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고 환히 미소 짓는 입매, 얇고 긴 손가락을 지닌 ‘선이 고운’ 박성림 작가는 ‘선이 돋보이는’ 섬유 조형 작업을 한다. 서울과 런던에서 의상과 섬유조형을 전공한 작가는 12월부터 개인전 < Unpredictable Space>를 통해 지난 10년 간의 작업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실’을 엮고 매듭지어 완성한 비정형 도형들은 작가의 얼굴이자, 밤하늘, 숲, 세상의 모든 풍경이다.
WRITE Nari Park PHOTOGRAPHY Juyeon Lee
박성림이라는 정육면체
실과 바늘로 비정형 도형들을 만드는 박성림 작가는
밤하늘의 다양한 공감각적 심상을 작업으로 끌어온다.
박성림의 작업 과정을 지켜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선율이 흐르는 듯하다. 바늘이 캔버스를 관통해 들고 나는 동안 마치 현을 뜯는 가야금 소리나 바느질에 집중하며 읊조리는 누군가의 흥얼거림 같은 게 들려왔다. 바늘이 머물고 사라진 자리마다 남은 실의 흔적은 무희의 춤사위처럼 섬세했다. 직선을 그리며 뻗어나간 선과 선이 교차할 때마다 한번씩 매듭이 지어졌고, 그러면서 선은 다른 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마치 중간중간 매듭을 짓고 다시 갈 길을 정하는 우리의 삶처럼. “붓을 들어 일필휘지하는 회화 작가처럼, 실을 통해 캔버스에 드로잉 작업을 하고 싶었다”는 박성림 작가는 ‘텍스타일’이라 낯선 공예 소재를 통해 흥미로운 작품을 완성하는 작가 중 하나다.
신당창작아케이드 36호실. 비릿한 생선 냄새와 성악을 전공한 주인의 우렁찬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는 횟집을 이웃하고 박성림 작가의 아담한 작업실이 자리한다. “커튼을 치고 작업에 몰두하면 어느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근처에서 작업하는 젊은 작가들과 언제든 자유롭게 교류하며 긴장과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이 공간이 매우 만족스러워요.” 신당창작아케이드 10기 입주작가 박성림에게 올 한해는 어느 때보다 의미 깊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작업에 힘껏 매진할 수 있던 데다 청주국제비엔날레와 같은 공예대전에도 참여하며 어느 때보다 ‘깊어지는’ 시간을 보냈다. 은하수, 별자리, 행성의 움직임··· 밤하늘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가는 실을 엮고 바느질하는 작업을 통해 조형 오브제를 완성한다.
‘섬유’, 그 안에서도 ‘실’을 주재료로 작업하고 있어요. 지금의 작업으로 이끈 데는 어떤 계기가 주효했을까요.
작가로 활동하고 있지만, 제가 기본기부터 다져온 정통 미술 전공자는 아니에요. 대학에서 의류학을 배우다 보니 ‘실’이라는 요소가 늘 주변에 있었고, 미술을 좀 더 공부해보고 싶어 진학했던 분야가 섬유예술이었던 거죠. 전공을 배우는 과정에 실과 바늘, 천이 자주 등장했고, 선이 도드라진 ‘조형요소’가 강한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끝에 지금의 섬유 공예를 시작하게 됐어요.
‘실’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개인적으로 생각을 가장 완벽하고 간편하게 표현해주는 재료에요. 점과 점을 이을 때 가장 깔끔하게 그을 수 있는 공예적 재료가 제게는 실이었어요. 그것이 공간에서 서로 묶였을 때 점이라는 요소가 생긴다든지, 실과 실을 쌓으면 부정형이라는 도형이 생성되고, 그 도형들을 모아보니 시간성을 담보로 한 공간적 이야기가 생겨 즐겨 사용하게 됐죠. 선도 중요하지만 제게는 매듭도 같은 의미로 중요해요. 직물의 역사, 건축의 기원과 같은 측면에서 봤을 때 인류 문명이 매듭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굉장히 원시적인 기법이에요. 그러면서도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작업을 하면 평면에서부터 입체, 공간까지 제 스스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제 조형작업의 기본인 점, 선, 면을 이루는데 가장 완벽한 재료라고 생각해요.
광목을 입힌 캔버스를 바탕 삼아 바느질에 실을 꿰어 마치 드로잉하듯 추상적인 이미지를 완성하는 회화 작품이 대표적이에요. 캔버스 뒤편에 매듭을 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앞면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흥미롭고요. 작업의 전반적인 과정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실을 바늘귀에 꿰어 마음 가는 데로 선을 그려가요. 길게 뻗은 선들이 한번 꺾일 때는 자잘한 선들이 만들어져요. 선과 선이 만나는 꼭지점, 교차 지점에서는 한번씩 매듭을 묶어줍니다. 매듭 짓는 기술에 있어 특별한 이름은 없고, 제 스스로 ‘자수 드로잉’ 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전통 자수가 아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비판적인 시선도 있지만, 제 작업이 기법으로 부각되기 보다는 실을 통해 선을 그리는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보여지고 싶어요. 수정이 필요할 때는 매듭을 전체적으로 풀러 다시 작업도 가능해요.
'실'이 작품의 주재료인 박성림 작가는 갈색 실에 직접 먹을 입혀 염색작업을 한다. 아교가 섞인 먹을 머금은 염색실은 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검정색에 가까운 먹색을 띄는 매우 독특한 재료로 재탄생한다.
바늘을 붓 삼아, 실을 물감 삼아 ‘자수 드로잉’으로 완성된 캔버스 위에는 여러 비정형 도형들이 하나의 추상적 패턴을 이뤄요. 이 같은 이미지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전체적인 균형감을 보는 편이에요. 바느질을 하며 여러 선들을 긋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판단되면 캔버스 뒤편으로 매듭을 짓죠. 저에게는 바느질하는 행위, 실을 엮는 행위들이 일종의 힐링처럼 마음의 위안을 줘요. 초기에는 북두칠성 같은 별자리를 담아내다 어느 순간 지나치게 직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비정형적 도형 작업으로 넘어오며 지금에 이르렀죠. 밤의 풍경, 제가 겪고 이야기하고 싶은 현상들을 여러 도형을 통해 추상적으로 표현 하고 있어요.
박성림이라는 작가를 도형에 비유하자면 어떤 형태일까요?
아마도 정사각형이지 않을까요.(웃음) 옷차림, 생각, 관심사 이 모든 것들이 작품에 드러난다고 봤을 때 저는 4면이 모두 동일한 정사각형 인간 같아요. 남들에게 저는 굉장히 밝은 캐릭터지만, 제 스스로에게는 굉장히 까다롭거든요. 언제나 완벽을 요하고, 세밀한 부분에 신경을 쓰고, 뭐든 명확한 것을 좋아해 지나치게 답답할 때가 있는 정사각형 같은 존재죠. 가로세로 모든 면이 같아야 하고, 틀 안에 갇혀있는 부분도 많아요. 초반 작업에 그런 의식들이 묻어난 작업들을 정사각형, 정육면체와 같은 형태로 많이 선보였던 것 같아요. 사실 밤하늘을 보게 되고, 미지의 풍경들을 담아내기 시작한 것도 그런 틀을 깨고 싶어서였죠. 런던 유학을 다녀와 작업을 고민하던 중 우연히 고향에 내려가서 올려다 본 밤하늘을 보며 ‘정사각형’인 나의 삶, 작업을 탈피해보고 싶었어요. 우주는 무한한 공간이니까요.
현재의 작업이 ‘밤하늘’에서 많은 영감을 얻을 만큼 박성림 작가에게는 매우 특별한 세계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해 갤러리오 개인전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는 일상적 행위를 조형 활동으로 연계함으로써 내면을 다스리고 자아를 성찰하여 더욱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삶과 연결 지었다”는 작가노트의 구절을 다시 보게 되네요.
시골에서 자란 제게는 자연에서 생활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기분 좋은 벗이었어요. 그런데 도심으로 나오고 보니 너무 삭막하더라고요. 습관적으로 나무나 밤하늘을 보며 위안을 얻었던 심상들이 자연스레 작업 안에 담기며 마음의 안식처, 사유의 공간으로 확장됐어요. 초기 작업에서는 밤하늘을 요소를 담는데 그쳤다면, 지금은 그 별이 존재하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게 된 거죠. 평면 작업으로 밤하늘이 있는 공간을 풀어내고, 설치 작업을 통해선 그 공간을 탐색하는 느낌을 풀어내고 있어요. 위안의 시간들을 작품 속에서 경험하는 중입니다.
설치 작업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볼게요. 실을 엮어 만든 다양한 크기의 ‘구(球)’는 관객들로 하여금 밤하늘 속을 걷거나 산책하는 공감각적 경험을 의도한 작업이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2014년부터 시작했고, 그 이전에는 조형 작업 위주로 해왔어요. 작품을 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관객들이 오감을 느낄 수 있도록 작업 하는데 설치 조형물이 적합하죠. 처음 구의 크기를 정한 뒤 시작점을 어떻게 잡을지 결정해요. 그 뒤에는 자유롭게 빈 공간을 매듭 지으며 채워 나가죠. 실을 한번만 꼬면 매듭 느낌을 충분히 나지 않아 반복해 입체감을 높이는 편이에요. 실 안에 철사가 들어있기 때문에 한 두 번 정도 꼬아주는 느낌을 유지하고 있어요. 한 도형의 단면들을 먼저 그려본 뒤 그것들을 캔버스 작업으로도 만들고, 용접을 통해 골조를 만들어 그 위에 실을 엮어 완성하면 입체 작업이 되는 거죠.
실의 컬러감이 오묘해요. 완전한 검정이라기 보다는 빛에 따라 짙은 먹색 느낌도 나고, 각도에 따라 살짝 반짝이는 느낌도 들고요.
갈색 실을 직접 염색해 사용하는데, 화학적인 재료를 섞으면 색도 혼탁하고 냄새도 심해 먹을 입혀 작업해요. 아마 그 때문에 색상이 남다른 것 같아요. 먹에 아교 성분이 있어 별도로 풀 작업을 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빳빳한 질감을 얻을 수 있는데다 실 자체에 약간 빛도 나죠. 앞서 “작업이 제게는 힐링”이라고 말했는데, 염색을 하는 동안에도 먹 향을 맡으면 마음이 차분해져요.
한국에서 섬유예술을 공부한 뒤 런던으로 건너가 텍스타일 디자인과 파인아트를 전공했어요. 유학 시절은 어땠나요?
막연히 유학에 대해 생각해왔던 것 같아요. 별다른 고민 없이 석사 졸업 뒤 유학길에 올랐죠. 실이나 종이 끈 같은 선적인 조형 요소가 강한 재료들을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었고 고민 없이 영국을 택했어요. 큰 욕심 없이 ‘내가 하는 작업이 현지에서는 어떤 관점으로 보여질까’ 그 부분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데 집중했던 것 같아요. 갤러리 운영에도 관심이 있어 골드스미스에서 예술경영을 공부하고, 이후 첼시로 넘어가 파인 아트를 전공했죠. 한국에서 섬유미술을 전공했다 보니 공예적인 시선이 강했는데, 영국에서는 재료가 섬유일 뿐, 저를 ‘조형작업 하는 이’로 편견 없이 봐 줘 좋았어요. 제 작업의 발전 가능성, 전업작가로 활동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유학생활에서 좀 더 겪고 온 것 같아요. 2013년 한국으로 돌아왔으니 벌써 꽤 시간이 흘렀네요. 그 사이 박사과정을 마쳤고, 지금은 출강하며 작업을 병행하고 있어요.
그간 열어왔던 전시 가운데 작업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꼽는다면요?
2010년 첫 개인전을 열었으니 작가로 활동한지 근 10년이 됐네요. 제 작업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해준 첫 전시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마치 뿌리를 곧게 내리고 뻗어 나가는 나무처럼, 첫 개인전 이후로 변주하듯 작업이 확장되는 느낌이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White Forest’ 시리즈를 선보였었죠. 대학 시절 쉬고 싶을 때면 창 너머 비치던 나무를 정사면체 조형물로 구현한 작품이에요. 솜 형태의 가공되지 않은 면사를 뭉쳐서 일일이 매듭지어 만든 작품인데 연한 미색 줄기들이 나뭇가지를 떠올리게 하죠.
(좌) 갤러리도스 개인전 'The path' 설치전경, paper cord, 2018
(우) 나뭇가지가 연상되는 섬유를 엮어 만든 'My Universe'(2018). 초기작 'White Forest'에서 확장된 조형작품이다.
올해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예측 불가능한 작품>은 박성림 작가의 고민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결과물 같았다고 할까요. 비정형 조형물 사이로 투과된 빛이 그림자를 형성하며 또 다른 형태의 도형을 낳는 인스톨레이션이 흥미로웠어요.
별, 행성을 시각적으로 둥근 형태로 표현한 작품이에요. 도형을 통해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공간에 대한 저만의 해석을 담았어요. 자연을 측량하기 위해 만든 수학적 자료가 기하학인데, 도형들로 제가 행각하는 우주 속 공간을 표현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죠. 미지의 공간을 눈에 익지 않은 그야말로 ‘예측 불가능한’ 도형들로 표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계산되지 않은 비정형 형태가 만들어졌어요.
지금 머물고 있는 신당창작아케이드 생활은 어떤가요?
주변에 다양한 분야의 공예가들이 있기 때문에 작업 과정에서 접목하는 새로운 기법들에 대해 자세히 도움 받을 수 있어 좋아요. 30대 초반의 젊은 작가들이 주를 이루다 보니 유행도 접하고, 에너지도 많이 얻고요. 아마 제가 6번째로 나이가 많을 거에요. (웃음)
올해 2019년 마지막 전시가 한창이에요. 12월 6일부터 15일까지 한가람미술관 1,2 전시실에서 열리는 <Unpredictable Space>에는 어떤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나요?
이화섬유조형회에서 개최하는 ‘섬유예술,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다’ 전시 내 제 개인 부스가 담겨있어요. 갤러리 공간이 아닌, 부스 전시라 큰 설치 작품보다는 오브제 중심으로 소개 중이에요. 내년에는 공간 전체를 제 설치 작품으로 꾸민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어요.
한가람미술관에서 12월 7일부터 14일까지 전시 중인 박성림 작가의 전시 부스 'Unpredictable Space'
섬유작가, 조형예술작가, 테피스트리 작가··· 참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고 있어요. 어떤 작가로 불리기를 희망하나요?
한때는 ‘그게 전공 때문일까’라는 고민을 했어요. 많은 분들이 작가로서의 제 이름 앞에 참 다양한 수식어를 붙여 주시는데, 제 정체성을 가장 확실하고도 명확하게 전달하는 단어가 뭘지 생각했죠. ‘섬유예술가’ 또는 ‘실을 가지고 조형작업을 하는 사람’ 정도로 불러주시면 좋지 않을까요.
박성림 | Sung-Rim Park | Textile Artist
‘바늘을 붓처럼 실을 물감처럼’ 사용하는 박성림 작가는 실을 주 재료로 평면부터 설치까지 다양한 작업을 펼친다. 점, 선, 면을 통해 완성한 비정형 구와 스티치 드로잉 작품은 밤하늘이라는 미지의 세상에 관한 이야기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학부, 대학원 졸업 뒤 2012년 런던 골드스미스에서 예술경영, 런던 첼시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2014년 서울로 돌아와 2018년 이화여자대학교 섬유예술학과 박사를 졸업했으며, 현재는 수원대학교 공예디자인전공 객원교수와 작가 활동을 병행 중이다. 2010년 토포하우스에서 연 첫 개인전 <Construction>을 시작으로, 런던 A&D Gallery <White lines>(2013), 2018 갤러리오 <Deep-sky object> 등 10여 차례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소장처로 아트밸리(해태크라운), 런던 A&D Gallery 등이 있으며, 2019년 신당창작아케이드 10기 입주작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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