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인생길 반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네아, 이 거친 숲이 얼마나 가혹하며 완강했는지
얼마나 말하기 힘든 일인가!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새로 솟는다.
_단테 <신곡-지옥편> 1곡 중에서
고행의 길을 떠난 순례자의 얼굴에 피눈물 같은 금빛 유약이 흐른다. 소녀의 머리 위로 층층이 쌓인 해골더미는 모두에게 녹록치 않은 생(生)의 무게 같다(<순례자Pilgrim>, 2016). 사원이 연상되는 기와지붕과 그 틈에 몸을 뉘인 소녀, 해태상, 스핑크스, 간디 형상의 도자를 적재한 조형 오브제는 동서양 종교를 압축한 듯하다(<백야>, 2017). 도예가 이윤희의 ‘대서사’는 전시장 전면을 가득 뒤덮은 벽화작업에서 절정을 이룬다. 십여 개의 벽면 도자로 구성한 고대 신전에는 각 면마다 소설의 중심 이야기를 응축했는데, 상징적인 오브제들이 가득해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다. 모든 도자 부조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녀’는, 사슴을 타고 어딘가로 향하다 백일홍 더미 위에 잠시 지친 몸을 뉘이기도 하고, 어린 아이를 품에 안거나 트로이카의 목마 사이를 지난다. 중간중간 마주하는 뼈와 해골 더미는 소녀의 여정 전체에 시련과 긴장감을 주는 요소다(신곡La Divina Commedia, 2014~2019).
흔히 백자(白瓷)를 떠올릴 때 연상되는 순백의 단아함과 달리, 이윤희 작가의 도자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웅장한 서사를 품은 중세시대 프랑스 도자가 연상되는 황금빛 유약과 섬세한 채색은 그간 보아온 백자 언어와는 결이 다르다. 여기에 작품이 웅장하고 깊이를 더할 수 있는 데에는 문학적 요소를 기반으로 한다. 지난 100년간 이탈리아 최고의 고전으로 꼽는 단테의 <신곡>.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지옥, 사랑했던 연인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아 천국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담은 연옥, 그리고 고난 끝에 도달한 천국. 이 세가지 세상으로 구성한 100곡의 대서사시는 이윤희 작가의 도자 작업의 중심 축이다. 신당 창작아케이드와 인천을 거쳐 지금의 대전 작업실에 터를 마련한 작가를 여름의 끝자락에 만났다.


동종 분야의 도예가들이 이윤희 작가의 작업을 보며 “굉장히 정교하고 숭고한 노동이 드는 작품”이라며 감탄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몇 번 들은 적이 있어요. 그만큼 굉장히 힘든 작업이라는 뜻일텐데 실재로 어떤가요?
(웃음) 제 작업은 스스로 즐기지 않으면 하기 힘든 것 같아요. 하루 종일 앉아 정교한 부분까지 채색하는 데 많은 체력을 요해요. 눈도 쉽게 피로해지고요. 워낙 손으로 꼼지락거리며 만드는 것을 즐기다 보니 아직까지는 재미있어요.
지금의 대전 작업실은 어떤 계기로 마련하게 됐나요.
졸업하고 신당창작아케이드에서 첫 작업실을 마련했어요. 이후 이천, 김해로 순차적으로 작업실을 옮겼고요. 제가 사용했을 당시만 해도 ‘신당’이 그렇게 활성화되진 않았는데 요새는 환경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지금의 대전 작업실은 2015년 부모님이 곁으로 내려와 마련했어요. 레지던시에서 쭉 생활해오다 제 작업실을 차린 건 대전이 처음이었죠. 도시락 공장으로 사용했던 곳이라 작업실 규모도 꽤 크고, 서대전역 근처라 서울과 접근성도 좋아 만족하고 있어요.
작가로 활동해온 지난 10년 간의 경력 중 2011년은 주요 공모전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중요한 해였어요.
아무래도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있던 때다 보니 열심히 했던 시절 같아요. (웃음) 2011~2012년 여러 공모전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면서 졸업하고도 작업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었어요.


‘단테 시리즈’라 불리는 <La Divina Commedia>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들려주세요.
2013년 부조 시리즈를 시작하면서부터였어요. 예전부터 워낙 서사가 강한 이야기를 좋아했었고 그렇다 보니 인형 같은 피겨를 만드는 데 취미가 남달랐어요. 연극세트를 만들어서 상황극도 하면서 연극 배경이나 주변 건물,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오브제들을 섞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 같아요. 도예가를 꿈꾸기 전에는 일러스트작가를 동경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야기를 만드는 행위가 몸에 배어있었죠. 부조 시리즈를 하면서 작품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면 좋겠다 생각하던 차에 이야기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 벽에 붙은 부조를 보며 본격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어요. 입체적인 책을 응축하듯 하나의 조형을 완성하면 방대한 서사를 담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부조작업은 좀 더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는 요소가 많았어요. 판을 7장 펼쳐놓아야 한다고 가정하면, 표현하려는 이야기의 7가지 씬을 구성하는 거에요. 시간 과정대로 만들어가는 것이 재미있더라고요. 장면과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수많은 문학 텍스트 가운데 <신곡>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대부분의 문학이 한 인물의 성장을 담잖아요. 역경과 시련 같은 어떤 ‘과정’을 지나는 것이 모든 스토리의 기본이죠. 제가 좋아하는 소설의 구조가 대부분 이 공식을 따르더라고요. 외국인들에게 익숙하면서 어린시절 우리도 읽었던 작품으로 단테의 <신곡>은 가장 적합한 텍스트였어요. 유년시절부터 <신곡>을 좋아하기도 했고요. 특정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어린 시절부터 제 주변에는 다양한 분야의 종교인들이 많았어요. 목사, 선교사, 스님··· 외할아버지는 절을 짓던 대목장이셨고, 그러면서 할머니는 성당을 다니셨죠. 종교적인 모티프가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것 같아요. 소녀가 삶과 죽음, 이상향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여정 자체가 종교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종교와 도상에서 많은 모티프를 가져오기도 하고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수많은 도자 오브제에 색을 입히고 영혼을 불어넣는 정교한 작업들에 집중한다. 소녀상의 입술과 볼터치에도 온 마음을 담아 작업하는 이윤희 작가는 "이 일을 좋아하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작업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대서사를 응축한 이야기를 만들다 보면 얼개를 짜고 조형물을 맞추는 데도 일종의 규칙이 있을 것 같아요.
전체적인 스토리를 정확하고 자세하게 짓지는 않아요. 여행을 가는 과정에 만나는 사람들과 같은 큰 스토리만 세우고 작업을 하죠. 어떤 분들은 ‘해골’을 죽음과 연관 지어 메타포가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단지 해골과 친숙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어요. 몇 년 전 뉴욕에서 전시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의 경험이 제 생각을 많이 바꾼 것 같아요. 해골과 벌레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고정관념에 대해 고민하게 했던 전시였는데, 이후 제 작업을 좀 더 자유롭게 확장할 수 있도록 영향을 미쳤죠.
소녀와 백일홍을 함께 배치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별다른 의미라기보다는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꽃이에요.(웃음)
소녀는 이윤희 작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소녀의 얼굴은 늘 같나요?
단발머리 소녀가 주인공이에요.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 존재하죠. 다른 인물들은 헤어스타일에 변화를 주지만 제 작품에 주인공은 단 하나에요.
작업 과정에 대해 궁금한 부분이 많아요. 손가락 크기 만한 소녀의 얼굴과 벌레, 해골까지 모티브가 정말 다양한데 캐스팅 작업은 어느 선까지 이루어지나요?
대부분 캐스팅으로 형태를 만든 뒤 제가 기본틀을 바탕으로 변형해요. 꽃은 틀에 넣어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줄기나 이파리를 하나씩 만들어 제가 일일이 붙이죠. 인형도 얼굴은 비슷하지만 작업에 따라 자세가 저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제가 팔이나 다리를 구부려 동작을 잡고 다듬는 거죠.


지난 7월~9월 레스케이프 호텔과 아트마이닝이 협업한 ‘팝아트 & 컬처룸’ 전시에 <Shy Afternoon> 작품을 전시했었어요. 3층 크기의 조형물 맨 하단에 놓인 ‘곰’은 어떤 메타포를 지닌 오브제인지 궁금했죠.
비디오물을 좋아해서 작업을 만들던 당시 키덜트적인 느낌을 담은 기념비를 만들고 싶었어요. 귀여움과 그로테스크의 이질적 느낌을 섞고 싶었는데, ‘테디 베어’라 불리는 곰을 표현하면 딱이겠다는 생각을 했죠. 르네상스나 중세시대 스타일, 그런 느낌들만 작품에서 드러나는 게 너무 무겁게 느껴지더라고요.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 작품이 엄청나게 사실적인 건 아니에요. 가만히 보면 다리와 팔 비율도 맞지 않고요. ‘어설픈’ 중세 느낌, 그러면서도 굉장히 화려한 디테일을 통해 무겁고 가볍운 것들, 심각하고 재미난 것들을 이질적으로 담고자 해요.
이윤희 도자는 채색이 상당히 화려하고 정교한 것이 특징이에요.
사실적으로 보이기 위해 여러 색상을 한 작품에 많이 섞어 사용하지 않아요. 제 작품에 화려한 격자무늬 패턴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채색 과정에도 나름의 공식이 있어요. 유약을 칠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은 가마에서 구운 뒤 발현되는 금색이 다르기 때문에 격자무늬 패턴에도 서로 대비가 되도록 구성을 잘 맞춰 색을 칠해야 하죠. 너무 작은 오브제는 초벌을 생략하고 1240℃에서 산화소성 딱 1번만 해요. 두 번식 가마를 오가다 보면 색도, 형태도 원하는 것과는 조금 거리가 멀어지더라고요.
백자라고 하면 소박하고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작업을 떠올리게 되는데, 반면 이윤희 작가의 백자는 화려하고 더없이 장식적이에요.
그런 작품들을 보는 건 예쁘고 좋은데 제가 작업할 때는 재미가 없어요. 계속 손을 움직이고 장식하는 게 좋아요. 굉장히 화려한 작품이다 보니 호불호가 갈리고요. 주로 외국분들이 많이 알아봐주세요. 취향이 명확한 분들에게서 연락이 와요. 하얀색으로 동양적 산수 느낌을 주고 싶었을 때가 있었어요. 그래서 백자로만 흰색으로 작업을 한 적도 있었죠. 유약을 섞어서 만들기도 하고요. 골드의 신성함, 화려함을 좋아해요. 세명이면 성모상의 느낌이 있고요. 색을 전혀 쓰지 않은 소녀상은 피에타의 느낌도 있어요. 반인반수의 느낌은 그리핀, 신화의 느낌. 스핑크스. 해태상도 만들고요. 하부에는 돌로 제작해서 비슷한 것을 여러겹 쌓기도 하고 다르게도 만들어요. 따로 떼어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날 때까지 작업할 때도 있어요.


수백 종의 틀에서 캐스팅한 오브제는 작가가 일일이 손으로 다듬고 매만져 형태를 완성한다. 꽃잎이나 줄기처럼 너무 작아 틀마저 만들 수 없는 것들은 직접 빚어 제작해야 할 만큼 손이 많이 가지만, 이윤희 작가에게는 과정 전체가 즐거움이다.

순백의 백자를 선호하는 동양권에서 이윤희 작가의 작업은 어떤 반응을 얻고 있는지 궁금해요.
홍콩 센트럴에서 했던 전시 결과가 좋았어요. 유럽의 화려한 도자기 문화에 익숙한 분들이 알아봐 주세요. 저는 옷에 개인의 취향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선호하지만, 제 작품을 선택해주시는 분들은 패션도 화려하고 개성이 넘쳐요. 홍콩 내 아트프로젝트라는 갤러리에서 작품을 소개했었는데 곧 정리 예정이에요.
여러 공예 가운데 도자 작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도자의 느낌이 좋아서요. 유럽 자기라 일컬어지지는 작품들에는 딱 도자기다운 맛이 있는데 저는그런 느낌들을 선호하더라고요. 제가 생각하는 도자기는 ‘포슬린(porcelain)’, 즉 탱탱한 질감을 담는 작품이에요. 목공과 금속으로도 작업을 해봤지만, 에프알피(FRP)로 구현할 수 없는 느낌이 좋아요. 도자기를 시대별로 많이 연구하면서 동서양의 도자 형태를 작업에 차용하기도 하고, 문양집을 자주 보며 옛 도자기를 찾아 다니고 있어요.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좋아하는 작가가 있나요?
영국의 세계적인 도예가 그레이손 페리(Grayson Perry)요. 2007년경 가나자와 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본 적이 있었어요. 당시 제 스스로 전업작가에 대한 생각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 그의 키치한 느낌이 좋았어요.

"제가 지금 서른 중반인데 안타깝게도 함께 도자를 공부했던 친구들 중 저만 작가 활동을 하고 있어요.
저 또한 2007년 경에는 잠시 도자를 놓고 장사를 하기도 했고요. 작업을 접어야 하나 고민할 때마다 운명처럼 좋은 컬렉터를 한번씩 만나며 큰 위안을 얻었어요. 영국을 여행하던 한 네덜란드 부부가 제 작품을 여행길에 현장에서 구매해 갔던 것, 월급을 모아 작품을 샀던 젊은 여성 컬렉터 모두 굉장한 감동이었어요."



작품이 주는 극도의 진지함, 사유보다는 감상이 목적인 작업을 하고 있어요. 쓰임이 있는 도자작업에 대한 계획은 없나요?
쓰임을 생각하는 게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사용하는 건 심플한 것을 좋아하고 관상용은 화려했으면 하죠. 제가 하고 싶은 이상형에 아직 닿지 못했어요.원하는 이상향을 만들면 딱 작업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2019년 하반기에 예정된 전시들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하반기에 신당창작아케이드에서 전시가 있고, KCDF에서도 윈도우 전시 선정작가가 되어 작품을 선보이게 될 것 같아요. 미국 시카고 SOFA에서도 전시가 예정되어 있고요.
끝으로 이윤희 작가의 작품에 대한 감상 조언을 한다면요.
감상하시는 분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어요. 여성분들은 디테일한 요소들을 찾아서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나가시더라고요. 도대체 소녀의 고민은 무엇이고 어딘가로 향하는 여정일까, 어떤 시련이 존재하는 세계의 충돌일까에 대해서도요. 죽음과 삶은 항상 같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해요. 해골과 소녀를 함께 두고자 해요.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귀여운 것과 징그러운 것, 다른 두 의미를 섞어서 한가지 의미로 흐르지 않도록 경계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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