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 장남미 (매거진 아트마인 콘텐츠 디렉터)  PHOTOGRAPH 이주연  VIDEO 최해명 (비비이엔티 컨텐츠팀), 황승헌 (매거진 아트마인 영상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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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기억(moment)'이 제게는 '보석'이라는 작가 박주형

유일한 ‘하나’에 대해 이야기를 건네는 작업을 하지만, 단 하나의 재료에 자신을 제한하지 않는 작가 박주형은, 금속공예로 길을 열었으나 자기만의 색을 보여줄 재료인 ‘나무’와 만난다. 나무와 금속의 과감한 결합이 흥미로운 ‘Moment, Pleasure II’ 연작을 내놓기 시작한 2014년 이전, 미국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RISD)과 영국 왕립예술학교(RCA)에서 수학한 후 한국으로 돌아온 2012년부터다.
“큰 틀을 만들어놓고 나무를 깎아나가지만, 어느 순간 나무 스스로의 무늬를 만나게 돼요. 처음 구상한 디자인이 있어도, 나뭇결이 저에게 주는 느낌에 따라 조금씩 변하게 되지요. 그 과정에서 나뭇결과 제가 그려놓은 그림이 만나 작업이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제 손으로만 작업을 할 것 같아요.”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손을 그린 수많은 20세기 예술가가 떠올랐다. 정신의 부속이 아닌 창조자로서의 손에 대해 탐구한 마틴 바인만(Martin Weinmann)이 <손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영감을 얻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그럴 때마다 받쳐주는 ‘손’이 있었다”라고 한 말이 박주형 작가의 생각과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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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ment, Pleasure II-18>

2015년 갤러리 바움에서 현대 장신구 기획전 <컨템플라스틱(Contemplastic)>을 열며 작가는 “정밀한 측량과 계획을 토대로 하는 건축적 방법론을 작업에 적용해 완벽함을 구현하는 장신구 작업을 추구했으나,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낸 완벽한 오브제를 망가뜨리고, 이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치며 우연히 생겨나는 아름다움을 통해 작가로서 자신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았다”라고 얘기한 바 있다. 모범적인 룰 안에서 살아도 부족함이 없던 그녀의 삶이 ‘실험적인 시도’로 채워지기 시작한 순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작은 창고를 개조한 첫 작업실에서 ‘제 의지로 만들고 싶어서 한 자화상 작업’, 혹은 유년기의 사진 속 제 얼굴을 반지로 치환해 만든 ‘젊은 공예가의 초상(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Jeweler)’ 연작, “수천 명이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식도구가 세상에는 이미 많은데, 왜 그와 똑같은 하나를 만들어야 하는가?” 되묻는 ‘기발한 커틀러리’ 작업인 ‘Moment, Pleasure I’, ‘Merging’이 발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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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ment, Pleasure II-10-3>

골동품 가게나 빈티지 마켓에서 찾아낸,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오래되고 낡은 커틀러리를 작품에 사용하는 작가가 찾는 ‘순간(moment)’과 ‘기쁨(pleasure)’이라는 화두는 그런 점에서 흥미롭다. 입과 숟가락 사이에는 탄광 속 석탄을 제거하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오래된 격언이 의미하는 맥락과 같이 박주형의 작품은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기 위해 커틀러리가 사용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 모습이야말로 커를러리의 존재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자, 완성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손으로 숟가락을 사용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다시금 그 순간이 또 하나의 도구가 되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로서 완성되는 작품인 것이다. 미학자 미셸 투르니에는 일상 사물 가운데 하나인 숟가락에 대해 “어원학자들이 숟가락이란 말의 어원이 라틴어의 달팽이 껍질(cochlea)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해도 ‘수집하다’라는 동사와의 유사성을 불가피할 정도로 분명하다. 숟가락에는 우유에 보릿가루를 넣어 끓인 죽을 갓난 아기에게 먹이는 어머니의 애정 어린 끈기의 원형과 오목함과 부드러움이 있다”라고 했다. 박주형의 커틀러리는 그렇듯 생존을 위해 필요한 식도구를 보며 지리멸렬한 밥벌이의 지겨움을 떠올리는 어떤 이들에게도 한 번은 있었을 빛나는 순간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작업이다. 이 이야기를 지속해온 작가에게도 ‘과정’ 가운데 생겨난 변화가 있다.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이다. 애초에 의도와 다르게 읽혀도 ‘괜찮다’고 할 만한 여유가 생겼다. 무리한 의미로 덧씌운 작업을 지양하지만, 순수한 호의를 갖고 작품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펼쳐두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보려 한다. 이전과 또 다른 새로운 무언가가 빚어지는 순간이 될 수 있으니. 영감은 멀리 있지 않다고 믿는 작가의 모든 작업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제 ‘두 손’에서 발현되었듯. 그 자체로 놓고 봐도 ‘여백’이 팔 할인 반지를 보자. 박주형 작품의 주요한 미라고 일컬어지는 ‘여백(공간)의 미’는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빈 곳에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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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즐거움에 빠져 만든 최초의 작업은 무엇인가요?
뜨개질 같은 단순 노동을 좋아해요. 복잡한 패턴 없이 여러 색을 엮은 단순한 목도리 뜨기 같은 일이요. 작품으로는 부암동 작업실에서 그린 자화상이 있어요. 잡지를 뜯어 콜라주해 그린 자화상인데, 제 의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룬 것이라 포트폴리오에도 넣었죠.

또 다른 특별한 자화상 시리즈인 ‘젊은 공예가의 초상(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Jeweler)’도 흥미로워요.
2012년, 대학원에서 도구 관련 프로젝트로 하게 된 작업이에요. 제게 가장 중요한 도구인 ‘손’을 사용하고, 제게 의미 있는 재료를 이용하자고 생각했어요. 저만의 반지를 만들고, 구멍을 낸다는 전제에서 접근했는데, 가족과 추억이 담긴 사진에 구멍을 내려니 아무리 생각해도 남는 자리는 제 얼굴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제 얼굴이 아니라 기억에 남은 행복한 추억이니, 개의치 않았죠. 이 작업을 두고 수업에서 받은 크리틱이 기억에 남는데, “이 사진이 만약 원본이라도 네 얼굴에 구멍을 낼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어요. 꽤 고민했지만 낼 수 있다고 답했죠. 결국 정말 필름도 없이 사진첩에 딱 한 장 있던 원본 사진을 사용해 작품 하나를 만들었는데, 컬렉터 한 분이 너무 좋다고 사 가더라고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갖고 있어도 의미 있는 작품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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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jeweller>, 2012-2013, Ring / Paper, yellow gold plated silver

‘손을 도구로 이용해 이야기하고 싶은 작가’라고 정의했고, 다양한 금속 기법을 연마하는 학업과정도 거쳤는데,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오래된 커틀러리를 수집해 재활용하는 이유가 있나요?
금속공예에 사용하는 도구를 보통 사람은 평생 접해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걸 이야기하기에는 재미가 없더라고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도구로서 손 외에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 찾은 대상이 커틀러리예요. 오래된 커틀러리에 새로운 식기 도구로서의 삶을 주고 싶었어요. 새로운 기억을 지니고 이용될 수 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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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에 따라 사용하는 작업대가 여럿인 작가가 주로 금속을 다룰 때 사용하는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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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작업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나무 내부의 '결'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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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조각과 조각을 붙여 만들어도 되지만, 작가는 통나무를 조각하는 방식을 고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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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 학사, 영국 왕립예술대학교 석사 학위 취득 후 한국에 돌아와 이전에는 몰랐던 매력을 알게 된 '옻칠'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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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동품 가게나 빈티지 마켓에서 수집한 오래된 커틀러리들.

암스테르담의 슈테인베이저(Steinbeisser)는 조우(Jouw)라는 온라인 쇼핑몰을 만들어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의 실험적인 커틀러리를 전시하고 판매하는데, 음식을 먹는 일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유도하는 식도구가 상상력을 자극하더군요. 작가의 커틀러리도 다수 있고요.
2009년에 설립한 슈테인베이저는 유명한 요리사와 예술가가 함께 최고의 요리 경험을 제공하는 특별한 식문화(The Experimental Gastronomy)예요. 모든 음식과 음료는 채식에 기반하는데, 많은 예술가와 디자이너가 만든 실험적인 식기와 식도구를 사용해요. 최고급 요리법과 개념적 디자인 관행을 접목하고 음식을 즐기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을 제공하는 독창적인 시간을 갖는다는 의미로요. 2012, 영국 왕립예술학교에서 만난 친구와 협업으로 이들과 일하기 시작했어요. 제 작업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됐죠. 올해 8, 새로운 나무 숟가락 55개를 그쪽에 보내야 해요. 이번 작업을 보고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요.

통나무를 조각하는 방법으로 나무를 다룹니다. 모든 작업이 그러한가요?
. 나무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들어도 되지만, 나무와 나무의 결이 엇갈리는 게 맘에 들지 않더라고요. 결국 그 작업은 색을 올린 옻칠로 덮어버렸어요. 나무를 구할 수 있을 때까지는 큰 덩어리에서 깎아나가는 방식을 지속하려고요. 요즘 스케일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사이즈가 꼭 중요하진 않지만 장신구 작가 작업만 주로 접하던 이전과 다르게 가구라든가 오디오 작업도 너르게 보면서 큰 작품들이 주는 웅장함에 매력이 느껴져요. 혼자 작업하는 저로서는 제한된 사이즈와 무게가 있지만, 좀 더 큰 작업을 시도해보려고요.

선호하는 나무가 있나요?
제일 좋아하는 나무는 아프리카산 나무인 부빙가예요. 색은 불그스름하고 성질은 단단하죠. 호두나무, 모아비, 홍송을 주로 사용해요. 조각하기 쉬운 나무는 연한 쪽인데, 가벼운 느낌이 들어서 선호하지 않아요. 연한 나무는 색이 옅기도 하고, 색칠을 하지 않는 이상 옻칠을 올리면 결국 모두가 아는 고전적인 옻칠 색이 나와요. 너무 쉽게 깎이는 점도 재미가 없더라고요. 또 연성인 나무는 작업하면서 사포할 때 제가 원하는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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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옻칠 장으로 사용하는 개인용 사우나는, 습도가 90%까지 유지되어 하루면 칠이 바짝 마른다. 옻칠은 여름과 겨울에 마르는 속도 차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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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옻칠인가요? 색을 올리는 데 사용하는 옻칠은 작가만의 조색 데이터가 있나요?
옻칠에 톤 다운된 색이 저와 잘 맞아서요. 수식화된 결과물로 컬러 칩 데이터도 만들어가고 있어요. 원래는 그렇게 하지 않고 기분 내키는 대로 했는데, 나중에 그 색을 어떻게 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하지만 습도가 높을 때 빨리 마른 색과 천천히 마른 색에 결과물이 달라서 컬러 칩으로 정량화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해요.

공예와 아트, 디자인을 결합한 다층적인 작업을 하는데, 기술의 시대에 수작업으로 하는 공예에 대해 오래 고민했다고요.
‘Moment, Pleasure II’ 작품을 보면 많은 이들이 손으로 깎았느냐고 물어요. 3D나 CNC로 작업했느냐고요. 그쪽으로 해보면 작업도 빨리 된다고 의견을 제시해주는데, 저는 AI가 발전해도 건드릴 수 없는 것이 예술 분야라고 생각해요. 제 경우 기본 스케치를 해놓지만 만들면서 손이 원하는 방향으로 따라가게 되는데, 그 과정은 사람이라서 가능한 일이라고 믿어요. 그래서 손으로 하는 방법을 계속 고집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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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제 작업부터 커틀러리 작업에 주요한 재료로 사용하는 '나무'를 예술 장신구 작업으로도 발전시켜 가고 있다. 작가의 작업을 큰 맥락으로 연결하는 '지점'이 된다.

일반적인 실용성에서 벗어난 도구는 충분이 아름다운 오브제로서도 사랑받고 있는데, 아트 주얼리를 만들어온 작가는 실용적인 착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젓가락과 숟가락을 합친 첫 커틀러리 작업이 한 예가 되겠네요. 실생활에 아주 편리한 작업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용은 가능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세 달가량 제가 직접 사용해봤어요. 불편하긴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았죠. 오브제적인 성격이 강한 ‘Moment, Pleasure II’ 역시 조각 작업이지만 그릇으로도 사용하자면 활용할 수 있는 것이기를 바랐고요. 그릇 혹은 티 테이블로 애초에 용도를 부여하지 않은 이유는, 이 작품 고유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 같아서예요. 예술 장신구로 마찬가지예요. 꼭 착용해야만 이 작품에 의미와 가치가 있는 걸까요? 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누리는 예술 장신구 수집가(Art Jewelry Collector)들은 왜 그러한 수집을 계속하는 걸까요? 우리는 왜 예술품을 사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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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미지 © 박주형 – ARTMINING, SEOUL, 2018
PHOTO © ARTMINING – magazine ARTMINE /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