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오라니엔부어거 길(Oranienburger Strasse)에 위치한 스푸르스 마거스(Sprüth Magers) 갤러리의 전시장에 들어서자 우리에게 친숙하면서도 비현실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어린 시절 시골 할머니 댁이나 동네 시계 가게에서 보았음직한 한국 달력의 낱장이 세 벽면 가득 질서정연하게 채워져 있다. 텍스트와 날짜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개념예술가 한네 다보벤의 전시 <지리학과 (남)한달력 (Erdkunde und (Süd-) Koreanischer Kalender)>이다.
1991년에 제작된 달력 작품에서는 각 패널마다 한국의 1년 달력 낱장이 화면 좌측에, 그 우측에는 아라비아 숫자로 날, 달, 해를 그녀만의 방식으로 합산하여 쓴 손 글씨와 물결 무늬 드로잉이 배치되어 있다. 물론 다보벤의 손 글씨와 드로잉은 시그니처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보다 먼저 한국 달력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그래픽, 색채, 구성이 관람객의 눈을 끌고 있었다. 각 작품의 우측 하단에는 손 글씨로 “오늘”이라는 단어가 독일어와 영어로 쓰여 있으며 마치 그 날 작업이 끝났다는 표시와 같이 그 위에 선이 그어져 있다.
그 옆 공간에는 ‘지리학 I, II, III(Erkunde I, II, III)(1986)’이 전시되고 있다. 이 연작은 700개가 넘는 패널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에는 달력 작업보다 더 다양하고 많은 정보들이 들어간다. 물결 무늬 드로잉, 손으로 직접 쓴 ‘지구’와 ‘지리학’을 주제로 한 백과사전의 인용문구, 자연과학 전공도서의 복사본, 그녀의 작업실과 전시의 흑백사진, 도판들. 또한 장소, 기념비, 사물, 역사적 인물, 사건들에 관해 작성된 목록은 각각의 페이지를 완성시켜줌과 동시에 다보벤의 방대한 창작영역을 표시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백과사전의 근본적인 의도, 즉 모든 지식의 총체를 요약하고자 하는 시도를 주제로 삼으며 자신의 예술을 감각적인 직접성과 물리 세계의 진정성에 의거하여 확장시키고 있다.
루시 리파드(Lucy Lippard)는 날짜를 기반으로 한 다보벤의 드로잉 작품을 “시간을 필요로 하는, 시간을 주제로 삼은, 그리고 동시에 시간(달력)으로부터 숫자의 근원을 다루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매 달의 1일에서 물결무늬 드로잉은 줄어들고 점차 달의 끝으로 갈수록 다시 늘어난다. 이것은 반복되는 썰물, 밀물, 조수간만의 움직임, 그리고 생겨남과 사라짐을 연상시킨다. 이번 전시는 한네 다보벤 재단과 독점적인 협조 하에 특별 기획되었으며 베를린 전시는 올해 12월 21일까지 열린다.
WRITE 장용성(매거진 아트마인 독일 통신원) PHOTOGRAPHY Sprüth Mag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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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미지 © Hanne Darboven – ARTMINING, SEOUL, 2019
PHOTO © ARTMINING – magazine ARTMINE / Sprüth Magers (http://spruethmager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