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작업해도 이 길이 맞나? 흔들리는 것이 작가의 생이다. 그 재료와 주제에 관한 의구심도 끊임없이 찾아든다. 그런 면에서 도예가 이기조는 복 받은 사람이다. 조선백자는 내게 운명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이라니. 안성 그의 작업실에는 조선백자 고유의 미감과 철학을 담고 있는 달항아리도 곳곳에 그득했다.
WRITE 정성갑(프리랜스 에디터, 클립 대표) PHOTOGRAPHY 이주연
흙은 이기조 작가의 작업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마음에 드는 흙이 없으면 아예 작업을 시도하지 않는다.
한국의 문화유산을 통틀어서도 백자는 독보적 위상을 자랑한다. “자연계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순도 높은 도자 원료를 사용해 1250도의 고온에서 구운 자기.”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에서 발간한 우리공예디자인리소스북 <백자>편에 나오는 설명이다. 유유한 기품이 흐르는 그 물건을 보거나 쥐고 있으면 요란했던 마음이 정연해진다.
조선백자의 미학은 태토의 우수함이나 고도의 기술력을 넘어서는, 정신이나 철학과 맞닿아 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단정한 얼굴, 섬진강의 물결처럼 수수하고 담백한 멋은 일희일비하지 않는 고요함의 세계다. 달항아리는 그 세계의 극단을 보여준다. 그 자체로 흰색의 우주. 프랑스의 사상가 기 소르망은 이렇게 말했다. “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머릿속에 아무런 잡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계속 바라보게 된다.”
도예가 이기조에 관한 인터뷰 자료를 찾다 보면 이 설명이 가장 먼저 나온다. “조선백자의 미감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구현한 인물”. 이라고. 수많은 백자의 향연에서 그의 작품은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빛나는 걸까? 그가 추구하는 미감과 방향은 어떤 것일까?
안성에 위치한 도예가 이기조의 작업실 풍경. 보름달 같은 달항아리와 '식탁 위의 백자'를 위해 선보여온 다양한 테이블웨어가 그득하다.
아, 어려운 질문이네요. 작가들도 늘 그 부분에 대해 퀘스천을 갖고 작업을 하니까요. 저 역시 최순우 관장님이나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백자에 대해 평한 걸 살펴봤지만 백자를 직접 만드는 입장에서 그런 말은 외형이나 느낌에 그친, 개념적이고 사변적인 의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유약의 색깔이나 분위기를 말하는 건 1차원적인 거예요. 태토라는 특정 물질 자체가 주는 어떤 총체적인 질감과 느낌이 중요하지요. 저는 이걸 ‘머터리얼 인텔리전트’라고 합니다. 비례가 좋네, 볼륨이 충만해 넉넉한 맏며느리감 같네 하는 느낌의 근원은 결국 물질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자의 원료인 태토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말씀이신 거죠?
맞습니다. 요리하고 똑같아요. 패션도 결국 소재의 문제잖아요. 건축, 인테리어나 가구 디자인도 그렇고요. 백자 역시 핵심은 태토입니다. 조선시대 도공들은 흙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습니다. 성형 후 건조 과정, 유약을 바르고 뜨거운 가마에서 구워져 나왔을 때 그 흙이 어떤 질감과 느낌을 줄 지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어요. 중요한 건 가능한 자연스러운 미감을 추구했다는 겁니다. 객기나 억지를 부린 것 같은 화려한 느낌은 지양했어요. 있는 그대로의 맛을 추구했지요. 그렇게 그들은 흙의 특징과 본질, 가마 속 불의 세계에 자신을 맡깁니다.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조선시대의 도공들은 철학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데 도공 입장에서 그런 경지에 이르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야나기 무네요시가 궁금해한 것도 같은 맥락이네요. 답습된 미감을 훌쩍 넘어버리는 근원과 힘이무엇일까? 늘 궁금해했지요. 그러다 조선 팔도를 여행하면서 마침내 그 비밀을 알게 됩니다. 각 지방에서 공예품 만드는 장인들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는데 하루는 목기 만드는 이의 집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젖은 나무를 깎아서 물건을 만들고 있어요. ‘젖은 목재로 만들면 마르는 과정에서 뒤틀리고 갈라질 텐데’ 하는 생각을 했죠. 그 생각을 목수에게 말하니 그가 그래요. “그럼 뭐 어떻습니까. 휘어지면 휘어지는 대로 갈라지면 갈라지는 대로 하면 되지요.” 인위적으로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에 맞춰서 작품을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 조상의 DNA에요.
달항아리에는 그런 미감이 반영된 극한의 예술인거고요.
그렇습니다. 달항아리가 조선 최고의 보물인 건 전 세계 대가들이 다 인정하는 거예요. 우리가 잘 모르는 미감이 있는 거죠. 고수는 고수끼리 통하는 거고요. 그런 사람들은 보면 딱 아는 겁니다.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도 자신의 건축의 원천을 이야기하며 달항아리를 언급하잖아요. 그럼 왜 최고일까. 일본, 중국에서 달항아리 같은 모양이 나왔다면 다 깨 부셨을 거예요. 잘 못 나온 거라고. 그런데 한국은 안 그렇죠. 살짝 기우뚱한 것이 자연스럽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한국인만이 갖고 있는 미의 기준이나 정서가 있는 거예요. 풍류라고 해도 좋고, 흥이라고 해도 좋아요. 한옥을 지을 때도 적당히 휘어진 걸 그대로 쓰잖아요. 쪽이 나간 것도 그대로 사용하고요.
이기조의 달항아리. 그에게 중요한 건 형태의 미를 넘어선 흙의 총체적 질감이다.
오랫동안 달항아리를 연구하고 만들어 오신 입장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도 있습니까?
달항아리는 17~18세기에 주로 만들어졌어요. 광주에 관요가 있었지요 저는 달항아리를 만드는 도공들이 어느 지점에서 대칭의 압박을 툭 하고 놔 버렸을 지가 궁금해요. 임금님이 쓸 작품인 걸 뻔히 알고 있었을텐데 처음부터 감히 찌그러진 형태를 용납했을 지, 아니면 가마에서 항아리가 구워지면서 자연스럽게 모양이 그렇게 됐을 지 의문이에요. 반반이었을 것 같아요. 도공도 스스로 용납하고 임금도 받아들인 거죠. 항아리를 초벌하고 나면 그 위에 용 그림을 그리려고 ‘청와대’에서 화원이 파견을 나와요. 항아리를 들여다보니까 반듯하지 않고 툭 튀어나온 구석도 있단 말이죠. 화원은 그 튀어나온 곳에다 용 대가리를 그려요. 재미있지 않나요? 재벌하고 완성된 그 다음에는 검수관이 나와요. 그런데 그 역시 그 미감을 인정하는 거예요. 좋은 것을 많이 봐 안목이 대단한 사람일텐데도 말이죠. 이렇게 찌그러진 걸 임금님에게 가져가면 안 될 텐데 하는 주저함이 없었던 겁니다. 임금도 그런 자연스러운 맛과 멋을 받아 들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거예요. “어느 면전이라고 이런 물건을 가져왔느냐!”하고 호통을 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거죠.
달항아리를 만드시면서 유독 신경을 쓰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즉흥성과 우연성이에요. 정말 좋은 작업은 그 두가지가 들어갈 때 선물처럼 나와요. 내 머리속에 있는 형태는 누구나 다 아는 거예요. ‘썩은’ 샘플이죠. 조각보를 봅시다. 긴긴 겨울 아낙네가 바느질을 하는데 종이에다 스케치를 해서 그대로 만드는 게 아니에요. 중앙에 들어갈 천 하나를 만든 후 그 옆에 다양한 천 쪼가리를 갖다 놓고 하나씩 매칭해보면서 차근차근 완성해 나갑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러우면서도 적극적인 선택의 과정이 일어나지요. 그리고 그렇게 머릿속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던 작품이 탄생하는 겁니다.
달항아리를 오랫동안 만들어 오셨고 내년 초에 갤러리 로얄에서 개인전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 일찍 전시를 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이제서야 달항아리를 꺼내 놓으시는 배경이 궁금합니다.
달항아리는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아무나 만들 수 없는 것이라고 늘 얘기하죠. 대학교 4학년만 되면 학생들도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달항아리는 아무나 못 만들어요. 기본적으로 백자에 사용되는 흙은 다루기가 엄청 힘든 흙이에요. 청자토는 힘도 좋고 점력도 좋아서 아주 얇게 만들 수가 있어요. 연꽃 물고 있는 오리 연적 같은 걸 한 번 봐요. 얼마나 섬세합니까. 하지만 백자토라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못 만들어요. 자꾸 주저 않고 얇게 하려면 면을 치는 수밖에 없지요. 그런 흙의 성질 때문에 형태가 단순해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무엇보다 그런 무심의 덩어리를 만들려면 마음을 계속해서 비우고 어깨에 힘을 빼야 해요. 기술이 있다고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건축가 이타미 준과 친분이 있었어요. 그 분이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제 앞에서 사진가 구본창에게 이런 제안을 했어요. “내게 달항아리 50여개가 있는데 그걸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 당신이 찍어 줄 수 있겠느냐?” 구본창 사진가는 한창 백자 사진에 꽂혀 있을 때니 당연히 좋다고 했죠. 구본창 선생과 인연이 있어 나도 따라가겠다고 했어요. 조수로 가겠다고. 그렇게 도쿄에 가서 달하아리를 3일 동안 봤어요. 3일 동안 사진을 찍고. 3일을 계속해서 그 항아리를 보고 나니까 중요한 건 형태가 아니더라고요. 딱 하루만 지나니까 형태에는 집착을 하지 않게 되더라고. 잘 생긴 것, 못 생긴 것에 대한 개념도 없고 생긴 데로 또 다 힘이 있고. 그때 생각했지요. ‘달항아리는 그냥 무심의 덩어리구나. 의도를 갖고 정교하게 만들려고 하면 안 되겠구나. 마음을 비워야 겠구나.’
달항아리 말고 여러 개의 판을 이어서 하나의 건축적 형태로 만드는 작업도 유명합니다. 판 작업에서 그런 즉흥성과 우연성을 중시하며 하시지요?
즉흥성과 우연성이 더 중시되는 것이 그 작업이지요. 스케치는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붙일까 하는 고민과 선택을 반복하면서 처음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형태가 나오고 점점 기대가 깃들어요. 어떤 작품이 되려나 설레는 거죠.
대학원때부터 계속하고 있는 판 작업. 조각보를 만들 듯 여러 형태의 판을 이어 붙이며 완성한다. 그렇게 만든 작업물은 그 자체로 입체적이고 아름다운 조각과 같다.
선생님의 판 작업은 도자기의 또 다른 확장이라 할 만합니다. 건축적 오브제로서도 근사한 아우라를 뽐내지요. 판 작업은 언제,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요?
조선백자의 주요 기법 중 하나가 면치기였어요. 형태가 단순해지면서 모던하면서도 간결한 느낌을 주는 사각의 면을 선호했지요. 그런 형태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해석할까? 면치기 말고 다른 기법은 없을까? 오랫동안 고민을 했어요. 그러다가 판을 상하좌우로 이어 붙이면서 크기도 키우고 조형적 느낌이 강한 지금의 방법을 고안하게 됐지요. 대학원에 다닐 때는 종일 작업실에 박혀 물레로 다양한 형태의 유닛을 만들었어요. 그걸 조각보 만들 듯 하나씩 붙이고 잘라가며 탑으로 쌓기도 하고 바닷가 소라처럼 유기적 모양의 작품으로 만들기도 했지요. 그렇게 판성형을 하다보면 건축적이고 구조적인 형태의 결과물이 나오는데 전통적 조선백자와는 또 다른 미감을 줍니다. 몸체의 구성적 묘미와 비례, 리듬감이 탁월하지요. 전체적 조형미도 도드라지고요. 이런 것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즉흥성과 우연성이 주는 선물입니다.
형태를 벗어난, 좀 더 고차원의 예술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인문학을 강조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공부가 도예작업에는 어떻게 투영될 수 있을지요?
그 질문은 인문학은 예술 창작의 과정에 어떻게 개입하느냐? 하는 것과 상통한다고 봐요.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건 결국 선택의 문제예요. 어떻게 선택해 어떻게 조합하느냐가 관건이지요. 이 때 인문학적 지식과 소양이 풍부하면 좀 더 ‘건강한’ 선택이 가능해집니다. 분청을 논하면서 활달하고 자유분방하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런 감성적 설명만으로는 자기만의 견고한 작업 세계를 가질 수 없어요. 나름의 논리와 철학이 뒷받침 되어야지요.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인지, 무엇이 진실인지, 예술의 가치와 잠재력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인문학에 대한 학습이 필수입니다.
도자기에 바느질을 해 놓은 듯 접합선이 매력적인 판 작업들.
1980년대에 대학에서 도자기를 배우셨는데 당시 흔한 전공은 아니었지요. 수업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 도자기 교육은 아방가르드한 데가 있었어요. 추상표현주의의 맥락에서 도자 공부와 학습이 이뤄졌지요. 피터 볼커스(peter volkus)라고 현대 도자의 원조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어요. 액션 페인팅의 대가 잭슨 폴록의 영향을 받아 "왜 도자는 '그릇'에만 머물러야 하는가!" 다양한 실험이 일어나던 때였지요. 추상 미술 작품도 가능하다는 거죠. ‘도자 조각’이란 말도 그때 처음 나왔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도자기를 전공하기까지 청자, 분청 이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러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지방대학 전문대 교수로 가면서 학생들과 그릇을 만들고 가르치는 작업을 했어요. 저도,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그때 처음 알았지요. 도자기가 반드시 ‘조각’과 엮일 필요는 없겠구나. 한국 도자의 힘과 역사는 전 세계가 인정하는 건데 뿌리에서부터 다시 공부를 해봐야겠다. 그렇게 조선백자 공부가 시작된 겁니다.
오랫동안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계십니다. 도예과 학생들에게 힘주어 강조하는 부분은 어떤 것인 것 궁금합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지식과 기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감각이라고 늘 강조합니다. 어느 정도의 감각을 갖고 있느냐는 삶의 질과도 직결되는 문제지요. 감각의 차원만큼, 안목의 수준만큼 살게 되니까요. 때문에 감각과 안목을 키우는데 전력을 다하라고 이야기하는데, 방법이 있습니다. 지상 최고의 예술, 즉 ‘명품’과 친해지는 일이에요. 명품에는 총 3가지 종류가 있어요. 먼저 하나님이 창조한 최고의 예술. 즉, 자연입니다. 둘째, 위대한 대가들이 만든 예술품들. 틈 날 때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면 도움이 될 거예요. 셋째, 동시대 최고의 아티스트와 디자이너가 만든 제품. 백화점에 가면 많지요. 이런 것들을 눈 여겨 보면서 그것이 왜 최고인지, 왜 큰 감동을 주는지 가까이 할 필요가 있어요. 형편이 된다면 사서 써 보기도 해야 합니다. 들어보고, 만져보고, 걸쳐보는 과정에서 감각이 진화하지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만들고, 누릴 수도 있습니다.
집을 둘러보다보니 여기저기 ‘흙산’이던데 저 흙도 다 이야기가 있는 것인가요?
이 집을 지은 때가 1998년이에요. 중앙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건 1995년부터고. 어느 비오는 날 밤에 집으로 들어오는데 저 뒤로 포크레인이 서 있었어요. 포크레인 뒤로 풍경이 하얗게 펼쳐지는데 백토가 있을 것 같다, 하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고요. 밤새 잠을 설치고 날이 밝자마자 뛰어갔더니 아니나다를까 절벽에 제법 굵직한 백토 맥이 있는 거예요. 그날로 채비를 해 흙을 퍼왔지요. 그렇게 남들과는 다른 질감의 백자를 만들 수 있었고요. 최근에는 어느 지인을 통해서 옛날에 쓰다남 은 귀한 양구점토를 수십 톤이나 구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조선백자의 철학과 자연관을 이해하려면 섬세한 감성도 필수일 듯합니다. 선생님 감성의 바탕은 어떤 것일까요?
제주도에서 태어나 20년을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조선 시대의 귀향 선비의 자손이지요. 그런 인문학적인 DNA와 제주도의 자연환경이 오늘날 나의 감성을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9남매 중 8번째로 태어났는데 약골이었어요. 몸이 약해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 여름이고 겨울이고 거의 매주 산에 올라가서 살다시피 했어요. 보이스카웃 활동을 하면서도 자연과 가까이 지냈고요. 그렇게 마 음 곳곳에 스며든 자연의 감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원 다닐 때 은사님이 제 작업을 보시면서 늘 하시던 말씀이 있어요. “기조, 너는 감성이 특별해, 달라” 늘 자연과 함께 지내온 세월이 알게 모르게 마음에 남아있는 것 아닐까 싶어요.
사람들이 일상에서 백자를 사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라인의 작품을 오래 만들어 오셨는데 식탁 위에 백자가 올라가는 것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일까요?
조선백자의 현대적 구현을 작업의 주제이자 목표로 삼으면서 늘 고민했던 것이 있어요. 조선백자의 기품이나 미감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누릴 수 있을까! 제 아무리 조형적으로 멋있는 백자 작품을 만든다고 한들 사람들의 삶과 일상에 백자 문화가 스며 들어 있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일상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테이블웨어를 개발하게 됐고요. 한식은 백자와 유독 궁합이 좋아요. 한식도, 백자도 기본적으로 재료 본연의 맛을 중시하지요. 조선시대에 백자를 만들 때 한식의 여러 음식을 염두에 두고 형태를 만든 것도 둘의 궁합이 좋은 이유일 거예요. 이미 조선시대부터 백자에는 뚜렷한 목적성이 있었던 거죠. 도예가의 아내이니 당연하지만 저희 아내는 모든 음식을 백자에만 담아요. 백자를 사용하다보면 다른 식기는 아예 생각이 나지 않는답니다(웃음).
‘식탁 위의 백자’를 위해 이기조 작가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라인의 테이블웨어를 선보이고 있다.
작가나 교수로는 물론 대중적으로도 가장 많이 알려진 분 중 한 명일 것 같은데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2000년대 초반, 문화체육관광부 주도로 공예 명품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됐어요. 나도 지원을 했는데 최종 결과물 심사에서 1등을 했어요. 8000만 원을 지원받아 명품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테이블웨어였어요. 백자를 일상에서 쓰게 하자고 마음먹고 다양한 라인의 제품을 만들기 시작한 거죠. 생활 속에 백자 문화를 전파하자 하는 것이 제 인생의 모토가 됐고요. 서미앤투스 홍성원 사장을 만난 인연도 행운이었어요. 그 분은 감각과 능력이 특별한 분이에요. 작가에 대한 지원도 확실하고. 또 한 번의 도약의 계기가 ‘아름지기’를 통해 이뤄졌어요. 재단을 설립하면서 의, 식, 주에 관련한 여러 문화 행사와 전시를 기획했는데 식에 관련한 이벤트를 가장 먼저 했지요. 옛날의 식탁, 돌상, 결혼상, 양반가의 식탁 문화를 조명하는 것이 콘셉이었고 거기에 제 작품이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때 전시를 계기로 제 작품이 많이 알려지게 되었죠. 크리스티 옥션도 있네요. 2000년대 초에 크리스티 옥션에서 보상당초문접시가 사상 최고가로 낙찰되는 사건이 있었어요. 이후 크리스티 내부에서 젊은 현대 백자 작가를 발굴해보자는 논의가 있었고 제게 연락이 온 거죠. 그렇게 크리스티에서도 내 작품을 2004년 2014년 두차례 론칭하게 되었습니다.
말씀하신 세월의 마디마디를 떠올려 보건데 조선백자를 키워드로 한 치열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이었었네요. 한 해가 저무는 시점인데 내년에는 어떻게 작업을 하실 생각이신지요?
내가 올해 60인데 지금부터가 시작이지 않나 싶어요. 저를 믿고 계속해서 열심히 작업을 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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