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칠이 다른 도료에서는 표현 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효과를 내는 탁월한 도료라는 것을 확신했다”
– 김옥 작가
WRITE 이보현(매거진 아트마인 콘텐츠 에디터) PHOTOGRAPHY 김동오 VIDEO 매거진 아트마인 영상팀
얼핏 보면 어슷하게 썰어둔 나무토막들이 위태롭게 쌓여있는 것 같다. 사선으로 잘린 형상들이 불안이 감도는 가운데 균형을 이루며 결합하여 서로를 지탱한다. 독립된 개체 표면 위로 수많은 색이 겹겹이 쌓여 화려한 색감의 패턴을 보인다. 구조적 적층과 표현적 축적, 작가 김옥이 만드는 옻칠 아트 퍼니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 산등성이에서 쉽게 발견되는 막돌탑에서 영감을 받은 작가는 보이는 형태 너머로 잔재하는 행위의 의미에 집중했다. 비스듬하지만 정성스레 쌓여 있는 돌마다 염원과 희망이 담겨있음을 포착한 그녀는 자신의 가구 역시 누군가에게 긍정의 힘을 전달하는 매개가 되길 바라는 철학을 담아 ‘Merge Series’를 제작했다. 김옥의 시그니처가 된 이 시리즈에선 절제된 기하학 형태 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색상에서 느껴지는 응축된 폭발적 에너지에도 눈길이 간다. 기본적으로 품이 많이 드는 옻칠 기법 중에서도 가장 노동집약적이라 할 수 있는 ‘교칠기법’을 택한 작가는 이를 두고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 말한다. 수십 번 옻칠과 연마를 반복하며 쉼 없이 채우고 비우기를 거듭하는 동안 옻칠 층은 겹겹이 축적되었다 소멸하며 찰나 머물렀던 흔적을 남긴다. 의도했으나 의도하지 못한 의외의 색 조합이 이루는 조화로운 이미지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패턴이 되어 작가의 이야기가 담긴 가구를 감싼다. 국내를 넘어서 해외의 주목을 한껏 받는 작가는 2019년 올해 초 권위 있는 공예 Fair ‘Collect’에서 런던의 ‘Mint gallery’ 부스를 통해 작품을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곧 시작될 2019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 ‘Salon Satellite’ 부스 참가로 누구보다 바쁜 작업 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김옥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김옥 작가 작업실 벽 한쪽에는 작업에 사용하는 도구가 정갈하게 걸려있다.
원하는 색을 얻기 위해 직접 조색을 하고 판재 위에서 테스팅을 거치기도 한다.
작년 한 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의 많은 전시에 참여하면서 누구보다 바쁜 전시 일정을 소화했어요.
서울문화재단 후원으로 갤러리 도스에서 첫 개인전도 갖고, DDP에서 열린 2018 아트마이닝-서울전을 포함한 여러 단체전에도 참여했어요. Pun + projects & the artling 주관하는 홍콩 <Collectible design>전과 밀라노 디자인 위크 <2018 Salon satellite>, 2019년 올해 초엔 런던 민트 갤러리를 통해 <Collect>에 참가해 국제적인 무대에서 작품을 선보였어요. 특히나 올해로 2년 연속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참가하게 되어 감회가 남달라요. 학생 때 밀라노 박람회를 구경하며 ‘언젠가 나도 이러한 꿈의 무대에 서고 싶다’란 생각을 했었거든요.
작가의 생명력에 대한 고민 끝에 ‘옻칠’을 선택했다고요.
부산대학교 목공예 전공을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가구 디자인 전공에서 지금의 작업을 시작하기까지 공백기가 꽤 길었어요. 어릴 때부터 미술을 해왔던 터라 제 미래는 당연히 미술 안에 존재할 거라 생각했는데 대학 시절 2년간 어학연수를 다녀오면서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세상의 다른 것들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무역회사와 방송국, 영어 학원에서 일하며 6년이란 시간을 보냈어요. ‘언젠가 다시 작업으로 돌아가야지' 하는 생각은 늘 갖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대학원에 진학해 작업에 매진하려고 하니 오랜 시간 손을 놓았던 재료와 기계를 쓰는 것이 두렵더라고요. 혼자서 작업하기에 규모나 무게 면에서 들고 깎고 나르기에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고요. 작가로서 오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다 운명처럼 과거 옻칠에 흥미를 가졌던 것이 떠올랐어요. ‘이거다’ 싶어 결단을 내리고 무형문화재 손대현 명장님을 찾아 3년간 수업을 들으며 옻칠 기술을 터득하기 시작했죠.
'교칠기법' 특성상 토회칠과 생칠을 반복한 뒤 표면에 의도적으로 요철을 낸다.
커피가루를 뿌리기도, 종이를 구겨 질감을 내기도 한다. 토회칠의 두께에 따라 옻칠 층이 두터워지기도 또 얇게 표현되기도 한다.
형태의 모티프가 ‘돌탑’에서 시작된 만큼 보는 작품에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자 했어요.
졸업 작품을 구상할 때 답사 차원으로 방문한 통도사에서 돌탑을 발견했어요. 적층형 구조를 띤 돌들이 쓰러질 듯 말 듯 균형을 이루는 것이 불안과 긴장을 자아내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평온해지더라고요. 기원이나 소망을 담아 탑을 쌓는 민간 신앙적 관습에 담긴 따뜻한 의도를 제 가구에 적용하고자 했어요. 사용하는 이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으로요.
조형미를 극대화 하기 위해 그동안 다뤘던 나무가 아닌 금속을 바탕 재료로 삼는 과감한 시도도 했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나무보다 금속은 비스듬한 형상을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또 옻칠작업을 마무리한 뒤에 일어날 형태 변형에 대한 위험부담도 적어 수월했어요. 아무래도 칠이 되는 바탕 재료가 다르다는 점에서 옻칠의 적절한 안착력과 내구성을 갖추기까지 꽤 여러번의 실험을 거쳤죠.
옻칠 작업 중 주 기법으로 활용하시는 ‘교칠기법’이 삶의 모습과 닮았다고 하셨어요. 작업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요.
교칠기법 특성상 바탕 재료 표면에 흙에 생칠을 섞은 토회를 바른 뒤 인위적으로 요철을 내고선 채색을 해요. 그다음 사포 연마를 통해 울퉁불퉁한 표면을 깎아가며 평을 만들죠. 이때 부분적으로 색이 벗겨지기도 또 남기도 하는데 수십번의 칠을 통해 축적된 색상 층이 드러나며 오묘한 색 조합을 이뤄요. 상당히 노동집약적인 작업과정에서 제 삶의 모습이 연상되곤 해요. 작업 표면의 굴곡처럼 인생에도 크고 작은 시련이 툭 튀어나와 걸려 넘어지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부딪히다 보면 나 자신을 찾게 되잖아요. 긴 시간을 버텨낸 뒤에 얻게 되는 겹겹이 쌓인 색의 패턴이 궁극적으로 내가 삶에서 얻고자 하는 결과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옻칠 기법 중 가장 품이 많이 들기로 알려진 '교칠기법'을 활용하는 만큼 많게는 15번의 색상 칠을 반복하고 수백 번의 사포 연마를 거듭한다.
노동집약적인 과정마저 성실하게 임하고자 하는 작가는 결국 세상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색채의 향연을 얻어내고야 만다.
김옥 작가의 옻칠 아트 퍼니처 'Merge series'
다채로운 색의 모티프는 무언가요.
한국의 사계절이요. 통도사에 머물때 사찰이 주변을 둘러싼 자연 환경과 동화되어 있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문득 계절이 변화함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색감이 늘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머물러 있는 절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죠. 제가 느낀 색채가 지닌 강력한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했어요.
작품마다 다르지만 한 작품당 대략 9가지의 색이 들어가고 15번 이상의 칠을 반복해요. 여기서 색상 선택만큼 중요한 것은 색의 끝을 맺는 결단력이라고 했어요.
여러 색상을 의도해서 선택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이는 색감의 이미지는 또 우연에 기대야 하는 만큼 매 순간 어디서 멈춰야 할지에 대해 고민이 많아요. 제 작업은 끝날 때까지 몰라서 항상 마음 졸이며 작업해요. 가장 위에 드러나는 색 못지 않게 가장 밑에 깔린 색 역시 중요해요. 수십 번의 연마를 거치다 보면 언젠가 표면위로 드러나니까요. 수백 번의 사포질 끝에 얻게 되는 융합된 색의 결과가 아쉬울 때면 부분적으로 토회를 바르고 색을 다시 채워넣을 수도 있지만, 함부로 쉽게 건들이진 않아요. 그 역시 그동안의 제 열정이 고스란히 묻어난 결실이니까요.
오브제로도 또 가구로도 존재하는 열린 쓰임을 지닌 아트 퍼니처는 기능성과 심미성의 적절한 조화가 필수적이에요.
공간에서 분리와 적층이 가능한 가변성을 지닌 조형물이자 도구적 기능에 충실한 가구로써 존재하길 바랐어요. 그런데도 그저 가구가 아니고 또 그저 예술품이 아니기에 최소한의 룰을 지키고자 했죠. 생각을 매개하는 수단인 예술품이란 측면에서 표현도 중요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비례와 균형을 맞춰 형태를 구체화했어요.
옻칠이란 재료가 주는 동양적인 이미지 때문에 전통 디자인이 연상되곤 해요. 그 한계에서 벗어나 세계적으로 현대인이 공감할 수 있는 디자인을 추구하고자 했어요.
지난 해외 전시 기간 중 “작품 옆에 서 있지 않았다면 당연히 유럽 작가가 만든 것이라 생각했을 것” 이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색’이 제 작업의 전부는 아니지만, 재료적 이미지에 국한되기보단 작업 전면에 드러나는 색감의 표현으로 작품이 읽힌다고 생각해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한국적인 것' 이란 무엇일까요?
옻칠을 활용하는 만큼 우리 전통에 관련된 질문을 많이 받아요. 일부러 의도하지 않지만 제가 한국 사람인 만큼 저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특유의 우리 정서가 배어들긴 하겠죠. 한국적이라는 것이 시대와 관점에 따라 규정이 달라지는 만큼 지금 이 시대를 사는 ‘나’라는 한국 작가의 표현이 담긴 것이 가장 한국적인 것 아닐까요.
최근에 뉴욕에 사는 컬렉터이자 디자이너인 파르난도가 마스트란젤로 (Fernando Mastrangelo) 가 작가님 작품을 구입한 뒤 개봉하는 일명 언박싱(Unboxing) 영상을 촬영해 직접 개인 SNS에 올렸어요.
작년 12월 파르난도 마스트란젤로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제 개인전을 찾아왔어요. 작품에 관심을 보이며 나중에 구매하고 싶다고 했는데 정말 제 작품의 컬렉터가 되어주었죠. 누군가가 내 작품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스크린을 통해 생생히 보는데 감동적이더라고요. 자신의 계정에 제 작업을 따로 소개하는 글을 올린 것을 보는데 뿌듯하면서도 고마웠어요. 머지않아 뉴욕에서 그간 콜렉팅했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를 열 계획이 있다고 해요.
작가로서 가장 중요하게 꼽는 신념은 성실함이라고요.
언제나 최선을 다해 결과물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해요. 마음에 안 드는데 괜찮은 것처럼 그냥 대충 편하게 넘어갈 순 없어요. 작업에 대해 깊이 고뇌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흔적은 작업에서 전부 드러나기 마련이에요. 성실함과 진실함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쭉 작업해나가고 싶어요.
김옥 | OK-KIM
부산대학교 미술학과 목공예전공, 홍익대학교 디자인콘텐츠 대학원 가구 디자인전공을 졸업했다. 우리 전통 기법 옻칠을 현대적인 디자인의 가구에 접목해 탄생시킨 작가만의 시그니처 'Merge Series'는 등장과 동시에 국내외 컬렉터들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자연에서 발견한 막돌탑의 형상의 모티프에 사계를 투영하고자 한 작가는 기하학적 형태를 불완전하게 잘라 결합한 형태 위에 다채로운 색상을 차곡차곡 쌓는다. 옻칠 기법 중 가장 품이 많이 들기로 알려진 '교칠기법'을 활용하는 만큼 많게는 15번의 색상 칠을 반복하고 수 백번의 사포 연마를 거듭한다. 노동집약적인 과정 마저 성실하게 임하고자 하는 작가는 결국 세상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색채의 향연을 얻어내고야 만다. 2018년도 Gallery DOS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작가는 홍콩에서의 The Artling x PUN project, 런던 Mint 갤러리에서의 Rock Salt Air Paper, 이탈리아 밀라노 2018 SaloneSatellite를 포함한 수많은 단체전과 페어에서 자신의 작품을 세계 대중에게 선보이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2019년 Collect 페어를 시작으로 작가의 또 다른 신작이 공개될 밀라노 2019 SaloneSatellite 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