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린 여덟 살. 학교를 가게 된 첫날 새하얀 실내화를 건네준 엄마의 손길에 그것의 어색함을 해결하기 위해
운동장 바닥의 고인 흙물을 발라 퇴색된 실내화로 만들어 신고서야 내 것 같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어린아이의 타고난 성향.
나의 표현 행위의 원류는 천성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낡고 때(dirt) 묻은 것을 대할 때 오는 안도감. 평생을 모아 곁에 두고 느껴야만 하는 집착.
나의 수집물은 삶과 함께하며 공유한 ‘오래된 색’을 담고 있는 모든 사물이 시간을 거슬러내는 추억의 흔적이 되는 것이다.’’
_허명욱
WRITE 장남미 (매거진 아트마인 콘텐츠 디렉터) PHOTOGRAPH 박우진 (키메라앤스튜디오) VIDEO 황승헌(매거진 아트마인 영상 매니저)
Overlaying of time
1년 내내 30도 이상의 온도와 70% 습도의 고온다습한 환경을 유지하는 작업실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서너 달을 보낸다. 금속 캔버스에 옻칠을 결합한 독창적인 평면 회화 작업인 옻칠화의 밑 작업이 이뤄지는 과정이다. 본격적으로 '색'을 올리는 작업에는 앞으로 또 서너 달이 필요하다. 작품 하나에 들이는 물리적인 '시간'이 녹진하게 흐르고 고인다. 오래된 장난감과 트렁크, 녹슬고 상처 난 문 같은 '사물들의 시간'을 사진에 담아온 허명욱은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옻칠을 재료로 사용하며 자신이 가져온 '시간성'이라는 주제를 확장시킨 표현을 보여주었다. 서양화의 일반적인 도료가 아닌 '옻칠'을 선택하고부터 현재까지 작가는 시간이 만들어내는 흔적과 색을 수집하는 작업으로 '사물의 삶을 내 삶에 접목시키는 행위'를 해왔다. 내년,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릴 개인전을 앞두고 '신작'에 매진 중인 작가와 만났다. 허명욱의 작가로서 연대기에 중요한 지점이 될 '신작'의 탄생 과정을 미리 엿보았다는 말이다.
박공지붕 작업실은 작가가 유년에 꿈꿨던 '그 집'의 형상과 꼭 같다. '진득한 물성'과 이미 존재하는 '시간성'을 가진 옻칠을 매개물로 작업하는 그를 보며,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은 없다고, 새삼 깨닫는다. 하루를 여는 '오늘의 색' 만들기를 지속해 여기까지 오는데 십여 년이 걸렸다.
올해, 허명욱은 소버린 미술재단(The Sovereign Art Foundation, SAF)에서 수여하는 '소버린 아시안 아트프라이즈 2018'에 파이널리스트에 올랐다. 매년 26개 국가의 총 400명 작가 중 입선자 30명을 선정하고 아시아 투어 전시를 통해 작품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는데, 홍콩 소더비 전시 이후 경매를 앞두고 소버린에서 연락이 왔다. "거부할 수 없는 관계를 가진 중국 컬렉터가 반드시 경매 전에 제 작품을 구매하고 싶다는 요청을 해왔다고요. 아라리오 갤러리와 상의해 경매 직전에 그에게 판매했어요. 경매로 들어갔으면 작품 값어치도 훨씬 뛰었을거라고 지인들이 더 아쉬워하더군요. 현재 제 작품을 판매할 때 계약서에 3년간 경매시장에 내놓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어요. 작가의 성장을 좀 더 지켜보라는 의미에요. 제 입장에서는 장단점이 있는 조건이지만, 이전에 제 작품 여러 점을 한번에 컬렉션한 분이 얘기하더라고요. 컬렉터 입장에서는 작가가 성장하는 과정을 보는 묘미도 크다고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낮은 가격으로 작품을 구매했었지만, 제 값어치가 올라가면 자신의 가치도 상승하는 것과 다름 없으니 컬렉터로서 내내 기쁜 일이 된다고요."
작가가 사람들에게 주는 기쁨은 작은 데에서도 빛나는 '준비'에 있다. 허명욱 작가는, 아름다운 식탁을 차려놓고 우리를 맞이했다. 작업실은 주인이 없는 순간에도 그다운 '태도'로 보여져야 한다고 강조해온 허명욱의 공간에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방으로 창과 문을 열어두어 바람이 잘 통하는 집에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간 그 날은, 태풍 솔릭이 서울과 경기도권을 강타하리라는 예보와 긴급재난문자가 시시각각 타전되던 때였다. 마무리 작업을 앞두고 있는 새 작업실과 개인전 오픈을 준비 중인 작가의 나날에 대한 안부부터 물었다.
작업실은 곧 작가이고, 걷는 걸음조차 자기다운 태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작가 허명욱.
현재 작업실 가까이에 새 작업실 두 동을 더 짓고 있어요.
동선과 시스템, 환경을 정비하려고요. 내년에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어요. 상하이로 이어질 전시라서 최대한 작업 시간을 늘려야 하는데, 서울과 경기도 곳곳에 작업실들을 오가는 동선에서 자꾸 시간을 빼앗겨요. 시스템에 변화는, 제가 주요하게 사용하는 옻칠이 가진 특성 때문에 생각한 거에요. 칠장에 넣고 빼는 시간까지도 계산해서 작업과 이동이 한 번에 가능한 작업대 시스템을 만드는 중이에요. 작업의 효율성을 따지게 된 거죠. 같은 시간을 투자하되 시간을 아껴 쓰는 개념이요. 그래서 무리한 투자를 하고 있지만, 좋아요. 작업실을 짓는 일도. 페인팅 작업은 일반적인 캔버스와 달라서 바닥에 놓아야 하니 넓은 공간이 필요해요. 6~7개월, 1년에 걸쳐서 한 작업이 나오는데 하루에 한 작품만 할 수는 없어요. 펼쳐놓고 작업해야죠.
작업실을 오가는 동선에서 새로운 구상을 활발히 해왔는데요.
작가는 몸이 먼저 움직여야 해요. 어제는 새 작업실에서 또 하나의 ‘꺼리’를 찾았어요. 종일 버려지는 파편을 주워두었는데, 완공되면 한쪽 벽면에 설치할 작업이에요. 저는 손을 움직이면서 머리로 생각이 옮겨 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작업이 그려져요. 자연스럽게. 결국, 하나의 사물도 허투루 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문제예요.
작업 도구와 재료, 작품과 일상의 사물을 너르게 펼쳐놓은 현재 작업실에서와 같이, 한눈에 작품이 들어오는 방식의 수장고를 계획 중이에요. 앞으로 작업 방향을 이끌어가는 데도 중요한 아카이브가 되겠네요.
작가도 자꾸 자기 작품을 되돌아볼 수 있어야 방향성이 생겨요. 현재에 매몰되지 않는 시야 확보요. 수장고는, 저를 먼저 갖추는 준비예요. 언제 어느 때 누가 보자고 해도 바로 꺼내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해요. 박서보 선생님의 작품 관리 체계를 보면 수장고의 중요성을 깨닫게 돼요. 김태호 선생과 최영욱 작가도 파주 작업실에서 그런 정리를 하고 있고요. 또한 작가는 작품 부자여야 해요. 일이 있을 때 언제든 작품을 낼 수 있어야죠. 작품에는 반드시 임자가 있다고 생각하고, 제 작업에 자신감을 가지려고 해요.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부자가 되는 기분이에요. 하루를 돌아보며 저에게 말해요. “오늘 또 많이 벌었네.”
하나의 캔버스를 완성해가는 과정을 기록한 영상은 5월과 5월에 시작되고 끝난다. 허명욱의 사계절은 앞으로도 이러할 것이다.
옻칠 평면작품 <무제> 시리즈는 금속 캔버스에 생칠과 수십 번의 흑칠을 올리는 밑 작업에만 꼬박 서너 달이 소요돼요. 이후 매일 다른 색을 만들고 켜켜이 쌓는 ‘시간의 기록’과 같은 방식으로 완성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경계선을 제외하고 평면에 남는 것은 결국 ‘마지막 컬러’예요.
한 작업에 보통 6~7개월이 소요돼요. 칠하고 말리는 데 하루, 다음날 사포 치는 데 하루, 그렇게 반복적인 밑 작업을 하고서 ‘그날의 컬러’를 올리죠. 색은 그날의 제 기운이에요. 조색으로 하루를 열어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그 아름다운 색들을 다 덮어버리는, 잔인한 사람이라고요. 그 말에 대해 고민했죠. 사진으로 기록해 남기지 않으면 모조리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그렇게 해서 색 패널을 만들게 됐어요. 자리 차지를 덜 하게 세워 보관했는데, 또 거기에서 신작이 움텄고요. 가닥을 모아 집성기에 쌓고 압착하는데, 옻칠은 본드와 융합되지 않기 때문에 흑칠로 붙여요. 옻칠이 어마하게 들어가고, 비용 문제가 발생하죠. 작품 가격이 올라가거든요. 우리나라 옻칠 소비량 중 거의 절반은 제가 쓴다고 봐도 무방해요. 옻칠 작업하시는 장인들은 저보고 미쳤다고 해요. 하지만 이 역시 장르의 문제와 같다고 봐요. 옻칠은 재료일 뿐, 어느 날 라커 페인트에 매력을 느낀다면 그걸 사용하겠죠. 다만 옻칠이라는 재료적 특성이 제 작업 맥락과 통하기 때문에 쓰는 거에요. ‘시간성’이요. 옻칠은, 재료 자체가 시간성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Untitled>, 2016. ottchil and gold leaf on metal. 150 x 210cm.
‘‘변치 않는 것의 갈망은 작가의 금박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금박 작품은 금박 특유의 재료에서 나오는 화려한 효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변하는 세상에서 변치 않는 그 무엇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요한 가치를 품고 사는 것만치 의미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것으로도 만족을 향한 열망, 즉 인간의 허기를 메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금이 지닌 ‘불변의 상징성’이다. 진정한 행복은 물질의 더미에 있지 않고 마음의 행복에 있음을 나타내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_서성록(미술평론가)
시간이 만들어내는 흔적과 색을 수집해온 허명욱 작가는 '사물 또는 존재가 겪는 끝과 소멸'에 대하여 사유하는 작업을 한다.
신작은 작가의 연대기에서도 중요한 지점에 있는 작업인데, 작품 하나에 쏟아야 하는 물리적인 시간도 상상을 넘어서요.
각각에 날짜가 쓰여있는 4mm 두께의 가닥을 하나씩 붙여가는데, 한 가닥을 만드는데 보통 일주일이 필요해요. 2,400 x 2,400 작품이라면 600가닥이 필요한, 4,200일 간의 작업이라는 뜻이죠. 작품 하나에 10년을 고스란히 담는 거예요. 점점 그렇게 미쳐가고 있어요. 스틱 재료는 한지, 나무, 철 등 다양하게 써보려고 해요. 다음 작업으로 ‘드로잉’을 생각하고 시험적으로 다뤄보고 있어요. 사물에 대한 작업에서는 드로잉을 하는데, 새 작업실 문 스케치를 하면서 파생됐어요. 그래서 제가 하는 모든 게 작업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당장 앞두고 있는 구하우스 전시는 사물에 대한 이야기예요.
옻칠 스틱을 보면서 색의 스펙트럼을 보면 작가가 가진 주요한 컬러들이 보여요. 이들을 한 단어를 아우른다면요.
기운과 온도. 그날의 기운이 담긴 컬러가 수없이 레이어로 쌓여 한 겹을 이루는 것이니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내제돼요. 스틱 하나하나가 이 날 이런 색을 만들었구나 하는 일기 혹은 작가노트예요. 그 중에는 유난히 기억하는 ‘레드’를 만든 날도 있었겠지요.
9월 11일부터 12월 16일까지 구하우스에서 열리는 <허명욱의 옻방>은 집적된 사물에 대한 전시예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140개의 서랍장을 처음 공개하는 전시인데, 유년기부터 현재까지 저의 사물들을 기록하는 작업이에요. 구하우스라는 전시 공간의 연장선에서 ‘방’을 주제로 풀었어요. 2016년 남서울 시립미술관 초대 기획전에서 보여준 사물들을 축약해 놓은 ‘컨테이너’ 공간도 옮겨 놓을 거예요. 과거부터 현재까지 수집해온 사물들과 제가 만든 것들이 섞여 있어요. 가령 아주 오래된 물건처럼 보이지만 3년간 노영희의 철든 부엌에서 도시락으로 사용한 용기들처럼. 많은 사람들의 손 때가 묻어 돌아온 것이지만 먼 과거의 사물은 아닌. 이것이 바로 제 작업이에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는. 작년 즈음인가 한국의 색을 주제로 다룬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한국의 색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마지막 질문이 있었어요. 순간적으로 “제가 쓰는 색이 한국의 색입니다” 했어요. 살며 보고 받아들인 모든 색이 중첩된 가운데 매일 아침 새 색을 만들며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색들이요. 이미 시간을 품고 있는 색과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물들이 섞여 있으니 누구도 쉽게 '새것'을 못 찾는 거예요. '혼성적 시간'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요.
구하우스 전시에서 선보일 140개의 서랍 가운데 하나이다. "어느 것이 빈티지이고 어떤 것이 새 것일까?"
"특히 허명욱은 제품 사진가들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금속공예 작품이나 반사가 심한 제품을 주로 작업하는 테크니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는 평을 듣고, "72분의 1로 축소되어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자동차를 다시 72배로 확대하여 실제 자동차 크기로 만들어 프린트하는" <스케일(Scale)> 연작을 통해서, 탄탄한 테크닉을 기반으로 한 사진작가로서 인정 받아왔어요. 무엇을 다루든 테크닉적으로도 완벽하게 마스터하려는 성격인가요?
할 수 있는 만큼, 제가 생각하는 감이 나올 때까지 하는 거예요. 저는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출 줄 알아요. 더 들어가면 스스로 묻혀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거든요. 단점이지만, 작가로서는 장점도 되죠. 다양한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유년을 보낸 진주에서 고등학교 자퇴서를 내고 상경해 서울에서 가진 첫 직장이 나이트클럽이었어요. 그러한 경험들이 계속 붙는 거예요. 아라리오 개인전 당시 평론을 전공하는 일본 학생들 서른여 명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장르’에 대한 질문을 받았어요. “작가는 먹은 대로 나오는 게 작가다. 배설물은 같아도 매일 다른 장소에서 여러 형태의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과 ‘장르’는 같은 맥락이다” 답했어요. 화장실에 의미가 있나요? 제가 먹고 배설한 게 중요한 것일 뿐. <칠漆하다(Overlaying)> 전에서 보여준 재미있는 작업 하나가 있어요. 187개의 용기에 노랑으로 옻칠을 해 사진으로 기록하고 사람들에게 나눠줬어요. 물감통, 화분, 도시락 등 다양한 환경에서 사용된 용기들은 각기 다른 색을 띠어요. 각각에 연령, 성별, 용도를 기록해 담아놓았어요. 변화에 대한 이야기에요. 이것이 제 모든 작업에 모토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에요.
옻칠 용기 187개를 6개월 전부터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유자재로 해석해 사용하게 한 후 돌려받아 쌓아 만든 설치작품과 나란히 온전한 ‘새 것’일 때를 사진으로 담아 전시한 2016년 아라리오 갤러리 개인전. 시간성은 허명욱의 작업을 꿰뚫는 대명제이다.
컬렉터로서 김창일 회장이 소장한 작가 허명욱의 작품은 무엇인가요.
2016년 아라리오 서울 <칠漆하다(Overlaying)>전 1층 메인 전시장에 딱 한 점 걸었던 ‘블랙’ 메인 작품과 그 작업에 사용한 모든 컬러들을 기록한 디지털 영상 작업이요. 김창일 회장은 전속 작가 작품 가운데 어느 미술관이나 뮤지엄에서 전시를 열 때 ‘작가에게 필요한 작품’으로서 꼭 보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작업을 주로 선택해요. 중요한 개인전을 한다면 조건 없이 소장품을 빌려주고요. 바람직한 방향이에요.
두 개로 분할된 화면에서 거친 표면을 한쪽은 자연적인 것을, 광택을 지닌 한쪽은 인공적인 것을 표상하는 대조법으로 완성되는 캔버스를 가르는 경계의 비례는 어떻게 정해지나요? 작품에서 ‘중심선’은 단순한 의미는 아닐 텐데요. 마치 균형을 가늠하는 기준선처럼 보여요.
중심선 위치는 때마다 달라져왔는데, 최근작들은 기준점이 중앙으로 이동하고 있어요. 요즘은 작업할 때만큼은 모든 시름을 다 잊을 정도로 편안해진 제 마음도 영향을 끼쳤을 거예요. 작가는 어느 날 잘 될 수도 있지만 그냥 묻힐 수도 있어요. 시대적인 배경도 잘 맞아야 하고 운도 따라줘야 하죠. 제 작업이 안 팔릴 수도 있고 해외에 부각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스스로는 작업하며 소름이 끼칠 정도로 흥분할 때도 많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죠. 이제는 그러한 욕심에서 조금 넘어선 것 같아요. 무엇보다 중요한 첫 번째는 행복하게 작업하는 현재예요. 그래서 빚을 지면서도 작업실을 짓는 거에요. 사물 하나에도 기운이 담긴다고 믿기 때문에, 스텝들과 매일 아침 조회를 해요. 초벌부터 완성까지 30~40 단계를 거쳐야 하는 그릇, 쟁반, 컵과 같은 기물의 베이스 작업은 스텝들이 해요. 인생은 다 나름대로 고민이 있으니 매일의 제 기운처럼 그들도 다르겠지요. 그래서 조회를 통해 서로 귀를 열어두고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저는 조용히 귀를 열고 들어요. 좋은 기운으로 하나의 작업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환경이 중요해요. 분당 작업실은 그 환경이 요구되는 일이라 지하를 얻었지만 내내 고민이 됐어요. 스텝들이 좋은 환경에서 작업하도록 하자고 새 작업실 구조 모두 앞쪽으로 통창을 내고 앞 산을 볼 수 있게 했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온전히 통창에서 살아 움직이는 캔버스가 될 거예요.
<Untitled>, 2016. ottchil and gold leaf on metal. 120 x 120cm.
"오죽하면 캔버스를 금속으로 쓰겠느냐" 할만큼 '철'이라는 재료에 천착해 왔어요.
금속은 저에게서 놓을 수 없는 재료예요. 제가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물성이 달라지는 매력이 커요. 흙은 가마에서 깨지기도 하고 성형이 찌그러져서 나오기도 해요. 수십 년 작업을 한 사람들에게 물어도 대처가 안 돼요. 가마에 들어가는 순간은 본인 의지와 상관 없이 하늘에 맡기는 거예요. 그런데 금속은 제가 하려는 바대로 잡혀요. 제 눈으로 보고 다루면서 완벽함을 이뤄낼 수 있죠. 안 되는 건 처음부터 시작을 못 하게 만드는 재료인 반면, 가능성이 있는 것은 완벽하게 성형될 때까지 시간을 갖고 끝까지 하면 해낼 수 있는 것이 금속이 가진 물성이에요. 제가 원하는 방향, 제 의지와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재료가 금속이 아니었나 생각했기 때문에 많이 사용해요. 반면 옻칠은 예측 불가능한 면이 있어요. 제아무리 온습도를 맞춰도 안 마르는 경우가 있거든요. 어떤 면에서는 그것 때문에 매력적이고요. 그런 점에서 저는 대단히 긍정적인 사람이에요. 옻칠의 최고 단점은 첫 번째, 발색에 시차예요. 겨자색을 칠했는데 당장 눈에는 황토색이에요. 제 색을 찾는데 시간이 필요해요. 두 번째, 천연 도료이기 때문에 흠집이 잘 나요. 상품성이 떨어지죠. 저는 그 '상처'가 제 작품에 더 빛을 더해준다고 봤어요. 기술력을 요하는 장인들에게는 최고의 단점이지만 저에게는 최고의 장점이 돼요. 옻칠이라는 재료를 발견하고 너무 흥분했어요. 저는 일부러 작업에서 시간성을 주려고 노력하는데 제 자체로 가지고 있으니까요. 자기가 알아서 시간을 만들어 가요. 시간이 지나야 자기 색이 나오다니, 대단하잖아요.
2008년부터 옻칠을 사용하며 오사카예술대학 구마노 기오타가 교수와 협업하며 본격적으로 옻칠 세계에 눈을 떴다고요.
구마노 선생과 두 달간 협업하기 이전에는 막연하게 옻칠이 가진 색의 매력에 감흥이 있었다면, 협업을 하며 집중적으로 옻칠을 다루고 좀 더 깊어졌지요. 협업에 타이틀을 개인적으로는 '30 by 30'이라고 상정하고, 구마노 선생과 협업을 위해 현재에도 제가 사용하고 있는 3 x 3m 테이블을 만들었어요. 두 달 간 작업하고 이 테이블 위에서 작업하고 10월에 그 위에 작품을 놓고 전시하는 계획을 세웠죠. 9월에 작업이 끝났고 한 달 넘게 발색을 시키며 지켜본 후 10월과 11월에 걸쳐 전시를 했어요. 그때 옻칠의 특성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면서 집중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전시 자체도 그때 상황과 환경에 맞게 진행했는데, 각본에 짜인 것처럼 이뤄진 모든 것들이 지나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요. 인생이 그래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죠. 어느 5월에 아지랑이를 보고 고등학교 자퇴서 내고 서울로 올라와 스스로의 경제를 책임지는 삶을 살고 광고 사진에 입문해 일하다 순수한 제 작업을 하는 작가가 되었듯. 그때 제 마음이 동하면 움직이는 거에요. 저답게, 제 몸에 맞게, 제가 편안함을 느끼는 삶을 향해서.
모든 작업이 계산된 후에 이뤄지지는 않는다고 했어요.
사람들은 인생을 설계한다고 얘기하는데,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저 하루를 알차게 잘 보내는 것이 제 인생의 계획이에요. 작업도 같아요. '데이 드로잉' 자체로 매일 제가 작업한다는 사실이 보여지지요. 지금 하고 있는 신작도 매일같이 해나가고 있기 때문에 하나씩 완성이 되듯.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것이고, 지나서 보니까 남들이 안 하던 것이고, 그래요.
수집한 사물과 직접 만든 책상과 난로 같은 사물과 작품이 한 데 놓인 공간은 그에게 '장르적 정체성'을 묻는 이들에게 던지는 단 한 마디의 대답이 된다.
작가가 빚은 일상의 사물을 사용하면서 생활의 변화를 겪은 이들 가운데 기억에 남는 컬렉터가 있나요?
포항이 고향인 새댁이 사업에 성공한 남편을 따라 서울에 올라와 청담동에 새집을 얻었어요. 어느 날 근처 조은숙아트앤라이프스타일 갤러리에서 우연히 빨갛고 작은 종지 하나를 사갔죠. 식탁에 분위기가 달라졌대요. 아이들이 관심을 보이고 무뚝뚝한 신랑도 한 마디를 하더래요. 신기해서 몇 가지를 더 샀는데 어느 날 집으로 초대한 학부형들이 관심을 보이더래요. 그렇게 옻칠 테이블로, 옻칠화로 컬렉션이 늘어갔고 잡지에 소개가 됐죠. 마치 제 갤러리와 같은 집이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역추적을 통해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지금은 제주에서 사는데 아라리오 갤러리를 통해 다른 작품 하나를 더 컬렉션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작가로서 가장 큰 보람이죠. 누군가의 집에서든 제 사물과 작품이 분위기를 상승시키는 좋은 에너지가 되기를 바라요. 많은 상상을 자극하는 <아톰>의 뒷모습처럼, 누군가들에게는 제 작업이 치유의 기운을 전해주리라 믿어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게끔 아름다운 컬러로 집에 온기를 바꿔줄 수 있다고요. 잭슨 폴록과 제 작업에 차이점이 무얼까요?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도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내제된 에너지를 분출하는 거에요. 작가들 누구에게나 내제된 에너지가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작업을 저마다 해나가는 거에요.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잭슨 폴락의 작업이라면, 제 작업은 감정에 내제된 에너지를 색으로 담아내는 작업이지요. 선비들이 목욕재계를 하고 한 획을 그어나간 수묵화와 누군가의 작품을 모사한 화공들의 그림은 값어치가 달라요. 우리의 미술은 정신을 담아내는 것이라고 저는 얘기해요. 악귀를 물리친다고 알려진 달마도도 누가 그렸느냐가 중요하듯, 기운이에요. 작가가 가져야할 책임감은 거기에 있어요.
자르고 용접하고 깎고 치고 레이징하는 모든 작업이 가능한 공구들은 20년이 넘게 하나씩 모아온 '작동' 가능한 사물들이다.
가장 아끼는 사물은 무언가요? 허명욱이라는 사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물 말이에요.
모두요. 그럼에도 단 하나를 꼽으라면, 제가 사용하는 공구겠죠. 저는 공구에 집착해요. 제 손에 익은 붓부터 시작해 망치라든가, 아끼는 사물들은 항상 가지런히 놔둬요.
미술계 안에서 성취하려는 바가 있다면요.
어느 순간 없어졌어요. 제 마음 속에 욕심조차 덜어가는 작업이 되고 있어요. 저는 미술사에 속속을 잘 알지 못해요. 그저 제 작품을 걸고 그 집, 공간의 온도가 달라졌다는 평을 받고 싶어요. 개개인의 집에서 제 온도를 찾아나가는 작가라고요.
작가는 경험을 이끌어내는 작업으로부터 세상을 연결한다. 허명욱을 꼭 닮은 소년 상은 '누군가'의 유년이기도 하다.
허명욱
MYOUNG-WOOK HUH
1966년생 진주 출생.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금속공예학과를 졸업했다. 중학교 때부터 자신의 경제를 책임져온 작가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으나 홀로 서는 삶을 일찍이 선택했다. 회화, 설치, 비디오 등 다양한 장르는 '수집된 시간'이라는 주제를 통해 확장되어왔다.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해온 옻칠은 작가의 '시간성'에 대한 사유를 숙성시키는 가장 이상적인 표현 매체다. 옻이라는 천연 재료의 특수성이 낳은 특유의 ‘간색’은 채도가 높은데, 작가는 캔버스뿐 아니라 자체 제작한 금속 화판 위에 오랜 시간을 두고 각각의 다양한 색들을 중첩시키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 중첩된 흔적은 화면 위 양분화된 영역들을 가로지는 경계에서 가시화되고 관람객으로 하여금 시간의 무게를 경험케 한다. 허명욱은 외연적인 에너지의 표출보다는 자기 정화를 위한 수행의 태도라 할 만큼 수십 개의 다른 색깔을 같은 자리에 켜켜이 올림으로써, 사물의 현상적 측면이 아닌 본질을 보는 시선에 접근한 작가의 독창적 회화 표현을 보여준다. www.instagram.com/huhmyoungwook
매거진 <아트마인>에 게재된 기사의 모든 사진과 영상, 텍스트는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되는 아트마이닝㈜의 저작물입니다.
사전 동의 및 출처 표기 없는 무단 복제 및 전재를 금합니다.
작품 이미지 및 동영상 © 허명욱 – ARTMINING, SEOUL, 2018
PHOTO © ARTMINING – magazine ARTMINE / 박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