기는 하지만, ‘즉흥성’이란 측면에서는 외국에서는 보지 못한 작품이거든요. 그렇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느껴 인기가 많은 편이에요. 특히 영국은 도자를 대하는 태도가 훨씬 진지해요. 홍차 문화가 있어서 다기를 좋아하고 도예에 대한 일반인의 지식도 상당하죠. 영국에서 판매가 가장 많이 이뤄지는데, 분청산수 요청이 주를 이뤄요.
V&A 뮤지엄, 프랑스 세브르 도자 박물관 등 세계 도자의 주요 보고라 할 만한 곳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어요.
해외 페어에 나가면 외국 컬렉터들이 한국, 중국, 일본 부스를 한꺼번에 돌아요. 그리고 마음에 드는 작가에게 관련 자료를 요청해 그것을 토대로 구매합니다. 작품을 구입해 사회에 환원하거나 뮤지엄에 기증하는 컬렉터가 많기 때문에 큐레이터와 함께 찾아와 상의하는 경우도 많아요. 우리나라도 그런 제도를 이용하면 좋은데, 기관이나 기구가 많지 않아 안타까워요.
세계 도자 강국인 한중일(韓中日), 세 나라의 도예 스타일이 같은 듯 저마다 달라요. 해외 무대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한국적인 도자’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결국 민족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산수와 풍토에서 기인해요. 그에 따라 사람의 성격, 문화가 형성되죠. 중국은 2000년 동안, 송나라, 청나라, 명나라 시대에 세계의 중심이었어요. 그래서 표현이 장대하고 스케일도 큽니다. 건축물을 봐도 직선적이고 안정적이고요. 일본은 화려하고 곡선을 많이 써요. 우리나라의 건축물은 직선과 곡선이 혼재되어 있죠.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풍토 때문이에요. 지형적인 부분에서 기인하죠. 우리나라는 산이 70%를 차지해요. 어딜 가나 산이 있고 밑에 마을이 있고 계곡이 형성되어 있죠. 산도 직선과 곡선이 완만하게 중첩되어 흔히 병풍 같다고 말해요. 이런 데서 문화적인 성격이 형성되지 않았나 싶어요. 바라보는 산이 아니라 올라가 놀고, 감상하는 자연이죠. 그런 곳에서 우리의 조형성이 형성되고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같아요. 외국에 나가 한국 도자기와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제 작업의 토대와 원료를 자연스럽게 소개하다 보면 그게 결국 한국 작품에 대한 이야기더라는 거죠.
편리하고 익숙한 것에 길든 시대에 공예가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AI 시대’라고 할 만큼 세상이 워낙 빠르게 변하고 있죠. 하지만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인간의 삶이 편리해진다고 해도 세상에는 그 흐름과 달리 흘러가는 것들이 있어요. ‘천천히’ 가는 예술적, 공예적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인간의 감성은 그렇게 급박하고 빠른 호흡을 원치 않아요. 시대와 마음이 분위기에 취해 흘러가는 것일 뿐, 느리게 본연의 몫을 다하며 나가야 하는 것들이 있어요. 속도를 늦추며 나만의 호흡으로 만드는 행위, 그 과정에서 위안을 얻고 인간적 감성과 만나는 것. 그게 공예의 본질 같아요.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거죠. 작가는 대중과 호흡해야만 해요. 사실 ‘상대’ 없는 예술은 무의미해요. 예술가들은 그 접점을 찾아야 해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대중이 원하는 것 사이에서요.
이강효 | KANG-HYO, LEE
'물과 바람, 숲, 별'과 같은 하늘의 이미지를 차용해 ‘도자’라는 캔버스에 자연의 형상을 빚어온 작가다. 옹기 기법으로 형태를 다진 뒤, 백토물을 부어가며 ‘손의 감각’을 활용해 즉발적인 그림을 그리는 분청 기법으로 유명하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를 졸업한 뒤, 독자적인 미감을 뽐내는 분청자기로 한국을 대표하는 공예가로 자리매김했다. 작품 주요 소장처로 영국 대영 박물관,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미술관, 프랑스 세브르 국립 도자기 박물관, 미국 필라델피아 박물관, 시카고 현대미술관, 이탈리아 파엔차 국제 도자기 박물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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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미지 © 이강효 – ARTMINING, SEOUL,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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