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국립 시문학 도서관(National Poetry Library)은 문학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작고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시 <Library of the Unword>를 기획했다. 영국을 주 무대로 활동하며 드로잉이나 글, 설치작업 등을 통해 언어에 대해 탐구해 온 박주연 작가는 베케트의 시 ‘Echo's Bones(1935)’에서 영감을 얻은 설치 작업 ‘Twenty Times a Thousand (2019)’를 선보인다. 베케트와 박주연은 고대 문학 속 같은 이야기를 고찰하지만 ‘이야기를 걷어 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 서로 다른 지점에 집중한다.
WRITE 이윤지(매거진 아트마인 영국 통신원)
Library of the Unword
Joo Yeon Park, Twenty Times a Thousand (2019)
graphite and ink on Korean manuscript paper. 423.5 x 137.5 cm.
Courtesy the artist and National Poetry Library, Southbank Centre, Photo: Dan Weill
베케트의 시 ‘Echo’s Bones’는 오비디우스의 서사시 <변신 이야기>의 나르시스와 에코에 관한 이야기 중 에코를 모티프로 쓰여졌다. 달의 여신 주노(Juno)에게 벌을 받아 누군가의 말을 반복해 말할 수 밖에 없는 ‘에코(Echo)’는 나르시스와 사랑에 빠지고 그에게 끊임없이 구애하지만, 그는 그녀의 사랑을 거절한다. 슬픔에 빠진 그녀는 동굴에 숨어들고 점점 말라 뼈 만남은 그녀의 육체는 결국 돌로 변해 목소리만 남게 된다.
작가는 이번 작업을 통해 베케트의 시를 해석하려 하기 보다 시의 모티프가 되었던 ‘에코’를 작업의 사이에 두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대화 구도를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이미지와 언어, 번역, 반복 등에 관심을 가져온 저에게 타인의 언어를 반복해야만 소통이 가능한 ‘에코’는 오랜 시간 흥미로운 대상이었습니다. 불어와 영어 사이에서 자가 번역이 글쓰기의 중요한 일부였던 베케트 역시 그러했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베케트의 시 ‘Echo’s Bones’가 점차 부식해 가는 ‘에코’의 몸에 집중한다면 제 작업’Twenty Times a Thousand(2019)’는 몸이 사라진 후에 남겨진 타인의 언어를 반복하는 목소리에 집중합니다.” 같은 이야기와 등장 인물을 바라보는 두 작가의 시선은 미묘하게 스치지만 다르다.
Joo Yeon Park, Twenty Times a Thousand (2019). graphite and ink on Korean manuscript paper. 423.5 x 137.5 cm.
Courtesy the artist and National Poetry Library, Southbank Centre, Photo: Dan Weill
반복되는 작은 동그라미, 동그라미로 가득 찬 원고지는 책 넘기는 소리만이 조용히 들리는 도서관 입구 한 켠에 설치되어 있다. 담담한 분위기의 작업은 천천히 시선을 잡아 끈다. 흑연과 잉크로 그려진 작은 동그라미에 대해 작가는 ‘육체에서 분리된 목소리(disembodied voice)’를 구성하는 언어 논리의 흔적 또는 회고록’이라 설명하는데 주체와 감정이 사라진, 누군가가 만들어낸 의미 없는 소리의 반복인 것이다. 작품 사이에 배치된 7개의 거울은 도서관의 공간을 비추기도 들고나는 방문객의 움직임을 가두기도 하는데, 이미지를 투영하고 가두는 반사적 메커니즘은 소리의 반복인 ‘에코’와 공통점을 가진다.
베케트의 글을 통해 2019년 현재에서 같지만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 박주연 작가의 이번 작업이 어떤 기회를 만나 또다른 대화를 이어 갈지, 먼 미래의 이야기가 기대된다. 베케트와 관련된 오디오 기록, 오래된 기사와 1935년 출판된 시집 <Echo's Bones and Other Precipitates > 등을 함께 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2020년 3월 29일까지 이어진다.
*런던 사우스뱅크센터(Southbank Centre)에 위치한 영국 국립 시문학 도서관(National Poetry Library)은 1953년도에 예술위원회가 개관한 공공도서관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근대 시문학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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