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오를리 공항 근처, 아스팔트 끝에 놓인 숲을 품은 건물은 프랑스 정부가 아티스트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지은 것이다. 화가, 소설가, 음악가 등 프랑스에서 다양한 창작 활동을 하는 아티스트들이 나무처럼 성장하며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사는 곳. 이곳에 30년 전 프랑스로 건너간 한국인 아티스트 심문필이 살고 있다. 그는 캔버스 대신 플렉시글라스를, 붓 대신 칼을 유용하게 사용한다. 여러 장 중첩시킨 플렉시글라스가 하나의 작업이 된다. 명료한 색, , 면으로 이루어진 그의 작업은 ‘그리기’보다 ‘만들기’에 가깝다. 그의 작업 앞에서는 신중해야 한다. 빛에 따라, 시선의 방향에 따라 다른 표정이 보이고, 보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라진다.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마음 깊은 곳의 시선으로 주목해야 선명히 보이는 그림. 파리에서 아티스트 심문필을 만났다.

1990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 심문필. 광섬유처럼 빛을 투과하는 플렉시글라스를 이용한 개인 작업뿐 아니라 프랑스 여러 도시의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1990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 심문필. 광섬유처럼 빛을 투과하는 플렉시글라스를 이용한 개인 작업뿐 아니라 프랑스 여러 도시의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색’이 아니라 심문필 작가가 의도한 ‘빛’이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나서 보니, 보호 천으로 싸인 플렉시글라스였다. 한국에서는 흔히 아크릴이라 불리는 소재. 유리에 비해 10% 정도 더 투명하지만 빛 투과율이 좋고 무게는 절반 정도다. 심문필 작가는 이를 캔버스 대신 사용한다. 그는 부인과 함께 무거운 플렉시글라스를 옮기며 촬영 팀에게 길을 내주었다. 그가 터준 길을 따라가는 순간 1층 벽 전체를 둘러싼 것은 페인트가 아니라 물감으로 칠해놓은 각기 다른 크기의 플렉시글라스임을 알아챈다. 1,2층은 작업실로, 3층은 수장고이자 부부의 방으로 사용하는 집은 프랑스 정부가 아티스트의 안정된 삶을 배려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심문필 작가는 개인적 작업 외에 투르(Tours), 르 아브르(Le Havre), 보케르(Beaucaire) 등에서 대규모 공공 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더욱 강한 인상을 남겼기에 이곳에 입주할 수 있었다. 프랑스 정부가 아티스트를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1층 통창 가득 푸른 정원이 보이도록 지은 집이다. 분명 안정과 보호로 충만해야 할 곳이지만, 그의 공간에는 전시를 앞둔 아티스트의 분주함과 예민함이 머물러 있었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아늑한 일상을 돌보는 대신 예술과의 혈투를 택한 것이 분명했다. 심문필 작가는 “아티스트의 삶은 곧 작업과 동일한 것이 아니냐”며 슬며시 웃어 보였다.

올해 5월, 파리 라위미에르 갤러리에서 열린 <The Space In Between> 전시 풍경. 작품은 빛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가진다.
올해 5월, 파리 라위미에르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풍경. 작품은 빛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가진다.
‘Untitled’, 2019, 96,5 X 85 X 4 Cm, Mixed Technique Under Plexiglass + On Aluminum
‘Untitled’, 2019, 96,5 X 85 X 4 Cm, Mixed Technique Under Plexiglass + On Aluminum

심문필 작가는 1990년 대구에서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대구에서 미술 학교를 졸업했지만, 생을 위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예술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재능과 야망은 수시로 꿈틀거렸고, 예술가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1990년 프랑스에 도착해 프랑스어를 배우고, 잃어버렸던 예술적 감각을 찾기 위해 아트를 공부하면서 하이퍼리얼리즘에 가까웠던 작업 스타일은 확연히 달라졌다. 그리기 위한 도구는 점점 사라지고, 만들기 위한 낯선 물건이 등장한다. 액자 안에 얇은 종이나 필름을 채워 넣거나, 여러 장의 도화지 위에 천연색을 바르는 등 조형과 설치 작업 성향에 가까워진다. 2000년 후반에는 건축 현장에도 나갔다. 프랑스 내 공공 시설물 신축이나 확장 공사 때마다 무조건 비용의 1%를 공공 미술에 지출하는 '1%법'에 따른 건축 프로젝트에 당선되어 프랑스 여러 도시의 건축물에 작업을 남겼다. 그 이후부터 플렉스글라스 외에 비전형적인 재료를 작업에 도입하기 시작한다.

식탁이자 책상이자 작업대로 쓰는 중앙 나무 테이블에는 작가의 열정과 사유를 더듬어볼 수 있는 칼질의 흔적이 선명했다. 외부 세상보다 자신 속으로 파고들며 작업에 최선을 다해 즐긴다는 증거, 자신의 삶이 작업으로 드러난다는 표시. 작가는 붓과 칼을 번갈아 사용하며 그림에 길을 낸다. 시간의 층을 쌓아 올리고, 인내와 기다림을 겹겹이 포갠다. 때론 이런 작업 속에 일부러 색을 숨기기도 하고, 착시 효과를 위한 장치를 심어두기도 한다. 투명도, , 깊이 등 여러 요소에 따라 달라 보이는 풍경. 극한의 아날로그 작업이 주는 신비한 현상일까. 그의 작업은 너무 섬세하고 명료해 마치 기계가 작업한 디지털 인쇄 작업이 아닌가 한 번쯤 의심하게 된다. 물감으로 그린 선과 면은 구성과 컬러 때문에 두드러져 보이고, 더욱 미니멀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이 아니라 심문필 작가가 의도한 이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빛의 파장이 물감 묻은 플렉시글라스를 통과하며 다양하게 변신해 마음과 부딪힌다. 사람들은 그의 작업 앞에서 감각을 곤두세우고 눈을 깜빡거리며 색을 본다. 아니, 세상을 본다.

‘Untitled’, 2019, 75 X 52 X 3.5 Cm, Mixed Technique Under Plexiglass
‘Untitled’, 2019, 75 X 52 X 3.5 Cm, Mixed Technique Under Plexiglass
‘Untitled’, 2019, 75 X 52 X 3,5 Cm, Mixed Technique Under Plexiglass
‘Untitled’, 2019, 75 X 52 X 3,5 Cm, Mixed Technique Under Plexiglass

플렉시글라스에 대한 이야기부터 듣고 싶네요.
흔히 아크릴 판이라 부르죠. 주로 독일제 아크릴 판을 사용해요. 섬세하게 나누자면 압출한 방식과 캐스팅으로 만든 것이 있는데, 미묘하게 특성이 달라 두 가지를 혼용하고 있어요. 플렉시글라스는 무게가 가벼운 대신 흠집이 쉽게 나 주의 깊게 다루어야 하죠. 이 소재를 사용하는 것은 마치 광섬유처럼 빛을 전달할 수 있게 때문입니다. 여러 장 겹치는 식으로 색과 질감이 혼합되는 효과를 유도할 수도 있고요. 기본적인 작업 방식은 플렉시글라스 뒷면에 칠을 하는 겁니다. 인쇄한 것 같은 흡착 질감을 내기 위해 20번 이상 칠을 하죠. , 눈에 보이는 컬러는 직접적으로 칠한 것이 아니라 투과되어 보이는 색이에요. 여러 판이 하나의 작업이 되기에 무게가 상당해요.

작업을 오랫동안 지켜본 미술 평론가 베르나르 푸앵(Bernard Point)이 이런 글을 남겼더라고요.미세한 움직임만으로 작가가 그린 , 면, 색이 어른거리는 수평선처럼 다가오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나는 그의 추상 작업을 풍경화로 바라본다. 마치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듯 빛나는 반투명 물의 깊이를 가늠하며 나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행복을 발견한다.작가님의 작품은 단순하게 느껴지지만 복잡한 내면을 품고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아크릴 때문에 느껴지는 매끈한 질감과 수직, 수평으로 정돈된 구성 만을 인상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사실 핵심은 판과 판 사이에 칠한 색과 질감이 서로 충돌, 융합, 변용되는 것이에요. 판끼리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파고들며 섞이는 ‘열린 구조’가 중요하죠. 빛과 착시 효과까지 더하면 작업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모두 열어 보여주죠. 각각의 선과 면은 칼로 명확하게 그어진 경계가 있지만 어느새 그 선은 불확실해지고, 마치 서로 움직이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들고요.

실제로는 칠해지지 않았지만 눈으로는 칠해진 색이 보인다는 말인가요?
맞아요. 이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어요. 어느 날 화이트 컬러 물감을 칠하고 있는데, 어느 지점에서 보니 자꾸 회색처럼 느껴졌어요. 뭐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흰색 옆에 칠한 다른 컬러 때문에 그 경계 지점이 흐리게 보이기 때문이었죠. 플렉시글라스가 광섬유처럼 빛을 투과시키며 색을 변형시키는 것이죠
.

LR_Sim_0733
LR_Sim_0643

1층 중앙 테이블에서 모든 작업 과정이 이루어진다. 작가는 매끈한 질감을 내기 위해 플렉시글라스 위에 20번 이상 칠을 하고 말리기를 반복한다.

LR_Sim_0621
LR_Sim_0617

화이트 컬러의 물감은 소재, 깊이, 부피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 여러 색으로 변형되어 보인다.  화이트 컬러 사이로 빛이 파고들면 색은 더욱 오묘한 오라를 발산한다.

그런 여러 장치가 주는 효과 때문에 작가님의 작업은 천천히 오래 즐기고 싶어집니다. 특히 색에 빠져드는 것 같아요. 안료의 진한 농도에 흡착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미세한 선 사이로 보이는 엉뚱한 컬러에 마음이 쏠리기도 하고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 경계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머문다고 할까요.
제 작업의 가장 큰 핵심은 ‘빛’이에요. 액자를 통해 눈에 보이는 색은 액자 밖 세상에서 전해진 빛에 따라 헤아릴 수 없는 색채로 움직이죠. 플렉시글라스 뒷면에 칠한 색은 앞의 것에 가려져 둔탁해 보이고, 어떨 때는 엉뚱한 색으로 보이기도 해요. 톡 쏘는 듯 강렬한 색이지만 주변을 감싸고 있는 화이트 컬러 때문에 침착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요. 수직,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얇은 선은 그저 선일 뿐이지만, 그 색채 때문에 팽팽한 긴장감을 던지죠. 숨겨놓은 여러 가지 장치 때문에 자연스럽게 빛과 어울리며 발광해야 할 색들이 갑자기 탁해지고 흔들리는 듯해 당황스러울 때가 있죠.

그래서 자꾸 보게 됩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요.
혼란스러워서 재미있죠.(웃음) 넓고 일정하게 가로로 놓인, 일률적으로 채색된 일련의 색 띠들과 그 흰색 간극이 불러일으키는 시각적 활력은 키네티즘(Cinétisme, 옵티컬 아트처럼 시각적 모호함을 통해 움직이는 듯한 환영적 인상을 창출해내는 방법)에 가깝죠.

확실히 캔버스와 물감으로 세상을 표현하는 회화 작가의 작업실과는 전혀 다른 풍경입니다.
그렇죠. 판을 여러 장 중첩시키기에 한 작업의 두께가 5~6cm 정도 됩니다. 너비와 길이는 제 각각이고요. 최근 들어서는 액자 틀 없이 판을 지그재그로 중첩한다든가, 기하학적 형태의 입체 작업을 시도하고 있어요. 규모와 형태가 더 커진 셈이죠. 액자 틀을 만드는 마지막 과정까지 제가 직접 다 합니다. 사실 시골에 작업실이 하나 더 있어요. 다양한 연장과 공구를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넓은 작업실이 필요해서 구했는데, 집에서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에요. 예전에는 일주일 중 반은 그곳에서 작업을 하고 반은 집에서 작업했는데, 저처럼 삶과 일의 구분이 없는 아티스트에게는 그런 스케줄이 불가능하더라고요. 이동 시간까지 줄이고 싶어 재료와 연장을 하나둘 집으로 옮기고 이곳에서 작업을 하게 되었죠. 덕분에 파리 외곽 작업실은 수장고가 되었고요.(웃음
)

7.	파리 오를리 공항 근처에 위치한 아티스트 하우스 단지
7. 파리 오를리 공항 근처에 위치한 아티스트 하우스 단지
1층 작업실 밖 야외 발코니에는 액자틀을 제작할 수 있는 각종 연장과 도구가 놓여 있다.
1층 작업실 밖 야외 발코니에는 액자틀을 제작할 수 있는 각종 연장과 도구가 놓여 있다.

이 건물은 프랑스 정부가 아티스트를 위해 지어준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프랑스는 프랑스에 거주하는 아티스트를 위해 아틀리에뿐 아니라 출판, 전시, 작업 구입까지 지원하는 등 심도 깊은 문화 예술 지원 정책을 시행하는 나라 중 하나죠.
미술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아티스트를 지원하는 여러 정책이 있죠. 프랑스가 문화 강국이라 불리는 것은 정부 자체가 작가의 작업을 고정적으로 사들이는 컬렉터인 동시에 프랑스인에게 미술이 일상의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이죠. 1873년부터 프랑스 정부는 생존 작가의 작업을 사들였고, 1977년에는 국립 현대미술 수장고가 생겼어요. 제가 주로 참여했던 것으로, 공공 시설물 신축이나 확장 공사 시 0.5~1% 금액을 공공 미술에 지출하는 것을 의무화한 '1%법'도 대표적인 예입니다. 소설 <인간의 조건>으로 유명한 작가 앙드레 말로가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었던 1950년대에 처음 제정되었는데, 이 제도의 1차적 목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굶주리는 예술가를 지원하기 위함이었죠. 또 고성이나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장소에서 수시로 작업 전시회를 열고 사람들에게 개방하는 것 또한 좋은 정책입니다.

1%법 아래 공공 미술에 참여했던 케이스를 자세히 이야기해주세요. 어떻게 본인의 작업만 하다 공공 미술에 지원하게 되었나요?
공공 미술 참여는 아티스트의 명성이 높으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로지 작업으로 평가합니다. 아티스트의 목소리가 깃들어 있으면서도 건축물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 작업인지를 보고 평가하는 것이죠. 공모 형식으로 아티스트를 선정하는데, 서류 심사를 거쳐 후보 3~5팀에 뽑히면 개인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어요. 저는 여러 차례 공공 미술 건축 프로젝트에 당선되었고, 이로써 프랑스 몇몇 도시에 제 작업물을 설치 할 수 있었죠. 아무래도 비용과 규모 면에서 개인 작업으로 미처 시도해 수 없는 것을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라 경쟁도 치열하죠. 한국에도 이런 공공 미술 프로젝트가 왕왕 있지만, 정부와 일을 함께 하는 데 여러 선입견이 있어 아티스트는 물론 대중도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는 것 같아요. 

--    , Dental--
--    , Dental--

2011년 참여했던 보케르의 외젠 빈 중학교 작업 풍경. 창으로 들어온 자연광이 반사에 의해 사방 공간을 컬러풀하게 물들인다.

10.	심문필 작가는 외젠 빈 중학교 뿐 아니라 프랑스 몇 몇 도시의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런 작업은 아티스트에게 개인적으로 시도할 수 없었던 다양한 작업을 실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10. 심문필 작가는 외젠 빈 중학교 뿐 아니라 프랑스 몇 몇 도시의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런 작업은 아티스트에게 개인적으로 시도할 수 없었던 다양한 작업을 실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생-뱅상 드 폴 유치원 프로젝트 풍경. 관통한 아크릴 기둥으로 안과 밖의 빛이 소통하는 작업이다. 광섬유와 빛의 굴절 효과를 이용한 작업
생-뱅상 드 폴 유치원 프로젝트 풍경. 관통한 아크릴 기둥으로 안과 밖의 빛이 소통하는 작업이다. 광섬유와 빛의 굴절 효과를 이용한 작업
심문필 작가는 개인 작업으로 사용하던 플렉시글라스와 빛에 관한 스토리를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 다양하게 응용했다.
심문필 작가는 개인 작업으로 사용하던 플렉시글라스와 빛에 관한 스토리를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 다양하게 응용했다.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서도 심문필의 스타일이 확실하게 보이네요. 작가님의 작업이 건축물과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은 몰랐어요.
2008년부터 공공 미술 작업을 시작했어요. 이 작업을 하면서 제 개인 작업에 활용 했던 플렉시글라스의 재능을 마음껏 시험할 수 있었죠. 2011년 보케르의 외젠 빈 중학교(Collège Eugène Vigne) 작업을 예로 들어볼게요. 천장에 뚫린 창으로 들어온 자연광이 반사에 의해 사방 공간을 컬러풀하게 물들이죠. 실제 색을 칠한 것은 한 면뿐이고 나머지는 흰 벽인데 말이죠. 마르세유 생-뱅상 드 폴 유치원(École Maternelle Saint-Vincent de Paul)의 경우 색을 바른 아크릴 기둥을 벽에 관통시킨 작업이었어요. 간단하지만 효과는 컸죠. 어두운 밤, 실내 조명이 아크릴 블록을 통해 밖으로 새어 나오며 묘한 분위기를 전하죠. 낮에는 반대로 외부의 빛이 아크릴 블록을 통해 안으로 침범하며 내부를 밝히고요. 광섬유와 빛의 굴절 효과를 이용한 작업이었어요. 마르세유에 있는 청소년 교정 기관 작업에도 참여했어요. 차가운 시멘트 사이에 형광 옐로와 핑크 컬러가 미묘하게 드러나는 작업인데, 건축물의 구조와 소재 자체를 깊이 이해해야 했죠.

2017년 이후 공공 미술보다 개인 작업에 더 몰두한 것 같네요.
특별한 결심을 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유럽 내 갤러리 전시가 잡혀 있어서 그것에 몰두하고 있을 뿐 이에요. 프랑스에 와서 작가 생활을 시작하면서 내일보다 오늘에 몰입하는 식으로 살고 있거든요. 삶은 단순하고 명료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먼 곳만 바라보면 생각만 많아져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단순한 삶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많은 작가들이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데 반해 작가님의 작업은 긴 시간 동안 비슷한 호흡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제 입장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죠. 단순함이 조금 복잡해졌다가 다시 단순해지는 것인데, 사실 보는 이의 입장에서 그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하지만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눈을 통해 뇌가 감지하는 것이에요. 단순한 색을 본다고 해도 집중이 필요하고, 그 색은 신경을 건드리고 기억을 건드리고 마음을 헤집어놓죠. 특히 제 작업은 1차원적 그리기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림을 인식하는 데 있어 보다 다차원적인 관계가 발생해요. , 시간, 상황, 사람 등 다양한 우연적 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생긴다는 뜻이에요. 같은 작업이라 해도 개인의 감정에 굴절되는 각도는 전혀 다르죠. , 늘 바뀐다는 의미예요
.

R19044
LR_Sim_0747
KONICA MINOLTA DIGITAL CAMERA

좌측부터
‘Untitled’, 2019, 41 x 31 x 4 cm, mixed technique under plexiglass + on plexiglass/ 2층 수장고로 가는 계단을 따라 걸린 최근 작품들/ ‘Untitled’, 2017, 75 X 52 X 5.3 Cm, Mixed Technique Under Plexiglass + On Plexiglass

곧 벨기에 아트 로프트 갤러리(ArtLoft)에서 전시를 열 예정으로 알고 있어요. 전속 작가로 있던 파리 라위미에르 갤러리(Galerie Lahumière)를 포함해 유럽 갤러리와의 만남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나요?
파리 라위미에르 갤러리는 아티스트 빅토르 바사렐리(Victor Vasarely), 장 드완(Jean Dewasne) 등 유명 작가들이 소속된 60년 넘은 갤러리였어요. 저의 작업을 본 많은 전문가들이 ‘당신 작업은 기하학적 추상 작업을 주로 보여주는 라위미에르 갤러리 스타일’이란 말을 했죠. 갤러리로 연락을 했고, 여러 번 만남 끝에 전속 작가로 일하게 되었죠. 벨기에 경우 대표가 한국인 이민영 씨와 길 보엔스(Gil Bauwens)예요. 이민영 씨는 파리에서 공부하고 오래 살았고, 벨기에로 이주한 후 갤러리를 열어 한국과 벨기에 아트와 관련한 여러 교류 전시 등을 주최하는 분이죠. 내년 110일부터 222일까지 프랑스 몽펠리에 알마 갤러리(Alma Gallery)에서 개인전을 열 예정이에요.

한국으로 돌아가서 작업하실 생각은 없나요?
한국이든, 프랑스든, 3국이든 좋은 그림을 그리면서 전업 작가로 산다는 것은 어느 정도 세상과 거리감을 두는 일이에요. 그것은 가늠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뜻이 아닐까요.  

LR_Sim_0751

심문필Shim Moon Pil
1958년 대구 출생. 1990년 프랑스로 건너간 후 파리에 머물며 유럽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투르(Tours), 르 아브르(Le Havre), 보케르(Beaucaire) 등 프랑스 여러 도시의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파리 라위미에르 갤러리, 벨기에 아트로프트 갤러리 등 유럽 내 여러 갤러리에서 개인전과 그룹전을 열었고, 아트파크, 갤러리 신라 등 국내에서도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는 색으로 빛을 그린다. 반투명한 플렉시글라스 뒷면을 채색한 후 여러 장 중첩시킨 화면은 색의 확산 효과를 유도한다. 빛이 파고들면서 색깔은 더욱 오묘한 오라를 발산한다. 사람들은 그의 작업을 보면서 깊은 바다, 저무는 태양, 짙은 어둠 등 기억 저편의 서랍을 연다. 25년 이상 빛이라는 한결같은 주제로 플렉시글라스를 고집한 그의 열정과 탐구심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아티스트가 된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웹사이트 www.moonpilshim.com


매거진 <아트마인>에 게재된 기사의 모든 사진과 텍스트는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되는 아트마이닝㈜의 저작물입니다.
사전 동의 및 출처 표기 없는 무단 복제 및 전재를 금합니다.
작품 이미지 © 레이문, 심문필 – ARTMINING, SEOUL, 2019
PHOTO © ARTMINING – magazine ARTMINE / RAY MOON STUDIO, Shim Moon P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