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듯 보이지만 불쾌하지 않을 뿐이고, 행복해 보이지만 불행하지 않을 뿐이다. 이런 정체불명의 불편한 표정을 한 사람들은 딱히 누구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어디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우리들, 나, 혹은 당신의 얼굴이다." - ARTIST KAPPAO
WRITE 박나리(매거진 아트마인 콘텐츠 디렉터) PHOTOGRAPHY 김동오(DO STUDIO)
무표정하고 무료한 표정을 한 채 금방이라도 앞으로 쓰러질 듯 위태로운 무게감의 인물들을 통해 현대사회 속 인간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 갑빠오의 작업실에는 그래서 수많은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이 존재한다.
한껏 졸음을 머금은, 그래서 곧 감길 듯한 눈. 그러나 시선을 아래로 향하자 집중한 듯 동그랗게 오므린 ‘O’자형 입 모양이 영락 없는 ‘반전’을 선사한다. 화가 난 듯 벌겋게 달아오른 두 뺨, 차분하게 다문 일자 입매, 허공을 응시한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이의 표정도 인상적이다. 쉽게 감정을 들키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은 선반 위 진열 가능한 오브제가 되고, 시멘트 위에 연필로 드로잉 작업을 하면 오롯이 한 점의 회화로 탄생한다. 흙으로 한껏 다듬어 윤곽을 살리면, 그릇에서 스툴까지 다양한 도자 조형으로도 변주의 폭이 꽤 깊다. 조각, 드로잉, 디자인 가구, 마그네틱 소품 등 갑빠오 작가의 예술언어는 이처럼 호기롭고 신비하다. 한 마디로 영역을 규정할 수 없는, 여러 분야가 통섭을 이루는 요즘 시대와 썩 잘 어울리는 작가라 하겠다. “한마디로 규정되는 것이 싫다. 딱히 어떤 작가라 불리고 싶은 수식어도 없는 것 같다”는 작가의 성품과도 일견 비슷한 요소가 많다. ‘자기 드러내기’를 필연적인 과정의 일부로 삶는 아티스트들의 작업물이 대부분 그러하듯.
고명신이라는 본명보다, ‘갑빠오(Kappao)’라는 필명으로 더욱 잘 알려진 그녀는, 작품이 대중과 만나기 무섭게 ‘팔려 나가는’ 인기 작가다. 한가지로 규정되지 않는, 독특한 캐릭터를 차용한 다양한 작품들은 높은 대중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최근 아트부산에서 아키 갤러리를 통해 선보인 주요 작품들은 오프닝 첫날 일찌감치 판매됐고, 지난 해 롯데백화점 개인전 <Little Forest>, 윤현상재 아트마켓 등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손맛'이 깃든 도자 작품을 중심으로 오래된 고재, 목화 등 자연의 소재들을 활용한 위트 넘치는 설치 작업들은 공예와 예술의 경계에서 작가를 주목하게 만드는 힘이다.
가회동, 신영동 등으로 작업실을 옮겼던 작가는 오는 10월 도자 작업과 드로잉 작업 등을 모두 아우르는, 오랜 꿈이던 모든 작업이 가능한 스튜디오 오픈을 앞두고 있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 이탈리아 밀라노 유학길에 올랐던 작가는, 또 다른 10년을 그려가는 중이다. 태양이와 봄, 고양이 두 마리가 작업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반긴다. 사람인듯 동물 같은, 단 한가지로 규정하기 힘든 갑빠오 작가의 ‘크리에이처들’이 무언의 눈인사를 전하는 듯했다.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생활하는 작가의 작업실에는 사람같은 동물, 동물 같은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공존한다. 반려묘 '태양이'는 작가에게 영감의 대상이자 작업의 동반자다.
조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 대학을 나왔어요. 국내에서도 학업의 기회는 많았을 텐데 유학을 결심한 계기가 궁금해요.
현지어로 ‘데꼬라찌오(decoration)’라 불리는 과목이에요. 한국식으로 ‘장식미술’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죠. 담당교수가 4분 계셨는데, 교수마다 성향이 달라 다양한 세부 과목을 배울 수는 환경이 좋았어요. 목조, 석조 등 조금씩 고루 다뤘어요.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한국에서는 그릇 위주의 공예적인 작업이 주였다 보니, 막상 ‘내 것’이라고 할만한 것을 찾는 과정이 힘들었어요. 뭔가 어려운 개념을 더해야 할 것 같은 압박에 시달리다 보니 작업 자체에 흥미를 잃더라고요. 2학년 1학기 여름방학,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에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간 밀라노 도시에 남아 작업에 집중했어요. 3~4개월을 매일 같이 작업실로 출퇴근하며 진짜 제가 하고 싶은 작업을 하자고 마음 먹었죠. 지금의 작업들이 그때 탄생했어요. 개강하고 교수에게 보여줬더니 ‘드디어 네 것을 찾았구나’ 하시더라고요.
나무를 잘라 페인트칠을 한, 마그네틱 오브제에 그런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었군요. 밀라노에서의 첫 반응이 궁금해요.
몇 백 점의 나무 오브제를 제작해 전시 외벽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설치작업이었어요. 일일이 벽에 고정하기 위해 못을 끼워 넣었는데, 작업을 이어가면서 지금처럼 나무 안에 자석을 붙이는 방법을 고안하게 됐죠.
이탈리아 밀라노 유학시절 선보인 나무 마그네틱 오브제. 오래된 고재 위에 자신 만의 스타일로 채색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담아 동시대 사회성을 이야기 한 작품이다. 초기 작업을 발전시켜 이후 작품 안에 자석을 더해 철제에 자유롭게 붙을 수 있도록 했다. 우측은 작가 작업실 검정 캐비넛 가득 붙어있는 작품들.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기도 할 거에요. 사람의 표정이 부각된 ‘피겨’ 작업을 하는 이유가 궁금해요.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외로운 현대인의 감정 같은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복잡한 현대 사회 속을 살아가는 이들이 맺는 수많은 관계, 적당히 소외되지 않고 지나치게 섞이지 않기 위한 ‘알맞은 거리두기’를 지켜가는 사람들의 관계 맺기에 대한 이야기요. 표정이 의뭉스럽고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인물들을 통해 표현하고 있죠. 작품마다의 감정은 감상자의 몫이기 때문에 작가로서 정확하게 말씀 드리지는 않아요. 느끼는 데로 해석해주시는 부분들이 재미있더라고요.
조형작품에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이미지가 담겨 있어요. 그로테스크한 느낌도 강하고요.
피겨의 성별, 그리고 사람이냐 동물이냐 하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데, 저는 여성과 남성을 떠나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 같더라고요. 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젠더성이 배제된 형태로 자리잡은 것 같아요.
조형물의 표정이 저마다 다르잖아요. 은연 중 작업할 때 표정을 디자인하는 가이드 라인 같은 게 자리잡았을 것 같아요.
그렇죠. 제 피겨는 대부분 손발이 작고 불안정한 구조를 갖고 있어요. 관객 분들은 ‘저 아이가 서있기는 할까?’ ‘머리가 앞으로 쏟아질 것 같아’ 이런 불안감을 느끼죠. 사람에 대한 생각을 계속 확장하다 보면 결국 ‘우린 모두 보잘것없지 않나’ ‘조금만 인간이 겸손해진다면’ 하는 생각에 머물러요. 사실 우리들은 뭔가 대단한 존재가 아니지 않나요. 다들 어른인 척 하지만 미성숙하죠. 눈을 약간 작고 길게 그리거나, 입 모양에 표정을 담아요. 헤어 스타일도 대머리부터 5:5 가르마 등 다양해요. 즉흥적인 것을 좋아하다 보니 사전 스케치를 생략하고 바로 작업에 들어가죠. 캐릭터마다 비슷하게 만들려 해도 조금씩 미묘하게 다르더라고요. 제 작품이 반듯하지 않고 뭔가 엉성한 듯 보이는 것은 손으로 만들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에요.
여러 표정의 캐릭터 가운데 개인적으로 마음이 가는 작품은요?
개인적으로 애착이 드는 작품은 ‘반인반수’ 느낌의 피겨에요. 요즘 들어 사람인 듯 동물인 듯한 캐릭터에 마음이 가더라고요. 우리도 별반 동물과 다를 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작품이에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집단을 이루고 군락을 이루는 작업의 기본 골조는 한때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데서 영향을 받았을까요?
무의식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죠. 항상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모순적이기는 한데, 너무 관심 받는 것이 싫으면서 막상 소외되는 것도 두렵더라고요. 적당히 타자와 거리를 두고 ‘저 사람은 왜 저런 성격을 갖게 됐을까’, ‘어린 시절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혼자 상상하며 사회 안에 섞였던 것 같아요.
갑빠오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은 어떤 공통분모를 갖고 있을까요?
대부분 여성분들의 호응도가 높아요. 한번씩 인스타그램을 찾아보는데, 오히려 저보다 애착을 갖고 이름을 짓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자주 보이는 곳에 놓고 한번씩 웃곤 한다는 글을 보면 기분이 좋더라고요. 거대한 예술담론도 좋지만, 일상에서 소소하게 위안을 주는 작업에 저는 만족감을 느껴요. ‘윤현상재’와 같은 전통 갤러리를 탈피한 공간에서 제가 작품을 주로 소개해왔기 때문에 대중에게 빠른 시간 안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인테리어와 디자인, 생활 속의 예술품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이 찾아 주시죠.
드로잉, 공예 등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하고 있는데. 어떤 작가로 불리길 희망하나요?
지금까지 여러 장르를 시도해왔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어요. 주는 도자이지만 한계를 두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아요. 항상 ‘어떤 장르의 작가로 불리길 희망하냐’ 물어보시는 분이 있는데 저는 그냥 갑빠오 작가이고 싶어요.
반죽하고 빚어내는 동안 온전히 손의 움직임을 '받아준다'는 흙은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재료다. 말랑말랑한 질감에서 가장 단단한 형태로 구현된다는 점에서 도자 작업을 선호한다.
흙, 나무, 펜슬, 물감 등 다양한 물성을 다루어왔는데 그 중에서 특히 애착을 느끼는 소재를 꼽는다면요?
흙이 주는 유연함이 좋아요. 처음에 손끝 감각을 오롯이 다 받아주고 여러 번의 과정을 거쳐 가마에 다녀오면 단단한 빛을 내는 물성, 흙을 만지면 왠지 편해지는 느낌이 좋더라고요. 작업 과정도 사실 복잡하잖아요. 반죽하고 빚고 건조하고 초벌하고 유약을 바르고. 저는 산화소성을 하고 있어요. 이번 10월달에 옮기는 작업실에는 가마 작업실까지 함께 들여서 공간을 제대로 꾸릴 예정이에요. 올해 말 드디어 제가 꿈에 그리던 작업실을 근처에 열게 될 것 같아요.
작품의 영감은 어디에서 주로 얻나요?
사실 영감 받는게 특별하지 않아요. 일상에서 내가 얼마나 보려고 노력하는지에 따라 그게 영감이 될 수도, 일상일 수도 있는 것 같아요. 딱히 어디에서 받는다고 딱 규정하기 힘든 것 같아요. 행인들의 걸음걸이, 사람들의 표정이 될 수도 있고요.
아트와 디자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상품화에 관한 제안도 많이 받았을 것 같아요.
제안을 종종 받았는데 아직은 오리지널 작품을 만드는 작가로서 존재하고 싶어요. 언젠가는 생각이 바뀔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손으로 만드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요.
작업할 때 가장 행복한 순간은요?
아무래도 제 느낌대로 작품이 나왔을 때 같아요. “좋다!” “그래 이거야!” 하면서 혼잣말도 하고, 태양이와 봄이와 대화도 나누고요.(웃음) 반면 떨리는 순간은 도자 작업에서 재벌 가마 문을 여는 순간이에요. 모든 것은 불이 해주는 일이고, 가마에 들어가면 이제 작가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없으니까요. 도자 작업의 그런 점이 재미있죠. 이것 또한 작업의 일부분이지 하며 받아들이게도 되요.
시멘트를 얹은 캔버스 위에 펜슬과 색연필로 드로잉하는 작가는, 즉흥적인 채색을 즐긴다. 알 수 없는 수학기호와 조형 오브제 속 캐릭터가 자유롭게 공존하는 평면 작업은 그렇게 탄생한다.
향후 좀 더 도전해보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실은 다음 생의 꿈이 여러 게 있어요. 싱어송라이터, 그리고 소설가요. 기회가 된다면 책을 내보고 싶어요. 재능은 없지만 막연히 그런 상상을 해요. 아트북처럼 제 작품이 들어간 책이요. 그러고 보니 작가, 소설가, 뮤지션 모두 창작자네요. 왜 자꾸 ‘나’와 싸우는지 모르겠어요.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텐데요. (웃음)
KAPPAO | CONTEMPORARY ART
본명인 고명신보다 작가명 ‘갑빠오’로 더 알려져 있다. 제주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 대학 장식디자인(Decoration) 학과를 졸업했다. 도자라는 기본 틀 안에서 흙을 통해 사물을 빚어오던 작가는 이탈리아 유학길에서 돌아온 뒤 본격적으로 ‘갑빠오 스타일’로 멀티 작업을 잇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듯 화가난 듯, 행복한 듯 유쾌하지 않은 중의적 해석이 가능한 미묘한 표정의 인물들을 모티프로 작업한다. 나무 마그네틱, 도자 스툴, 오브제, 드로잉 등 복합다변적인 조형언어를 선보이며 몇 년 새 국내 아트신에 ‘갑빠오 스타일’을 소개해오고 있다. 2008년 밀라노 브레라 대학에서 작품을 선보인 이래, 베니스, 홍콩, 서울 등에서 다양한 컬렉터들을 만나왔다. 밀라노 화이트 갤러리 <The Uneasy Truth>, 서울 바다 디자인 아뜰리에 <Nobody knows me> 개인전 등이 있으며, 밀라노 디자인위크, 아트 쇼 홍콩(2013), KIAF SEOUL(2013), 아트 부산(2019) 등 다수의 페어와 그룹전에 참여하며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태양과 봄, 두 마리의 반려묘를 키우며 성신여대 근처에서 작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