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게 그의 도예를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따뜻한 질감, 그리고 넉넉한 푼주의 세계’라고 답할 것이다.
_ 유흥준 (전 문화재청장)
WRITE 장남미 (매거진 아트마인 콘텐츠 디렉터) PHOTOGRAPHY 최민석 VIDEO 매거진 아트마인 영상팀


끊임없이 나무물레를 발로 차는 작업에는 작가의 힘찬 호흡이 얽혀 든다. 이어령 선생이 ‘선 예술의 극한’이라 이른 신경균 작가의 사발은 달항아리 작업의 근간이다.
만 세대가 이어가도록 길이 편안한 땅이라는 뜻을 가진 ‘장안요(長安窯)’. 15-16세기 한국의 분청 도자기법과 17세기 백색 도자기를 추구해온 신경균 작가의 터전이다. 흙, 유약, 안료, 불까지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전통 방식을 고수해온 작가는, 1960-70년대 고려다완을 재현한 것으로 잘 알려진 故신정희 선생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그는 열 다섯부터 발로 돌리는 나무물레질을 익혔다. “도자기가 배우고 싶어 스스로 물레에 가 앉았다”던 소년은 “또래보다 작은 키로 낑낑대며 물레를 찼어요. 가마불도 한 달에 열 번도 땠어요. 전쟁 치르듯 일했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 그때 그대로 “아무 딴짓도 안하고 내 하고 싶은 도자만 하고” 45년을 살았다.
한결 같이 사람의 힘만으로 돌리는 나무물레와 소나무 땔감으로만 불을 때는 장작가마 소성 방식을 고집하며 만들어온 그의 작품은 ‘귀빈’을 맞는 국가 행사를 빛냈고,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품으로써 국빈들의 선물이 되어왔다. 2005년 아시아태평양정상회의,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환영식장과 한일정상회담 자리에 놓인 그의 ‘백자 달항아리’는, 두 개의 큰 사발을 붙여 하나로 만드는 항아리처럼 서로의 이해와 요구를 뛰어넘어 한 뜻을 나누자는 의미를 담은 평화와 화합의 상징적인 메시지가 되었다.

백자 달항아리 '천홍'. 'chunhong' White Porcelaine Jar. 48 x 48cm.
투명한 유약의 무한한 색조들을 엿볼수 있는 신경균의 백자 달항아리는 장작가마 소성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불'의 힘이 작용한다.

백자 달항아리. Dal Hang-a-li (White Porcelain Jar). 49.5 x 47.7cm.
한 번에 물레에 돌리지 못해 둥글게 빚은 사발 두 개를 이어 붙였던 전통적인 제작 방식이 드러나는 달항아리는 '사발'이라는 기본을 제대로 알아야 가능하다.
“달항아리라고 부르는, 좀 편한 형태이지만 완전히 하얀 이 항아리들은 굽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긴 얼룩들과
제멋대로 생긴 탈색현상으로 해서, 마치 서예로 멋대로 백지 위에 쓴 시와 같이, 실제 풍경이나 하늘의 구름을 연상시키고 있어 사람들이 그 속으로 빠져들거나 때로는 탈출하고 싶도록 한다. 그렇지만 도예는 유학자들의 예술은 아니다.
기술이 필요하고 몸을 써야 하는 예술이다. 도예가들은 이 재료, 그리고 세상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과 싸워야 한다.
한 치의 실수나 회피, 속임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완벽한 숙련과 재료들에 관한 과학적 지식,
또한 그가 그러한 재료들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이끌어가는 줄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버리고 자신보다 더 거대한 힘을 따를 줄 아는 겸손도 필요하다.
신경균은 바로 이런 예술을 형태에 대한 감각, 재료들의 미묘한 차이에 대한 감각으로 접근한다.
그는 순백을 즐겨 다루며, 때때로 흑백의 매우 추상적인 유약효과를 노린 것 이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다.”
_ 피에르 깜봉 (기메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지난 겨울, 작가는 히말라야 트래킹을 준비하며 어김없이 다기 한 벌을 갖추었다. 인연을 만나면 주게 될 선물이다. “대자연의 품에서 한없이 투명해지는 철저히 혼자만의 시간”을 찾아 떠나온 수행과 같은 길에서 우연히 나눈 차 한 잔의 인연으로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본부 전시회-신경균 그릇전(The Art of Korea Ceramic Master Shin Gyung Kyun at UNESCO)>을 갖게 되었다는 전설 같은 일화처럼, 2010년부터 빚기 시작한 달항아리에도 어떠한 ‘운명’의 힘이 작용했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 친구분 중 일본 분이 책 한 권을 줬어요. <일본에서 만난 한국 가마터 답사기>. 그게 지금의 달항아리까지 이르게 된 시작이에요.” 책에서 다룬 가마터들을 답사하며 <세종지리지실록> 324곳 가마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관심 가진 곳부터 시작해 300여 곳을 답사하는 동안, 홍수로 도로가 잠겼다는 소식이 들리면 곧바로 가마터로 달려갔다. 물에 쓸려 드러난 도자 파편을 합법적으로 주워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릇의 형태, 유약 두께, 굽 눈붙이를 살피고 연구하는 시간을 통해 작가의 경험은 두터워진다.
누가 가르쳐줄 수 없는 공부를 스스로 찾아 하던 그에게는 또 하나의 큰 숙제가 있었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아버지와는 다른 ‘신경균의 도자’를 만드는 일이다. 궁리 끝에 찾은 물꼬는 식기. 1992년에 처음 만든 식기는 “다완 만드는 귀한 신 선생 손으로 빚은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일본 손님들이 줄을 섰다. 가마에서 그릇을 꺼내는 날이면 새벽부터 진을 치는 사람들을 피해 부산 기장을 떠나 문경 동로면에 새 터를 마련하고 가마를 지었다고. “거기서 넉 달에 한 번씩 그릇을 구워 내려왔죠. 근데 또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미어지게 찾아오더라고.” 또 다른 곳으로 터를 옮기고 떠났다던 그는 “익숙해지면 딱 싫증이 나요. 돌아서면 그만이야” 일갈하더니, “물레를 차려면 많이 먹어선 안돼요” 하고 점심 상에서 가볍게 일어선다. 채 반도 비워지지 않는 밥 공기가 자리에 남아있었다. “작업은 마음이 비워질수록 단순해지고 좋아진다”는 말이 맴돌았다. 작년 12월, 영국 맨체스터 샐퍼드 대학 미디어시티 팀 최인숙 교수와 로빈 바거 교수가 장안요를 방문해 한국 전통 도예와 4차원 영상을 접목하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도했다. 보름 가까이 작가와 숙식하며 진행된 프로젝트는 온 몸에 센서를 붙이고 반죽, 성형, 건조, 초벌, 유약, 재벌 등의 도자기 제작 전 과정을 과학적으로 측정하고 영상으로 기록한데 기반한다. 오는 5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공개 예정인 프로젝트 과정에서 미디어시티 팀 엔지니어들을 빈번히 놀라게 한 고수의 기술 하나가 있다. 발로 나무물레를 돌리며 손으로는 흙을 올려 기물을 빚는 동작에서 측정한 힘의 역학이다. 전통 제작 기법을 고수해온 작가가 사용해온 발 물레와 전기 물레 작업을 비교 측정했는데, 보통 사람들과 달리 작가의 상하체 운동량 지수는 거짓말처럼 똑같았다고. 한 마디로 “몸은 평생에 걸쳐 이래 작업에 의해서 만들어져 왔다.”


거칠 것 없이 자유롭게 자기 작업을 일궈온 신경균 작가는 과감한 붓질로 분청 접시에 백토 물을 뿌리고 흘리고 칠하며 한 편의 추상화같은 '한 세계'를 펼쳐놓는다.
“과정을 생략하지 않고 스스로 작업하는 사람은 불 때는 나무도 팰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 고입니다.
관념이나 ‘카더라’ 라는 말은 안 믿어요. 좋고 나쁨을 구별하려면 내가 먼저 알아야 해요. 경험의 과학이거든. 경험해서 온 몸으로 체득해서 아는 것만 이야기하지. 맛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말하지 못해요. 그런 과정을 소중하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좋은 맛을 찾아가는 사람이 된지도 몰라요. 그릇도, 음식도, 찾아가는 여행자라는 입장이에요.
도자기는 쓰임과 철학을 동시에 담을 수 있는 매체에요.
쓰임이 없는 도자기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장자에도 나오듯, 표주박 안이 비어있지 않으면 어디에 쓰겠어요.
현대에서 달항아리는 쓰임보다는 관상하는 미술품 쪽에 더 가까워졌는데요, 최근 청와대 본관 2층 접견실에 설유화, 산당화 등이 담긴 작가님의 달항아리 사진이 <연합뉴스>에 실렸어요.
관상용이 되면 안 되요. 고가품이지만 쓰면 돼요. 일본에서는 국보로 지정된 ‘기자에몬’ 이도다완도 일년에 몇 번은 공식적으로 사용해요. 얼마 전 서촌 집에서 저녁 식사에 몇 사람을 초대해 맑고 푸른빛의 영청(影青) 백자들 몇 가지로 상을 차렸어요. 福, 瑞, 壽 등의 글자가 쓰인 2백 년 된 그릇인데, 복 받고 좋은 일 많고 오래 사시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요. 영국 미디어시티 팀과 회식 때도요. 쓰임의 아름다움이죠. 사람들은 고려 청자의 맥이 후손에게 전해지지 않아 끊겼다고들 말하지만, 아니에요.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백색을 숭상했고, 청색은 불교의 색이라고 봤어요. 그러니 비싼 청자를 부러 만들 이유가 없었고, 필요가 없어져 사라지게 되었지요.
우리 도자의 역사적 단절이라는 부분이 단순히 기술적으로 전승되지 않는 문제는 아니네요.
쓰임이 중요해요. 조선왕조가 망하면서 일본 것을 배우게 된 구한말에, 왕이 없는 망국의 음식을 먹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어요. 외국인 대상의 고급 요릿집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은 상궁과 대령숙수들을 통해 그나마 궁중음식 일부가 살아남았죠. 영화와는 다르게 기록을 보면 덕혜옹주는 일본 옷을 입고 일본 음식을 먹고 일본식 교육을 받고 일본 말을 하고 살았어요. 개념이 중요해요. 나는 될 수 있으면 옛날 개념대로 해보자는 주의에요. 그래서 대학교 1학년 때 다도 동아리를 만들고 우리 전통음식, 전통주, 전통문화를 배우러 다녔어요.
주변을 공부시키는 사람이라고도 불립니다.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분들과 교우하며 한국의 문화와 미학에 대한 생각을 나눠오셨고, 한국 고가구와 도자기는 물론 한국 근현대미술 작가들의 회화와 아시아 지역의 미술품에 이르기까지 수집의 ‘안목’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분청과 이도 다완 종류만 한정해서 수집했는데, 이게 진정한 내 스승이에요! 늘 작업하며 무심(無心)하려고 노력하지만, 조상들이 만든 것은 어쩜 이렇게 바보처럼 아무 생각 없이 잘 만들었는지! 도자 작업은 철저하게 비워가는 과정이어야 해요. 생각이 복잡하면 그릇이 나빠져요.

물결치듯 출렁이는 '선'은 산 능선과 같이 그려진다. 인위적으로 연출해서는 맛도 멋도 나지 않는다. 신경균 작가가 고집해온 나무물레 작업을 통해 빚어지는 자연스러움이다.
식기는 어떤 쓰임을 생각하며 형태를 만드시나요?
한 가지 예로, 한일 정상 회담 때 쓰인 백자 사발은 ‘관계’를 생각하고 만들었어요. 아베 총리는 도자기를 잘 아는 사람이에요. 고민 하다가, 한 손으로 들기에는 불편해서 꼭 두 손으로 잡을 수 밖에 없는 구조의 사발형 찻잔을 생각했어요. 재미있게도 프랑스 와인 전문가들이 이 잔을 아주 좋아하더군요.
서촌 집에서 보았던 뒤주 위에 달항아리와 윤형근 작가 그림이 이루는 한 풍경이 좋았습니다. 이곳 장안요에는 뒤주와 달항아리의 풍경이 더 다채롭네요.
조선 사대부가 안주인의 중요한 일 하나가 접빈이에요. 남녀유별한 시대에 사랑채 손님들에게 안주인이 메시지를 전달하던 방법이 뒤주 위에 달항아리였어요. 곡식과 안주가 가득하니 마음껏 유하다 가시라는 의미지요. 달항아리에는 마포나루에서 많이 잡혔던 민물 참게로 게장을 담가 놓았어요. 찌그러진 달항아리는 돈 없는 사람들이, 둥글고 좋은 것은 왕실과 왕족이 사용했어요. 리움 소장 달항아리는 간장 물 얼룩이 들어있어요. 헌데 달항아리는 무조건 새하얀 색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없애요. 약품에 삶으면 희게는 되지만 피부가 망가져요. 사진 촬영을 하면 울퉁불퉁한 표면 때문에 일어난 난반사로 더 창백하게 보이고요. 그걸 좋다고 하는데, 피부가 거칠어 못 써요. 실제로 만져본 이도 별로 없겠지만. 그렇듯 본질을 모르고 자꾸 ‘상상하는 달항아리’만 얘기해요. 궁중에서 사용한 영청(影青) 백자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에요.

양구백토 달항아리. Yanggu Dal Hang-a-li (White Porcelain Jar). 41.5 x 40.5cm.
양질의 양구 백토와 인연이 닿으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달항아리를 만들기 시작했고, 내덕에서 시작해 고흥 운대리에서 완성형을 이루었어요.
경주 작업장에서부터 달항아리를 생각했어요. 큰 항아리를 구워보려고 내덕 가마벽 일부를 헐고 키워서 시도해봤죠. 기물에 따라 적합한 가마 구조와 크기가 모두 다른데, 진사다완의 절대치가 나온 문경 가마는 반 지하 구조였어요. 반은 하얗고 반은 파랗고 안에는 녹색 밖은 빨간, 일부러라도 만들 수 없는 색이 나왔거든요. 본격적인 달항아리 작업은 사람이 일어서서 들어갈 크기로 가마를 지은 고흥 운대리에서 부터예요. <세종지리지실록> 기록에 맞는 흙을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죠, 2010년이 되어서야 휴전선 북쪽에 있는 강원도 양구에서 전통에 부합하는 흙을 운명처럼 찾았어요. 고흥 작업장에 흙 보관 창고를 짓고 내 이후 3~4대까지는 쓸 만큼 준비해뒀어요. 지금은 질 좋은 양구 백토도 거의 고갈됐고, 하동 백토도 등급에 따라 가격 차이가 커요. 좋은 백토는 암포젤이라고 하는 제산제에도 들어가요. 그러한 백토로 도자기를 빚어요. 인스턴트 음식 안 먹는 것처럼, 공장에서 파는 흙 안 써요.
태토, 유약, 안료까지 모두 천연을 고집해 오셨어요. 유약으로 쓰는 잿물은 나무를 때서 채취한 재를 체에 여러 번 걸러 고운 것만을 모아 만들고, 흙 역시 직접 태토를 물에 개어 가라앉힌 앙금을 거르는 방식으로 수비하고요. 안료로 사용하는 철도 비 맞고 흘러내려온 것을 자석으로 채취해 사용합니다.
문명에 사육되면 영혼이 없어져요. 난 작업에서는 어떤 일도 겁나지 않아요. 실패도 두렵지 않고, 힘들다는 개념도 없어요. 항아리 유약 바를 때는 순간적으로 무게 90~100킬로그램을 손가락 끝 하나로 들고 돌려야 하는데, 옛날과 똑같게도 하지만 그 방법을 확실히 알기 때문에 새로운 내 방식대로 해나가기도 한다고요.
<세종지리지실록>에 기록된 전국 가마터 324곳 중 300여 곳을 답사하며 여러 곳에 가마를 짓고 도자기를 구웠던 경험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1991년에 부산 기장 장안리에 왔어요. 이도다완을 제작했던 가마터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는 중이었는데, 작업장에 있으면 눈에 일이 보여서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되니 강제적으로 거리를 둬야 했어요. 아무 연고 없는 터에 열 다섯 평 원룸으로 된 집 한 채를 지어 살면서 뜻하지 않은 독립을 이뤘죠. 아버지 친구분이 선물해준 <일본에서 만난 한국 가마터 답사기> 책이 계기에요. 고려청자 굽던 강진 대구면 사당리, 전북 부안군 유천리와 같은 가마에서부터 답사를 시작했어요. 원래 내 전공이 분청사기인데, 옛 것을 모르면 할 수가 없더군요. 실물을 깨 볼 수는 없으니, 가마터에서 파편을 찾아 공부했죠. 그 동네 할아버지들 찾아가 이야기도 들으면서 레이어를 쌓아갔어요. 아예 가마 짓고 그릇 구우며 몇 년씩 살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일본 사람들이 우리 그릇을 가져다 다도에 사용하며 발전시켰듯, 우리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정식으로 일본 다도 공부도 하고, 우리 옛날 그릇에 대해 쓴 일본 도서들을 찾고 관계자를 만나 실제 상황도 들었어요. 근현대의 우리나라 그릇들은 기능성 면에서 일본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했어요. 아주 단순하고 투박한 그릇처럼 보이는 사발형 찻잔은 ‘전’ 두께에 따라 기능성에서 차이가 나는데, 옛 것을 직접 사용해봐야 제대로 알죠.
달항아리를 직접 만들기 이전에 컬렉션을 통해 연구하는 시간이 있었다고요.
동경에서 다섯 점을 가져왔어요. 보고 만지고 두드려보면서 달항아리 빛깔에 대한 답을 스스로 냈어요. 달항아리는 만들어진 미가 아니라 ‘찾아진 아름다움’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야나기 무네요시는 고려청자를 좋아했으니 너무 값비싸 가질 수 없었다고 고백해요. 이도다완 역시 그랬는데, 그 대안으로 가장 비슷한 것을 찾다가 선택한 것이 달항아리에요. 주로 민물게장을 담갔던 달항아리는 값이 헐했어요. 왕실에서 사용한 달항아리는 비뚤어지고 휘어지지 않은 최고의 것이었어요. 만들면서 의도해 틀어난 것과 저절로 불에서 휘어난 맛과는 달라요. 달항아리를 이해하려면 사발부터 알아야 해요. 현대 도자 작가들에게 이도다완 실물을 어디에서 보았느냐 한 마디만 물어봐도 알아요. 동경국립박물관 등에서 몇 가지는 볼 수 있지만 개인 미술관에서는 거저 보여주지 않거든. 한번 보는 데만 5백만원 정도를 받아요. 일본의 보물이 된 이도다완 하나는 4중 박스에 담겨있어요. 일본 당대의 문장가들부터 유명한 이들이 쓴 글이 남아있는 박스도 보물이에요. 내가 가진 실물을 보여주면 하나같이 놀라요. 진짜를 실제로 본 이들조차 드문데, 그걸 제대로 사용해봤거나 만들어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개념을 이해 못하면 다 헷갈리는 거에요.
“신경균은 매일같이 살아있는 전통 안에서 작업을 창작한다. 그는 그렇게 차분한 그만의 방법을 확장해 나간다.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처럼 말이다.)
이러한 전통은 한국의 도자기 역사에서 유래하지만, 중국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신경균은 중국 곳곳을 여행하면서 지속성과 혁신,
발전을 끊임없이 찾아 전통을 더 깊게 파고들고자 했다. 이에 그가 정평이 난 장인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신경균은 진정한 수집가이기도 하다.
그의 수집벽은 단순한 듯 치밀한 예술의 복잡 미묘함과 문화에 대한 관심의 깊이를 계속해서 증명한다.”
_ 아담 셔덜랜드 ‘신경균-일상을 만들다’ 中 (영국 그레이즈데일 아트, 디렉터)
백자 음양문 항아리. White Porcelain Yin-Yang Jar. 52 x 66.5cm.
열 다섯에 도자를 시작해서부터 43년간 다완과 사발을 빚어온 작가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달항아리로 연결되어 있네요. 달항아리 빛깔에 대해 “스스로 찾았다” 하신 답이 궁금해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에요. 장작가마는 자유분방한 불이 빚어내는 색이 있어요. 같은 백자를 넣어도 불길이 직접적으로 닿는 가마 앞판에서는 변화가 많아요. 요즘은 내화판이 있어서 불 때는 횟수가 많이 줄었지만, 옛날엔 한 달에도 불을 열 번씩 땠다고요. 한 마디로 전쟁이었지. 그러니 이제까지 내가 경험한 불의 종류가 어느 정도겠어요. 궁금하면 못 참아요. 해결될 때까지 해보죠. 삶이 그런 거에요. 도자보다도 음식 얘기를 많이 하는 이유는, 말로 안 되는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빗대는 거에요. 3년 숙성시킨 우리 집 곶감 맛도, 앉아보지 않으면 모르는 황토방 구들의 뜨거움도 직접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요. 뒤주 위에 달항아리 아래 좀 만져보세요. 살짝 내려 앉은 부분이 아기 엉덩이처럼 보드랍죠. 달항아리마다 색도 피부도 다 달라요. 똑같으려면 기계로 찍어내야지. 부산 집에 캐나다 총리 부인부터 외국 귀빈들이 많이 다녀갔는데, 직접 경험해보고 더 좋아하더라고.
불이 춤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장작가마 소성을 고수하시는데요, 특히 백자는 1350도까지 가마 안 소나무 장작과 불로만 온도를 올려서 굽는 힘든 작업입니다.
성냥 하나의 아주 작은 불로 시작하지만 금새 와- 와- 불이 붙어요. 잘 마른 소나무 장작을 만난 불은 물 만난 고기죠. 불 소리가 대단해요. 가마가 호흡하는 들숨 날숨이 훤히 보여요. 들락날락 하면서 후-후- 소리를 내면서 아주 뜨겁게 숨을 쉬니까. 평생 이 불을 맨 눈으로 보느라 많이 상했어요.
“작업 자체가 곧 비움이고, 화려한 것보다 단순해지기가 더 힘들어요. 사는 일에서도 단순한 쪽이 돈이 더 많이 들어요.”
김장 200포기 재료를 직접 농사 지어 쓸 때와 사는 값을 비교하면 후자가 백 번 싸요. 농사 비용을 따지면 김치가 아니라 ‘금치’에요. 요즘 도자 하는 사람들은 공장에서 흙은 사다 쓰고 이름값을 비싸게 붙이거든. 우리나라 도자기가 유럽에서 곧잘 팔리는데, 일본 전문가들에게 안 팔리면 의미 없어요.
우리 문화의 유래를 공부하기 위한 답사도 다니셨고, 혼자 시간을 갖는 트래킹도 꾸준히 떠나왔어요. 파키스탄의 간다라 아트, 파키스탄에서 가져온 금강역사, 당삼채 말 등 아시아 지역을 여행하며 수집한 미술품도 많습니다.
중국과 국교 정상화되자 마자 혼자 실크로드 여행을 했어요. 중국 가마터 가운데 우리나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곳을 찾아갔죠. 가마는 가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그 땅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을 만나고, 물건도 구해 왔어요. 서양미술도 공부한다고 그리스, 로마, 이집트, 아부신바까지 갔으니까 미쳤죠. 아스완에서 새벽 2시에 출발해 사하라를 횡단한 경험은 아직도 생생해요. 집에 있는 이 많은 도록들은 직접 가서 가져온 거에요.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거든. 우리는 너와 내가 똑같다고 생각하는 의식이 너무 강해요. 다름을 인정해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전업작가라는 삶은 정말 쉽지 않아요. 난 아무리 잘 팔려도 똑 같은 거 안 만들어요. 지금도 주문 받는 일 안 하고. 내가 만들어놔서 좋으면 사가고 아니면 말고야.



장안요 1, 2층 전시장은 전통 목가구들과 도자 작품이 어우러지는 합이 웅숭 깊은 미감을 자아냅니다. 어떠한 관점으로 소목 컬렉션을 해오셨는지요?
먹감나무 책장을 보면 ‘즉흥적’이라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게 되요. 깊이가 있어야만 즉흥도 가능해요. 수집한 목가구들은 30년전 발간된 책인 <이조노 공예>에 소개된 것들이에요. 서울 서촌 공간에 있는 돈궤는 이백이라는 사람의 컬렉션이었어요. 한국 고미술과 민화를 사랑했던 이로, 평생 총각으로 살며 찻집을 운영하다가 아흔에 은퇴하며 일생의 수집품들을 일괄로 내놨어요. 철밥통의 원조인 목가구 도시락, 잔치에 쓰던 담음상, 참깨와 같이 귀한 곡식을 보관하던 뒤주는 크기가 작을수록 비싸요. 쌀 뒤주에는 자손번창을 기원하는 잉어 자물통이 있었어요. 이게 기가 막히게 달항아리 콘셉트와 맞아요.
월하정인(月下情人), 청우(靑雨), 만추(晩秋), 운무(雲霧), 이문, 윤슬 등 달항아리에 붙인 이름에도 특색 있어요. 문제인 대통령이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에게 선물한 달항아리 이름은 ‘소화(素花)’이고요. <아트마이닝 밀라노 2019>와 <아트마이닝 파리 2019> 전시 출품작인 백자 달항아리와 백자 철화 달항아리 두 점은 이름을 새로 붙여주셨어요. ‘애니’와 ‘이녹’으로요.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고 형제라도 이름이 다르잖아요. 백자 달항아리 ‘애니’와 백자 철화 달항아리 ‘이녹’은, 한국 설화로 치면 견우와 직녀 같은 이야기에요. 영국 시인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이야기체 시(詩) ‘이녹 아든(Enoch Arden)’에서 빌려온 이름이에요. 외국 사람들에게 내 항아리를 소개하는 자리이니 좀 더 정서적으로 가깝게 느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새 이름을 주었어요.

백자철화 달항아리 '이녹'. 'Enoch', White Porcelain Moon Jar in Underglaze Iron, 44 x 46cm.

백자 달항아리 '애니'. 'ANNIE', White Porcelain Moon Jar. 44 x 45.5cm.
“신경균의 도예품은 이른바 중국적 형, 일본적 색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한국 특유의 선(線)의 예술이 흐른다.
선은 형과 색과 비교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통합한 뒤에야 얻어지는 결과물인 것이다.
무엇보다 달항아리의 허리를 잘라 두 동강을 낸 것 같은 그의 백자 사발을 한번 봐주기를 바란다.
조선조 백자의 특성을 그대로 살린 약간 이운 그 윤곽선과 몸체의 실루엣은 선의 예술이 보여주는 극한이라고 할 수 있다.”
_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문학평론가)

신경균 | GYUNG-KUYN SHIN
1964년 경남 진주 출생. 도예가 故신정희 선생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열 다섯 살부터 전통적 도자제작 기법을 계승 받았다. 부산시립공예고등학교 도자기학과와 부산산업대학교 예술대학 공예학과에서 도자기를 전공한 작가는, 한 지역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 남부의 산을 찾아 다니면서 새롭게 가마를 만들고 그 땅의 흙과 나무를 이용해 도자기를 제작하면서 작품의 폭을 확장해 가고 있다. 장작가마와 나무물레를 고집하며 만들어진 작품들은 전통의 현대화와 생활 속의 아름다움을 담는 그릇에 대한 작가의 연구와 고민이 담겨 있다. 빚는 사람의 정신만이 머물 수 있는 전통가마 안에서 흙과 장작불의 혼이 만나는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인 작품들은 자연미라는 한국적 아름다움의 완벽한 표출을 보여준다. 또한 살가우면서 기품 있고, 실용적이면서 멋스러운 작품들은 전통의 깊은 맛을 간직하면서 현대적인 생활에 적합한 쓰임새를 보여준다. 1994 일본 히로시마 미츠코시 <신경균의 이도다완> 개인전, 200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 정상회의 대표작가, 2006 서울 갤러리현대 두가헌 개인전, 2009 일본 후쿠오카 에르가라홀 갤러리 <장안요 신경균 초대전>, 2014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본부 전시회-신경균 그릇전>, 2018 조선일보미술관 개인전 <서울에 뜬 달> 등을 가진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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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미지 © 신경균 – ARTMINING, SEOUL, 2019
PHOTO © ARTMINING – magazine ARTMINE / 최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