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업은 어두운 숲속을 더듬어 가는 길과 같다. 의식 너머에 숨은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_박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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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more -영영 없으리

박광수, 사라짐의 사건들을 응시하다

 

 

 

 

 

 

연인을 잃고 슬픔에 잠긴 화자의 방에 갈가마귀가 찾아와 읊는다. "영영 없으리."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이야기 시 <갈가마귀(The Raven)>의 문구를 전시명으로 차용한 박광수 개인전 <영영 없으리>. 이성을 상징하는 갈가마귀는 절망을 말해도, 살아가는 우리들은 애써 희망을 지키려 한다. 박광수의 화면에는 이렇듯 '의식-무의식', '감성과 이성' 간의 대립 사이의 서사가 존재한다. 이번 개인전의 대표작품 중 하나를 꼽으라면 200호 4폭으로 이루어진 대형 회화도 좋지만, 드로잉 60점 4세트로 구성한 반복 재생 애니메이션인  '60페이지(60pages)' 쪽으로 더 마음이 기운다. 병원에서 잠든 환자들의 모습을 소재로 그린 드로잉을 재료로 한 반복 재생 애니메이션은 총 240점의 서로 닮은 드로잉이 순차적으로 흐른다. 그런데, 작가는 왜 '잠'의 시간을 선택해 그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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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여울의 깊이 Depth of Great Rapids', 2019. Acrylic on canvas. 259 x 775 cm (259 x 193 cm x 4)
↓ '60 Pages (Still image)', 2012-19. Animated video. Continuous loop. 150(h) x 15 x 46 cm (including plinth)

'60 Pages', 2012-19. Animated video. Continuous loop. 150(h) x 15 x 46 cm (including plinth)

종이와 펜이라는 최소한의 재료, 그리고 철저히 컬러를 배제한 먹색의 선으로 그린 드로잉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는 대상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학고재 신관에서 2020년 1월 12일까지 열리는 박광수 개인전 <영영 없으리> 출품작 중 하나인 '60페이지'는, 20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바 있는 <베개 위에 남자(Man on pillow)>를 연상시킨다. "꿈은 아직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지만 여러 결론들이 동시에 펼쳐지고 이야기의 과정과 결과가 뒤섞여 있다"고 말한바 있는 작가에게 드로잉은 "헨젤과 그레텔이 뿌려두었던 빵가루와 같이 모르는 길을 설명하기 위해 냅킨 위에 그린 약도와 같다." 그의 관심은 "일상의 물리적인 현실에서 비껴나간 의식의 틈을 공상으로 메우는 것이다. 드로잉과 애니메이션 등으로 남게 되는 공상의 결과물들은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 되기도 하고, 대상을 붙잡기 위해 끊임없이 긁적거리는 기록으로의 방편이 되기도 한다."

진실된 아픔을 통해 현상을 깨우다
원본 위에 빈 종이를 얹고 희미하게 비치는 윤곽을 따라 복제하는 과정을 반복한 드로잉 60점 4세트로 구성한 '60페이지(2012-2019)'에는 시간의 흐름, 늙어감, 소멸의 징후를 드러낸다. 어쩌면 곧 죽음으로 사라질 이의 풍경일지도 모르는 파편적인 찰나를 포착한 드로잉이지만, 또 다른 지점에서 '꿈'이라는 세계로 건너가는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호흡을 가진 것'의 잠은 일상의 풍경을 확장하고, 공상의 세계로 나아가는 문이다. 시인 이성복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펴내며 '대체로 우리는 아픔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몸 어딘가가 썩어 들어가는데도 아프지 않다면, 이보다 더 난처한 일이 있을까? 문제는 우리의 아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것들에 있다. 오히려 아픔은 <살아있음>의 징조이며, <살아야겠음>의 경보라고나 할 것이다' 쓴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진실의 감각을 '아픔'이라 이야기한 시인과 같이, 박광수는 채도가 없는 세상에서 명도에 의존하는 시각과 같이, 어둠 속에 서서 바라보는 '꿈'을 통해 진동하는 존재들의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육체와 정신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게 박광수가 그린 이들의 잠든 모습이 작은 파동을 일으키는 위안이 되리라고 믿는다. 그 위안을 안고 추상적인 화면 속에 다양한 형상이 숨어 있는 '숲'을 본다. 비로소 박광수가 그린 풍경의 이야기가 보인다. 무수한 존재들이 뒤엉켜 있는 숲은 곧 우리의 몸이기도 하다. 눈이라는 창문을 통해 본 수많은 것들이 쌓인 뇌를 통해 무의식에서도 곱씹는 대상인 셈이다. 하여, 박광수는 저를 통해 동시대를 탐사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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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Depth - A Distant Mountain

학고재 신관 B2F 설치 전경 (좌). '깊이 - 먼 산 Depth - A Distant Mountain', 2019. Acrylic on canvas. 116.8 x 80.3 cm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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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cker 003', 2019. Ink on paper. 18 x 12.5 cm / 'Three Apples', 2019. Acrylic on canvas. 227 x 162 cm / 'Super Mama', 2019. Acrylic on canvas. 227 x 162cm (좌로부터)

200호 4폭으로 이루어진 대형 회화인 '큰 여울의 깊이(2019)'는 작가의 고향인 철원 한탄강을 떠올리며 제작한 작업이다. '큰 여울'은 한탄강의 옛 이름이다. 하천 바닥이 급경사를 이루며 빠른 유속으로 흐르는 부분을 여울이라고 하는데, 한탄강의 수면은 잔잔해 보이지만 사실 매우 빠르게 흐른다. 발 딛고 들어서면 비로소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유속과 용암 지대 특유의 거친 암석으로 된 지면을 느낄 수 있다. 겉보기에 알 수 없는 위험한 환경 탓에 실제 많은 인명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작가는 강 근처에서 노니는 사람들의 풍경을 소재로 추상적 화면을 구성했다. 일차적으로 보이는 사건과 이야기보다 표면 아래 내재한 속도와 깊이에 대하여 생각했다. 스티커처럼 화면에 붙은 기호와 형상들이 아래 층 휘몰아치는 붓질과 대비된다.
이번 전시에서 박광수는 새로운 기법으로 작업한 최근작을 처음으로 선보인다. 숨은 서사를 강조한 기존의 화면에서 나아가, 근작에서는 표현의 변주가 돋보인다. 번짐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선의 명도 차이를 극대화했다. 몽환적 분위기가 두드러지고, 화면은 더욱 깊어졌다. 뚜렷한 선과 안개처럼 뿌연 흔적이 교차하며 평면 위에 광할한 공간감을 구현해낸다. 다양한 명도의 흑백으로 선이 중첩하며 우거진 '숲'. 선은 숲의 윤곽이 되고, 어두움이 된다. 숲은 미지의 생명이 꿈틀대는 장소다. 꿈과 현실의 경계이자 태초의 무의식이 자리한 공간이다. 숲이 무성해질수록 형상은 모호해진다. 선이 흐릿해질수록 숨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9. Rigid Tree
C-76. Cracker 076

'단단한 나무 Rigid Tree', 2019. Acrylic on canvas. 53 x 40.9 cm (좌). '크래커 076 Cracker 076', 2019. Ink on paper. 18 x 12.5 cm (우).

C-59. Cracker 059
C-81. Cracker 081

'크래커 059 Cracker 059', 2019. Ink on paper. 18 x 12.5 cm (좌). '크래커 081 Cracker 081', 2019. Ink on paper. 18 x 12.5 cm (우).

박광수 개인전 <영영 없으리> 출품작 중 드로잉 시리즈 '크래커'는 작가의 흑백 선으로 우거진 '숲'으로 길을 찾아가는 또 다른 참조점이 된다. 추상적인 화면 속에 숨어 있는 다양한 형상들이 또렷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덫이다. 사람, 나무, 기호, 동물, 건물 등 분명한 대상으로 드러나지만 전시 서문을 쓴 곽영빈 평론가 말했듯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일련의 점으로 축소되고 마는 존재'와 같다는 지점에서 봐야한다. 무한한 우주에서 한 점과 같은 존재, 일시적으로 존재했으나 언젠가는 소멸될 유한한 존재, 우리는 작가가 '60 페이지' 시리즈를 통해 이야기하는 '사라짐의 사건들' 앞에 다시 선다. 우주적 시간 속에서 찰나의 흔적만 남기고 아무것도 없는 '무(無)'로 돌아가 '공간'으로 환원되는 우리 앞에 한 마디가 남는다. "영영 없으리." 

공기 같은 그림들을 그려보고 싶었다. 과거와 미래의 끝이 아주 정교하게 맞물려 겹쳐있는 시간을 생각해본다. 불완전과 어눌함이 환대 받는 시각 세계를 생각해본다. 어떤 대상이 사라짐 이후 상태가 있다면 그 상태로 가는 통로 한가운데 있는 대상의 흔적들을 생각해본다. 이 물리적 세계에 발 디딘 것들에게 온전한 사라짐은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안다. 사라진 듯하지만 둘러보면 드러난다. 그들은 어디 멀리든 어느 구석이든 가게 되고 나는 그곳에 당도하기 전과 후의 과정에 위치한 그들을 기린다. _ GWANG-SOO PARK

24. Owl_s Night

'부엉이의 밤 Owl_s Night', 2019. Acrylic on canvas. 116.8 x 80.3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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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수 | GWANG-SOO PARK
드로잉을 근간으로 평면작업, 애니메이션 영상, 입체작업에 이르기까지 드로잉을 다양한 범주로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며 드로잉의 새로운 지평을 넓히고 있는 박광수는, 198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2008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금호미술관(서울), 인사미술공간(서울), 두산갤러리(뉴욕, 서울)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시립미술관(서울), 아르코미술관(서울), 인천아트플랫폼(인천), 경기도미술관(안산)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등 주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밴드 ‘혁오’의 앨범 타이틀곡 〈톰보이 Tomboy〉(2017)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기도 했다. 제5회 종근당 예술지상, 제7회 두산연강예술상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에서 거주하며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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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미지 © 박광수 – ARTMINING, SEOUL, 2019
PHOTO © ARTMINING – magazine ARTMINE / HAKGOJAE GALLE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