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은 희망과 우울, 차가움과 뜨거움, 상반되는 개념을 상징한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세상이 보이고 그 세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순간이 행복하다.”
_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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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휴대폰을 응시한 채 침대에 엎드려 조목조목 이야기를 풀어놓는 젊은 작가가 있다. “오늘은 작가들이 미술계에서 일할 때 가장 피해야 할 유형에 대해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유명 아이돌의 소위 ‘눕방’이 연상되는 동영상의 주인공은 자신 만의 피그먼트로 추상화 드로잉을 선보이는 회화 작가 최승윤이다. 리포트 같은 막힘 없는 언변으로 미술계에서 작가로 살아가며 겪고 부딪힌 ‘현실’을 전달하는 VJ가 영상 속에 있다. “예술가들은 아직 계약서를 쓰지 않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중략) 예술가들은 어떻게 보면 법의 사각지대에 있기 때문에···.”

비어있는 캔버스를 한참 동안 응시한다. 내적으로 충분한 대화가 끝나면 그제야 물감을 들고 한 호흡에 그림을 그려나간다.
비어있는 캔버스를 한참 동안 응시한다. 내적으로 충분한 대화가 끝나면 그제야 물감을 들고 한 호흡에 그림을 그려나간다.

최승윤은 동영상과 미디어 환경에 익숙한 오늘날 유튜브 시대’, 이를 자신의 철학과 작품을 알리는 적극적인 채널로 활용하는 작가다. 유튜브 채널 최승윤 작가Artist Chois seungyoon’를 운영하며 개인 채널을 통해 미술계와 작품 활동 전반에 관한 담론들을 전한다.내가 컬렉터 관리를 잘 하지 않(못하)는 이유’, ‘창작자는 작은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림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등 콘텐츠도 다양하다. 신작이 완성되면 자신의 의도와 함께 영상에 담아 소개하고, 총결산형태로 2018년 판매작을 소개하는, 작가로서는 쉽게 시도하기 힘든 신선한 형태의 콘텐츠를 올리기도 한다. 800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그의 채널에는 댓글창의 소통 또한 활발하다. 작품을 전시장에서만 감상하는 시대가 저물고 아티스트가 직접 작업 과정을 보여주며 작품을 독자와 실시간 완성해가는, 예술계에도 유튜브 갤러리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 하겠다.
스스로를 일컬어 한번도 국공립 미술기관의 후원을 받아본 적 없는 마이너라 부르지만, 최승윤은 서른의 강을 항해 중인 동시대 작가 가운데 누구보다 왕성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특히 지난 1~2년 간의 행보는 괄목할 만하다. 영은미술관창작스튜디오 9기 입주작가를 거쳐 2017 겸재 내일의 작가 선정, 2018년에는 아트부산, 아시아호텔아트페어, 홍콩 아시아 컨템퍼러리아트쇼(Asia Contemporary Art Show), 말레이시아 아트 엑스포 플러스(ART EXPO PLUS), 20여 차례 국내외 전시를 소화했다. 기업의 러브콜도 꾸준하다. 삼성 TV와의 ‘THE FRAME’ 콜라보레이션(2017) ,필립 모리스 아이코스와의 협업(2018) 등 작품에서 느껴지는 강인한 생명력과 에너지를 원하는 기업들이 많다. 흰 캔버스에 즉발적으로 물감을 흘려 드로잉을 마친 뒤, 주걱, 와이퍼 같은 비예술적도구로 다양한 선과 색의 레이어를 더해 완성한 그림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포한 추상적인 이미지로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삶의 단면과 다른 차원의 세상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아트마인>의 2019년 첫 인터뷰이로 소개하기 충분한, 폭발적인 에너지’가 그림 속에 담겨 있다.


 

정지의 시작 2018-12, oil on canvas, 194x259cm, 2018
정지의 시작 2018-12, oil on canvas, 194x259cm, 2018
화려함의 단면 2017-5, oil on canvas, 162x130cm, 2017
화려함의 단면 2017-5, oil on canvas, 162x130cm, 2017
순간의 단면 2017-61, oil on canvas, 227x182cm. 2017
순간의 단면 2017-61, oil on canvas, 227x182cm. 2017

한번에 이해하기 힘든 추상적인 이미지들을 그려오고 있어요. ‘시작과 끝’ ‘뜨겁고 차갑다’ 같은 세상의 양면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인상적이에요.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은 어느 정도의 한계선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험 점수에서 67점과 71점은 거의 비슷한 실력이지만, ‘70점’이라는 커트라인을 설정해야 분류가 되는 것처럼요. 어디까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고, 제 안에도 ‘경계’에 대한 다툼들이 많아요. 그런 요소들이 작업의 기본이 되고 있어요. 제가 바라본 세상을 저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정지의 시작’ ‘반대의 법칙’과 같은 시리즈는 그 같은 양면성이 잘 드러난 작품들이라고 봐도 될까요?
숨을 들이 마시면 내쉬고 심장이 수축하면 팽창하는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은 양면성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처음 생명이 태어날 때 세포분열을 하면 두 개로 나눠져요. 하지만, 다시 분열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분열이 되었다는 것이 보이지 않고 마치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처럼 보이게 되요. 이분법적으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나눠진 것들이 입체적 세상, 복잡다변한 차원을 만드는 거에요.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를 캔버스 안에 담아내고 있어요.

역설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에 대해 질문하는 작품들이 탄생한 건 언제부터였나요?
그림에서 품어져 나오는 근본적인 에너지란 무엇일까  고민해오다 이것을 ‘자석’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어요. N극과 S극이라는 역설적인 존재가 한 몸에 자리하는데, 서로 강하게 끌어당기는 존재로서 정 반대 지점에 있죠. 사람도 자신 안에 반대되는 성질들을 지녀야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고요. 그 자석처럼 그림 안에 반대성을 넣고 싶었어요. 파란색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역설의 색'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흔히 빨간색이 뜨거운 컬러라고 생각하고 파란색이 그 반대 지점의 색이라 생각하는데, 사실 불에서 가장 온도가 높은 부분이 ‘파란색’이거든요. 특히 ‘정지의 시작’ 시리즈는 움직임의 역설을 표현했습니다. ‘순간의 단면’ 시리즈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역설, ‘자유의 법칙’에는 자유에 대한 역설, 그러한 것들을 담아야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에너지 넘치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하지만 처음에는 구상 작업을 했다고요.
자연스럽게 넘어온 것 같아요. 머릿속에 계획한 데로 그림을 그리다보면 제 안에서 기존의 틀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더라고요. 처음에는 ‘구상과 추상, 반대가 만나면 합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절충하는 작업들을 하다보니 어느 순간 추상화를 그리고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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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적인 측면에서도 새로운 것들이 보여요. 붓과 같은 정직한 도구가 아니라 스티로폼이나 룰러 같은 것을 쓰고요.
붓으로만 그림을 그리면 터치에 제약이 따르는 것 같더라고요. 작품이 원하는 느낌들을 그때그때 제공할 수 있는 다양한 소품들을 선택해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어요.  여러 가지 도구 연구를 통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을 많이 발견했어요. 독특한 소재를 사용하는 작가라는 프레임 안에서 이해되는 부분도 있더라고요. 와이퍼, 쓰레받기, 고무주걱, 스티로폼, 방석 등 의외적인 소재들을 스무 가지 정도 사용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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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아트센터 순수의 ‘젊은 작가 4인전’을 시작으로 10여 년간 작가로 활동해오고 있는데, 작업의 터닝포인트가 됐던 전시를 꼽는다면요?
영은 미술관 창작스튜디오 9기 입주작가(201-2014)로 들어가 5개월 정도 활동하며 열었던 개인전이 기억에 남아요. 공모전 낙방을 경험하며 많이 좌절하던 시기, 영은 미술관에서 지금 작업하는 시리즈의 근간을 본격적으로 마련할 수 있었죠. 당시 창작스튜디오에서 함께 생활하던 채성필 작가, 강형구 작가님을 곁에서 지켜보며 많은 걸 배울 수 있었고요.  제 작품을 누군가 소장한다는 것 또한 작가로서 버틸 수 있는 큰 지지대가 되는 같아요. ‘잘못된 길을 걸어오지는 않았구나’ ‘틀린 길을 가는 게 아니구나’ 스스로 다독이곤 하죠.

예술작품을 라이프스타일 공간을 디자인하는 하나의 ‘리빙 아트’ 소품으로 대하는 새로운 트렌드가 형성되고 있어요. 최승윤 작가의 작품을 소장한 분들의 취향은 어떨까요?
저와 같은 ‘비주류’, 작품을 감상하는 데 소수의 취향을 지닌 분들이 아닐까. 소장처로는 영은 미술관, 휴맥스, PAT 등을 들 수 있지만 사실 어떤 분들이 소장했는지 거의 알지 못해요.

‘전시’를 열지 않으면 작품을 알릴 기회가 없던 예전과 달리, 요즘 작가들은 다양한 채널을 활용할 수 있게 됐어요. 작가로서 실제 체감하는 변화들이 궁금합니다.
연락이 오더라도 개인적으로는 잘 안 팔아요. 될 수 있으면 갤러리나 아트 판매 사이트 같은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구매할 것을 권유합니다. 저는 ‘아트마이닝’ 처럼 중간에 작가와 컬렉터 간 중재하는 분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중간자에 의해 작가가 작업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고요. 작가, 갤러리, 컬렉터, 전시 기획자 등 여러 목적의 사람들이 ‘아트’라는 공통분야 안에서 순환하기를 바라요. 요즘 시대가 아니면 활동이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젊은 추상화 작가의 작품이 판매된다는 것이 예전에는 현실적으로 힘들었다면,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되어 있다 보니 젊은 분들에게도 많이 소개되고 어필할 수 있게 된 거죠. 제 작품을 구매하는 분들은 기존 컬렉터가 아니라, 일반 젊은 분들이 많아요. 부유한 일부 계층의 취미 정도로 여기던 것이 아트 컬렉팅이었는데 지금은 그 저변이 많이 확대 됐으니까요.

지난 소노아트 '101가지 개성' 전에서 판매한 작품 가운데 2점은 작가가 직접 '구매'했다. 반려견의 이름을 딴 '쿠쿠'와 스스로를 닮아 '최승윤 작가'라 이름붙인 소품 두 점
지난 소노아트 '101가지 개성' 전에서 판매한 작품 가운데 2점은 작가가 직접 '구매'했다. 반려견의 이름을 딴 '쿠쿠'와 스스로를 닮아 '최승윤 작가'라 이름붙인 소품 두 점
최승윤 작가의 드로잉 모티프로 제작한 에코백
최승윤 작가의 드로잉 모티프로 제작한 에코백
쓰레받기, 와이퍼, 고무주걱 등 '일상적' 소품들
쓰레받기, 와이퍼, 고무주걱 등 '일상적' 소품들

보는 이들에 따라서는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시리즈 작품들도 많아요. 자칫 이미지가 과잉 소비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
우리는 모두 다르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비슷해 보이고,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죠.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다룬 전시가 이번에 끝낸 ‘101가지 개성’ 전이었어요. 1호 캔버스 101점에 파란 주걱으로 넓은 선을 그어 언뜻 보면 모두 동일한 이미지처럼 보이도록 작업했어요. 그리고 작품에 아무런 제목도 붙이지 않았죠. 복제한 듯한 1호 사이즈 101점을 놓고, 대중들은 한참을 바라보며 작품들을 모두 다르게 생각하더라는 거죠. 같은 듯 하지만 막상 받아들이는 느낌은 모두 다르니까요. 이미지가 소비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산하고, 스스로 더 많은 것들을 창작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전시에서 판매되지 않은 작품을 폐기한 영상이 화제가 됐어요.
이름을 갖지 못한 56점의 작품들은 제 손으로 찢어서 폐기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담았어요. 전체적으로 반려동물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분양’ 한다는 표현을 썼죠. 품종이 개발된 동물들이 주인을 기다리다가 어느 정도 기한 내에 이름을 지어주는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폐사되는 현실을 반영했습니다. 전시 제목도 ‘101마리 달마시안’에서 착안했고요. 제가 운영하는 유투브 채널에 폐기 영상과 그 과정을 택한 이유를 담았어요.

정지의 시작 2018-31, oil on canvas, 162x130cm, 2018
정지의 시작 2018-31, oil on canvas, 162x130cm, 2018

다양한 컬러 조합을 통해 에너지, 힘이 느껴지는 작업을 해오고 있어요. 그 중 파란색으로 그린 그림에 대한 호응이  높은데요.
파란색의 모든 것의 근간이 되는 색이에요. 하늘도 파랗고 물도 파란 이유는 파란색의 스펙트럼이 가장 넓은 색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물감도 파란색이 가장 저렴해요. 제가 역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파란색은 이를 표현하는 최적의 컬러에요. 우리는 빨간색을 보고 뜨거운 불을 떠올리지만, 사실 불의 가장 뜨거운 부분은 ‘파란색’이죠. 금색도 연구를 많이 한 색상이에요. 금색이라는 것은 색이 아니라 ‘빛나는 광택과 질감에서 발현되는 것’이죠. 유화로는 흩뿌리듯 작업하는 드로잉 작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금색을 구현할 수 있는 양감의 물감을 제작하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됐죠.

작업의 모티프나 영감은 주로 어디에서 얻나요?
가만히 있으면 고민할 것들이 많잖아요. ‘왜 이렇게 속이 안 좋은가’ ‘왜 이렇게 일어나기가 싫은가’ 하는 것들.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작업과 이어지는 것 같아요.

현재 교류하는 해외 갤러리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2016년 사치 아트에 작품을 등록하고 프로모션을 해오다가 어느 순간 작품 관리가 잘 되지 않는것을 느끼고 지금은 다른 해외 갤러리들로 활로를 옮겼어요. 영국의 99 Limited Edition(www.99limitededitions.com), 미국에는 Art Acacia Gallery(www.artacacia.com)가 있어요.

2019년 새해가 밝았어요. 10년 뒤의 최승윤 작가는 어떤 모습일까요?
맑은 정신을 지닌 작가가 되고 싶어요. 나이가 들수록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체력이 떨어지면 머리도 잘 안 돌아가고 생각이라는 것이 나이가 들수록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어떤 생각하고 어떤 위치쯤에 있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맑은 정신의 작가가 되고 싶어요.


 

박나리 (매거진 <아트마인> 콘텐츠 디렉터)
영상 황승헌(매거진 <아트마인> 비디오 매니저)
사진 김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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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미지 © 최승윤 – ARTMINING, SEOUL, 2019
PHOTO © ARTMINING – magazine ARTMINE / 김동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