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시초. Mixed media on paper. 258ⅹ203cm. 1984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항상 원점으로 돌아간다. 나는 점을 하나 찍는다. 그 점은 선이 되어 가고 또 그 선은 또한 원이 되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자연은 내가 없어도 원을 만든다." _노은님,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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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시초. Mixed media on paper. 258ⅹ203cm. 1984

200호의 대형 화면을 가득 채운 화살표들이 여러 갈래로 제각기 흩어져 있는 '생명의 시초'가 초입에 걸린 가나아트센터. "태초는 이러했을 것이다"라는 작가의 상상력이 담긴 회화는, 한국 여성작가로는 최초로 국립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의 정교수로 임용되어 20여 년간 독일 미술 교육에 기여한바 있는 국제적인 위상의 작가 노은님의 개인전 <힘과 시(Kraft und Poesie)>를 이끌어가는 주제인 '자연과 생명'을 대표한다. 수묵화의 갈필에 가까운 붓질과 과감한 여백이 지배하는 1980~90년대의 대형 회화, 그의 예술관을 다룬 바바라 쿠젠베르크의 다큐멘터리 영화 '내 짐은 내 날개다', 테라코타 조각과 신작 회화 등으로 구성된 이번 개인전은, 가나아트센터와 가나아트 한남, 두 전시 공간에서 펼쳐진다. 매체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작업해온 작가의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다채롭게 펼쳐놓은 자리에서, 특히 그 흔한 밑그림조차 없이 일필휘지의 붓놀림으로 창조한 회화들이 눈에 띈다. "모든 생각을 잊어버리고 완전히 작업에만 몰두해 있다가, 더 이상 못하겠다 싶을 때, 뭔가 살아있는 것이 불쑥 나타난다"고 했던 노은님의 직관적인 자아가 지배하는 순간에, "여성이 잉태를 하듯, 자율적으로 세상에 나온 존재들"이다.

파독 간호사로서 함부르크 항구 근처의 시립 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 큰 배를 항구에 정박시키기 위해 작은 배가 밧줄로 이를 끌어오는 모습을 보았던 작가는 "큰 배를 움직이는 힘이 어떻게 작은 배에서 나오는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놀라운 힘'의 기원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 나뭇잎배. Mixed media on paper. 206ⅹ505cm. 1987
파독 간호사로서 함부르크 항구 근처의 시립 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 큰 배를 항구에 정박시키기 위해 작은 배가 밧줄로 이를 끌어오는 모습을 보았던 작가는 "큰 배를 움직이는 힘이 어떻게 작은 배에서 나오는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놀라운 힘'의 기원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 나뭇잎배. Mixed media on paper. 206ⅹ505cm. 1987

"다큐멘터리 영화 '내 짐은 내 날개다(1989)'에서 노은님은 동양과 서양 중 어디에 더 소속감을 느끼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동양적이라는 것은 종이에 흰 공간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유럽적이라는 것은 흰 공간을 덜 남겨 두는 것을 의미한다." 노은님은 예술작업에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적용하고 있다. 종이의 커다란 부분을 하얗게 내버려 두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빈틈이 없이 물감으로 채우기도 한다. 그렇지만 '동양적'이기 위해서는 텅 빈 종이 앞에서의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된다. 의식적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절대적인 몰입과 정적의 순간에 이르면 비로소 그녀는 커다란 붓으로 힘차게 큰 획을 그어내려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림은 꽃이나 혹은 동물처럼 그리고자 했던 그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림을 그리는 순간의 그녀의 호흡과 살아있음의 표현이다."  _마가레타 프리젠

나무가 된 사슴. Acrylic on canvas. 130.2 x 97.2cm. 2019
나무가 된 사슴. Acrylic on canvas. 130.2 x 97.2cm. 2019

2020년은 노은님이 고국을 떠나 독일에 자리 잡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인이자 여성 작가로서 독일 국립대학의 순수미술 정교수가 되고, 한국 작가로서는 드물게 프랑스 중학교 문학 교과서에 작품이 수록되고, 세계적인 작가들과 함께 다수의 전시를 한 그는 한국 미술계의 이채로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특히 함부르크 국립 미술대학에서 수학하던 시절 교수로 재임 중이던 백남준, 요셉 보이스 등 당대 플럭서스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1970~80년대에 다수 행한 퍼포먼스 작업들은 '몸으로 쓴 한 편의 시'와 같다. 합판으로 만든 강아지를 끌고 산책을 가고, 퍼포머들에게 비늘, 나뭇잎, 날개 등을 붙여 물고기-인간, 나무-인간, 새-인간으로 변모시키는 등 인간이 만들어낸 예술과 자연이 교차하는 순간을 보여주고 인간과 자연의 결합을 실험한바 있다. 국내에서는 '동심이 깃든, 순박한, 아름다운 색감의 물고기를 그리는 화가'로 알려져 왔지만,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우주를 구성하는 힘에 대하여 의문을 가져온 작가가 펼쳐온 다양한 작업 세계를 만날 기회인 노은님 개인전 <힘과 시>는 자신조차 온전히 망각하는 '원초적인 몰입'이 발취하는 힘이란 무언지 보여준다. 가나아트한남에서 8월 4일까지 평면 60여점과 조각 20여점을, 가나아트센터에서는 8월 18일까지 평면 30여점을 전시한다.

"어쩌면 내 안에 일부러 꾸며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영적인 손님을 쫓아내는 거죠. 그런데 이 손님은 이 공간에 떠다니면서 내가 나 자신을 더이상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을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내가 모든 생각을 잊어버리고 완전히 작업에만 몰두해 있다가, 더 이상 못하겠다 싶을 때, 뭔가 살아있는 것이 불쑥 나타납니다. 내가 아무런 생각도 갖지 않는 순간에 말입니다. 그리고는 이 손님은 금방 사라집니다. 이는 임신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손님은 그때까지 나와 함께 있는 겁니다. 이 손님은 내가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 순간이 되면 나타납니다." _노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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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미지 © 가나아트센터 – ARTMINING, SEOUL, 2019
PHOTO © ARTMINING – magazine ARTMINE / 가나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