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되면 저마다의 DNA에 깃든 형태를 깨워내는 자연물처럼, 금속으로부터 태어난 것의 감각을 지니고 있는 신혜정의 금속 작업을 조각작업(sculptural works)이라 말한 레너드 어소에 동의한다. 시적인 자연의 다채로운 모습을 재구성 해내온 작가는, 매우 냉정한 속성을 지닌 금속을 따뜻하고 깊은 통찰로 매만져 아름답게 사물화 해내는 상상력이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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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랜 시간 자연으로부터 내 작품의 모티프를 찾아 왔다. 이른 봄 어느 날 산책하며 거닌 한강에서, 한 여름 발 담근 몽돌 해변에서, 늦가을 지나쳐간 담벼락에서, 그저 한적함과 바람의 스침, 그리고 고요함 속에 흩어져 있는 것들을 마주친다. 무엇을 만든다는 집착을 버리면 나의 작품은 ‘마주침’이 된다. 길을 거닐다, 무심히 허리를 굽혀 주워 든 나뭇가지처럼 그 표면에 얇게 묻어 나오는 흙 냄새가 작업이 되고, 바닷가에서 아들이 쥐어 준 몽돌의 따스함에 귀를 기울이면 멀리서 다가서는 파도의 메아리가 작품이 된다.”  _신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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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물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해온 작가에게 주변 사람들이 '선물'로 준 것들이다. 이 소소한 선물들의 '의미'를 가벼이 다루지 않는 작가는 '레진'을 결합해 새로운 작업의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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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정이 지향하는 '자연스러움'이라는 아름다움의 지점을 보여주는 증거물들이다.

“미술작품의 주제로서 흔하디 흔한 클리셰(Cliché)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자연”을 주제로 삼지만, 신혜정의 작품은 인간이 만든 어떤 사물과도 차별되는 구조를 가진 자연물처럼, 독창적이다.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반복하는 세상 낱낱의 존재들에 눈을 맞추고 관찰하는 사람, 아무도 탐내지 않는 사소한 자연물들을 주워와 간직하며 환희를 느끼는 사람, 온전히 태초의 뼈대로 남은 겨울 가지에서 새봄을 준비하는 에너지를 발견하고 감탄하는 사람, 신혜정. 작가는 바위 안에 잠들어 있는 형상을 깨뜨려 찾아내는 조각가와 같이 금속을 매만져 식물의 다채로운 이미지를 포착해낸다.
바람을 따라 낙하하는 순간이 그려지는 가을 잎사귀, 파도의 운동에 조응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몽돌과 같은 작품은 사물화된 형태를 넘어서 공명하는 감각을 일으켜 우리가 꿈꾸는 ‘대자연’으로 데려가는 문을 열어주는 버튼처럼 작동한다. 나는 그의 작품을 보며 한 시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래 맞아, 시인이 되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어/ 안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해서였어/ 맞아, 느끼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어/ 눈으로 생각도 하고 심장으로 보기도 한다고.” 작가는 화려하지도 않고 매혹적이지도 않은 자연물이 지닌 욕심 없는 고상함에 이끌린다. 삶의 언저리에 말없이 놓여있는 것들에서 편안함을 발견한다. 그것에 시간을 더하는 일이 자신의 금속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본연의 자연과 조우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잖아요. 우리들 대부분은 현실의 삶 속에서 결핍된 무엇인가를 자연이 채워주고 회복시켜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신뢰를 갖고 있지요. 인간과 자연은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인과 관계에 있고, 자연과 소통할 수 있을 때 삶 속에서 겪는 상실감을 치유하고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해방감을 경험할 수 있어요. 어떤 지역과 문화의 경계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깊고 신비한 아름다움을 지닌 인류의 언어인 자연은 가장 매력적인 예술표현의 소재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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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4 크기의 종이에 올려진 재료들은 각각의 작품으로 만들어질 것들이다. 작가는 다음 작업들을 미리 준비해두고 '시간'을 기다린다. 

잘 정돈된 작업실에 들어서니 아침 빛이 내려앉은 세공책상부터 보였다. 한 눈에도 물건이다 싶은 그 책상은 중고로 구입해 오래 사용하던 것이다. 값 싼 중국산 합판으로 제작된 요즘 것과 다르게 전통 방식의 원목 짜맞춤으로 만들어져 평생 써도 될 만큼 튼튼한 책상, 제 손에 잘 맞는 형태로 자루를 직접 깎아 만든 체이싱 망치, 금속판을 두드려 정교한 문양이나 입체감을 표현하는데 사용하는 돋을새김정 한 통, 금속판을 고정해 작업하는 감탕그릇, 단조 판금 작업을 하는 모루가 주된 ‘작업살림’인 신혜정의 공간. 교수실 한 켠에 꾸려놓은 소박한 작업 공간에서 강의가 없는 날이면 일정한 리듬으로 탁탁탁탁 떨어져 쌓이는 망치질로 종일 새김질을 한다. “도구가 너무 많거나 화려하면 도리어 작업이 되지 않는다”고 얘기하는 작가의 작품이 풍기는 명상적인 인상은 작업의 태도와 결이 같다.

Installration, 2014. Mixed Media. 가변설치.
Installration, 2014. Mixed Media. 가변설치.
Installation, 2018. Mixed Media. 가변설치.
Installation, 2018. Mixed Media. 가변설치.

미국과 한국의 다른 자연에 대한 경험이 작품의 방향을 달라지게 이끌었다고요.
2012년 귀국 이후 미국에서와는 다르게 한국에서는 ‘대자연’을 경험하려면 의도적으로 찾아가야 했어요. 이제는 좀 더 소소한 제 주변의 흩어진 자연을 다시 모으는 작업을 해요. 가깝게는 집 앞 뜰이나 작업실 주변 화단과 같은 장소에서 발견한 아주 소소한 자연을 표현하는 작업을 최근에는 집중적으로 하고 있어요.

로체스터공과대학 주얼리디자인&금속공예 석사 과정에서 만난 스승, 레너드 어소(Leonard Urso)로부터 받은 특별한 훈련이 금속작업에 새로운 시각을 틔워주었다고요.
1년간 1:1 수업 방식으로 감성을 푸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했어요. 브리스톨 마운틴(Bristol Mountain)과 같은 대자연 속에서 산행하며 자연을 관찰하는 방법이었죠. 색을 보고 소리를 듣는 훈련, 금속공예 스튜디오 작업보다는 주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요. 처음에는 의아했는데, 과정 이후 학기 끝에는 작품들이 폭발하듯 나왔어요. 특별히 작품 주제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들 제가 만든 자연물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더군요. 언어가 필요 없어진 순간을 경험한 저릿한 순간이었어요! 교수님이 제게 주로 전수한 체이싱과 헤머링 기법도 자연을 표현하기에 너무나 용이했고요. 모든 조건이 딱 맞아 떨어졌죠. 자연을 대상화하는 작업을 하지만, 미국과 한국에서의 스타일은 눈에 띄게 나뉘어요. 미국에서의 것은 스케일이 크고 시원시원하다면, 한국에서의 작업은 디테일하고 아기자기해요. 빠르면 5년 혹은 10년 안에는 다시 한번 색깔이 다른 자연을 충족해야겠다는 필요를 느껴요. 아티스트 레지던시도 고려하고 있어요.

작가의 내면 깊이에 머물던 감각을 이끌어 낸 시간이었네요.
제 작업물의 형태를 보고 한번은 동양의 서예 사진을 가져와서는 “혜정의 오리지널리티를 발견했어. 정적이고 시적인 감성들이 여기에 모여있네” 얘기하셨어요. 유년기부터 오랜 시간 동양화와 서예를 했던 제게 내제된 감각을 발견해 내시더군요. 현재 저도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항상 그 분의 티칭 스킬을 곱씹어요. 못하는 부분을 지적하기보다 학생 개개인에 부합하는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방법을요.

작가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요?
자연스러움. 자연스러운 속에서 그것만의 독창성이 깃들면 무엇과도 비교 불가한 아름다움이 발현되지요.

흙의 냄새 Ⅰ,Ⅱ,Ⅲ,Ⅳ,Ⅴ. 2018. Sterling Silver, Natural Object. 55 x 112 x 15, 85 x 180 x 30, 30 x 206 x 30, 60 x 203 x 28, 110 x 160x 28 mm.
흙의 냄새 Ⅰ,Ⅱ,Ⅲ,Ⅳ,Ⅴ. 2018. Sterling Silver, Natural Object. 55 x 112 x 15, 85 x 180 x 30, 30 x 206 x 30, 60 x 203 x 28, 110 x 160x 28 mm.

“신혜정의 작업은 공간 안에서 입체적인 붓글씨의 형태처럼 규칙적이고 우아하게 움직인다. 손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품의 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신혜정은 재료와 도구의 고유한 특성을 이해하는 능숙한 공예가이다. ……그녀의 눈은 때로 사람들이 간과한 것들을 본다.” _ Leonard A. Urso

새로움: 흩어진 것들의 재구성 Ⅰ,Ⅱ,Ⅲ,Ⅳ. 2018. Sterling Silver, Natural Object, Resin. 110 x 140 x 38, 72 x 160 x 36, 95 x 150 x 36, 98 x 150 x 39 mm.
새로움: 흩어진 것들의 재구성 Ⅰ,Ⅱ,Ⅲ,Ⅳ. 2018. Sterling Silver, Natural Object, Resin. 110 x 140 x 38, 72 x 160 x 36, 95 x 150 x 36, 98 x 150 x 39 mm.

자연물은 어떤 계획 하에 채집하나요?
걷다가도 눈에 띄는 것들을 일단 채집해요. 몽돌 작업은 남해에 갔을 때 영향 받았는데, 자연에 적극적으로 다가갈 시간적인 여유가 없기 때문에 틈만 나면 어떻게든지 경험으로서라도 채집을 이어가요. 남편 작업실인 경기도 광주 옆에 위치한 용인자연휴양림에 가끔 가서 자연 탈락된 아주 긴 나뭇가지들을 주워 오기도 하고, 출장으로 방문한 중국에서도 습관적으로 비닐봉지를 준비해 다니며 채집해온 것들이 한가득 있어요. 다음 작업이 될 준비물들이에요.

채집 이후 자연물들에서 작가가 발견하고 취하는 특징들의 아카이브가 궁금해지네요.
주로 가을에 나오는 자연물을 좋아해요. 황량하고 메마른 모습이라고 연상하기 마련인 가을과 겨울의 나뭇가지를 깊이 들여다보면 다음 봄을 준비하는 식물 특유의 윤기 머금은 에너지가 있어요. 겨울을 나기 위해 몸을 웅크리지만, 초라하지 않죠. 그런 모습이 너무 예뻐요. 사람들은 제가 ‘가을’을 표현한다고 하면 쓸쓸하다고 말하는데, 사실 제 이야기 주제는 그 안에 내제된 힘이거든요. 자연물을 관찰할수록 기막힌 규칙성도 발견하게 돼요. 오른쪽 싹이 나면 다음엔 왼쪽, 다시 오른쪽 왼쪽, 간격도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해서 가끔은 무섭기도 해요. 볼수록 신기한 대상이지요.

대자연을 마주하기 힘든 일상에서 작가는 틈틈이 주변을 산책하며 소소한 자연을 탐색한다.
대자연을 마주하기 힘든 일상에서 작가는 틈틈이 주변을 산책하며 소소한 자연을 탐색한다.

자연물에 응축된 에너지를 재발견하고 작가의 해석을 더하는 작업은 어떤 과정으로 전개되나요?
자연물을 충분히 느끼고 나면 제 작업실로 끌고 와 한동한 관찰해요. 2~3개월 간 두고 자연 건조되는 자연물에서 드러나는 느낌을 봅니다. 껍질이 벗겨질 때의 모습이나 수분이 날아가 마른 후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잎맥 등을 보노라면 무한한 상상력이 솟아나요. 거기에 어떠한 기법을 적용할지 계획을 세우고 금속 판 성형 작업을 하면서 자연물을 수술해요. 오른 팔도 자르고 왼쪽 다리도 자르고 구획화를 통해 1차 성형한 자연물을 모사하듯 작업에 들어가요. 헤머링으로 금속을 다루면서 처음 계획한 바와 다르게 형태에 변화가 생겨도 억지로 되돌리기 보다 제2의 모델로 진화시켜 마구 표현하는 과정이 중요해요. 그때부터는 재즈 뮤지션이 재즈를 하듯 작업해야 해요. 클래식이 아니라 즉흥 연주하듯 막 움직이면서 집중적으로 몰입해야 하죠. 이른 아침 시작해 늦은 새벽까지 몰아치듯 한번에 작업하고 나서는 일단 덮고 집에 가요. 다음 날 다시 냉정한 시선으로 보고 지나치다 싶으면 재조정 하는 과정을 반복해요.

작업에 주요한 소재는 정은이에요.
사실 소재에 대한 흥미로움은 적동 쪽이 더 커요. 텍스처를 내기도 용이하고 컬러 베리에이션도 훨씬 폭넓죠. 작업 자체도 다이내믹하고요. 하지만 작가 활동을 하면서 작품을 판매하거나 아트페어에 참가하는 등 조금씩 진보된 활동들을 통해 요구 받는 사항들이 늘어났고, 정은을 선택하게 되었어요. 정은이 가진 매력은, 무한한 공간으로 이동시켜 주는 느낌이에요. 복잡한 생각을 정은이라는 소재가 정리해준다고 할까요. 색깔이 배제되어 있으나, 아주 영롱하게 한 꺼풀 베일을 씌운 듯 명상적인 색감으로 형태를 감싸줘요. 어떠한 서사도 더해지지 않은 백지의 여백처럼 무한한 느낌을 지니고 있어요.

채색 없이도 충만함을 줘요.
항상 색이 고민이죠. 장신구는 장식성이라는 부분을 가져야만 하니까요. 제 작품은 가장 큰 무기 중에 하나를 안 갖고 있는 것과 같아요. 제가 일부러 선택하지 않았지만.

맨몸으로 싸우는 거네요. 오롯이, 용감하게.
하하하. 늘 고민해요. 타 재료가 대세인 현대 장신구 계에서 지극히 전통적인 금속, 어떻게 보면 지루할 수도 있는 재료를 사용해 제 것으로 표현해갈 방향은 무엇인지에 대해서요. 사람들이 선호할는지, 내가 한 선택이 온전이 장점이 되는지 역시도. 하지만 저는 일단 색채 표현보다는 금속으로 다루는 과정을 스스로 너무 즐기기에 일부러 노력해서 다른 부분을 성취할 필요는 없겠다고 판단하고 제 표현에 집중하기로 했어요. 작가들마다 다 자기 재주가 다르니까.

‘타자의 자연’ 시리즈에서는 레진이라는 새로운 재료를 들였어요.
주변 사람들이 제게 자꾸 자연물을 가져다 줘요. (큰 웃음) 타자의 시선으로 채집한 것들에 이야기를 담아낼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다가, 레진을 씌워 굳히는 방식으로 재탄생 시켜서 그것을 준 사람에게 다시 보여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기대보다 많이 좋아해주더라고요. 레진을 두 번 씌우는데, 핫도그를 기름에 튀기듯이 레진 물에 넣었다가 말린 후 2차 작업을 해요.

만지고 착용해도 문제 없는 정도의 굳기가 되나요?
아주 얇은 가지는 부러지기도 해요. 식물을 다루는 작업 자체가 생과 사의 모든 과정으로서 하나의 히스토리이니, 잎사귀 하나가 떨어지는 부분도 제 작업의 테마(theme)이라고 생각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존재하는 그 자체는 별로 재미 없잖아요. 실제 장신구로 착용하고 사용하다가 가지나 잎이 하나씩 떨어져가는 부분도 저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자유롭게 표현해요.

몽돌, 파도의 소리Ⅰ. 2018. Sterling Silver. 168 x 190 x 123 mm.
몽돌, 파도의 소리Ⅰ. 2018. Sterling Silver. 168 x 190 x 123 mm.

주요한 재료인 정은은 어떤 서사가 더해지지 않은 백지의 여백처럼 무한함을 느끼게 한다. 간결함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은 사실 어렵지만, 어쩌면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와그락 와그락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몽돌’과 같은 작품은 재료가 가진 예민한 성질과 다르게 덩어리의 에너지가 주는 터프함이 있어요. 순백의 정은이 가진 정체된 색채는 몽돌을 ‘꿈꾸는 돌’처럼 명상적인 인상으로 잔상을 남기고요. 상반된 감성을 어울러내는 작업은 어떤 지점에서 표현이 극대화되나요?
대게 금속 공예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작업 과정을 계획하고 움직이는 반면 저는 즉흥적이에요. 저는 주저주저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자연물을 채집할 때도 10L 봉투에 한 가득 모아와 풀어놓죠. 3개월 즈음 방치하듯 관찰하는 기간을 거친 후 작업을 한번 시작하면 한 달에 30개도 완성해요. 제 손이 빠르다고들 하는데, 그보다는 적합한 기법을 고민하느라 주저하기 보다는 큰 계획을 잡고 러프 스케치 후 작업하는데, 일단 망치로 쳐서 형태가 이상하면 거기에 맞게 방향을 바꿔가며 작업해요. 동료 작가 중 한 분은 제 작업을 보고 도자 작가가 떡 주무르듯 한다고 표현하더라고요.

정말 그래요. 예쁘게 모양내어 잘 빚은 만두처럼 손으로 빚어놓은 듯한 자연스러움이 있어요.
과정 속에서 형태가 변화하기도 할 때는 스케치를 버리고 작업물과 저 사이의 대화를 시작해요. 언제든 변해도 괜찮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지점이 바로 제 작업에 큰 포인트라고 생각해요. 많은 작가들이 자연을 모사하나, 각자의 표현방식으로 만들어내는데, 제 작품에 대하여 받는 크리틱에서 가장 최고의 말은 ‘시적 감성’과 ‘우아한 형태로 자연스럽게 뻗어있는 형태’ 이거든요. 그러한 결과가 주로 나오는 이유를 되짚어보면, 작업 과정에서의 ‘대화’ 때문이라고 보여요. 원래 오른쪽으로 뻗기로 계획한 가지가, 왼쪽이 더 적합하다고 얘기하면 저는 바로 틀거든요. 거기에서부터 다시 형태를 조화롭게 이루면서 가는 과정이 저만의 표현방법이 아닌가 생각해요.

옷깃이나 앞 가슴에 핀으로 고정하는 장신구, 즉 ‘브로치’로 표현된 작업의 비중이 팔 할입니다. 목걸이, 반지, 귀걸이와 같이 피부에 직접 닿는 착용의 지점에서 한 걸음 물어나 있는 태도로 보이기도 하는데요.
그보다는, 작가적 이기심인 것 같아요. (웃음) 상업 주얼리 디자이너 일이 아닌, 저하고 싶은 작업을 하겠다고 결심한 때부터, 누군가가 좋아해주고 안 좋아해주고는 2차적인 문제가 되었어요. 장식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나의 표현’에 제한이 생기니까 일단 제가 만들고 싶은 것을 하겠다고 한 대부분이 ‘오브제’의 성격을 가졌거든요. 일단 만든 오브제에 장식을 달려다 보니 브로치가 많아졌던 것이 솔직한 사실이에요. 그런데 이런 제 작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목걸이, 귀걸이, 반지도 요구하다 보니까 역으로 늘려가게 되었고요. 요즘에는 좀 더 접점을 찾으려고 해요. 2019 콜렉트를 비롯해 내년 4월 예정된 뉴욕 아트디자인박물관 MAD (Museum of Art & Design) 주최 ‘루트(LOOT)’ 와 같은 아트페어 참여 기회를 저 스스로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되는 접점을 만들자고 생각했어요.

예술 장신구(Art Jewelry)는 예술적인 장식성과 장신구로서의 착용 기능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작업입니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기능성에 더 초점을 두는 문화인데요.
미국과 한국의 완전히 다른 금속공예의 문화를 겪으며 고민도 많았어요. 긴 나뭇가지와 금속을 결합시킨다면, 미국에서 지도 교수님은 발레리나가 팔을 뻗는 것처럼 더 우아하게 길어져도 괜찮다고 얘기했던 반면, 한국에서는 더 길어지면 찔릴 위험이 있고 너무 날카롭다고 하거든요. 신혜정의 장신구는 착용하기 불편하다, 지나치게 예술적이라는 비판도 듣는데, 작가적 입장에서 위축되기도 해요. 또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예술성과 기능성의 ‘균형’을 이야기해줘야 하는 입장도 있고요. 충돌되는 고민들이 생겨난 어느 순간부터 개인적인 작업이 조금 불편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더더욱 재충전 시간에 대한 필요를 느껴요.

로체스터공과대학 대학원 졸업 후 미국에서 5년간 주얼리 디자이너로 일했어요. 상업에 대한 경험치를 갖고 있는 작가인데요.
2년 만에 디자인 팀장으로서 그룹을 이끌 만큼 성공적인 주얼리 디자이너 생활을 했어요. 그 경험을 통해 제가 나아갈 길을 정립하게 되었고요. 디자이너라는 직업도 충분히 가치 있지만, 타인의 취향에 맞춰지는 일보다는 제 것을 만들어야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죠. 한편으로는, 예술을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큰 틀의 성향과 취향을 잘 파악한다는 자신감도 얻었고요. 사실 손 잘 맞는 세일즈 맨과 미국에서 사업을 차릴 생각도 해봤지만, 제가 의미를 두는 삶의 형태를 헤아려보니 저는 가족과 함께 행복한 삶 쪽을 지향하는 사람이더군요. 당시 한국인 디자이너가 각광 받기 시작한 때였고, 실제적으로 10년만 집중하면 정상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기대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가족과 오래 상의한 끝에 귀국을 결심했어요. 가끔은 생각해요. 제게는 굉장한 선택이었으니까.

2019 collect_london
2016 solo exhibition 1

런던 사치갤러리에서 열린 2019 콜렉트에 참가한 신혜정은 오브제와 장신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신의 작품이 가진 예술적 가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장신구라는 기능적 가치는 모호해지고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 사물이 되는 작업들은, 낡고 오래된 사진 한 장에 축적된 시간의 흔적처럼 남겨진다.

2016년 갤러리 가인로에서 가진 개인전 <자연과의 대화>.

갤러리 이배에서 올해 가을 열린 초대 개인전 <환기>의 설치 작업. 자연으로부터 모티프를 가져오는 작가의 작업에 있어 원형질이 되는 마른 껍질, 나뭇가지 등과 함께 금속으로 만든 작품을 함께 인스톨레이션 하는 방식을 취했다.

2019 solo exhibition 4

가장 마음껏 펼쳐본 작업은 무언가요?
‘늦은 겨울 가지(Late Winter Branch)’, ‘봄 가지(Spring Branch)’와 같은 작업의 출발점이기도 한, 나뭇가지와 금속을 결합해 만든 ‘드로잉’들이요. 잘 보여드리지는 않아요. 저 혼자 좋아하죠. (웃음) 제 작업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조각가 남편은, 장신구 작업의 스트레스를 덜어내고 자유롭게 오브제로 풀어내보라는 조언을 하더군요. 조만간 오브제 전시를 한번 가져야겠다고 생각해요.

런던 사치갤러리에서 열린 2019 콜렉트 현장에서 가장 크게 느낀 바는 무언가요?
두 가지에요. 첫 번째는, 공예전반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현대공예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점. 어디를 둘러 봐도 한국관이 가장 독보적이었어요. 다만 홍보하고 유통하는 제반 시스템이 부족한데, 단기간에 이뤄지지는 않을 테니 공예가로서 저는 지금까지처럼 계속해가면 어느 루트든 보여질 기회가 많아지겠다고 생각했어요. 두 번째로 제가 주제 선택을 잘 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어요. 자연이라는 주제를 모두가 '말 없이'도 충분히 공감해줬거든요.

현재 갤러리 이배에서 진행 중인 초대 개인전 <환기>를 비롯해 다수의 그룹전 활동으로 분주하게 보냈어요.
보통 1년에 12~13개의 전시를 소화해왔는데, 이제는 조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보여요. 작년 갤러리 화인 <주위사물>과 아트스페이스 H <새로움, 자연의 재구성> 개인전부터 런던 콜렉트 참여 이후에도 많은 전시에 참여했는데, 앞으로는 다작보다는 완성도를 더 높인 마스터피스를 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저만의 숨 고르기를 위해 전시 기회를 단번에 끊을 수는 없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역량의 팔 할 정도만 하면서 이 방식대로 계속 가야 하는지는 정말 고민이에요.

서울문화재단 지원 전시로 선정되어 지난 10월 아트플레이스에서 개최한 <긴 호흡(Long Breath)> 전시는 작가가 가져온 고민들을 ‘주제’로 꺼내 다룬 기획전이라는 점에서 더 유의미해요. 작가를 포함하여 전시에 함께 참여한 다섯 작가 역시 자신의 삶 속에서 ‘분투’하며 작업해온 이들이고요. 기획의 글에서 밝힌 ‘끝까지 완주하려는 마라토너의 집념처럼 값지고 고귀한’ 태도에 대하여 화두를 던진 전시에요.
오래 교류해온 동료 작가인 주소원, 원재선, 그리고 기획자의 시선으로 관찰해온 ‘진지한 태도를 가진 젊은 작가’들인 이예지, 윤상지, 공새롬 작가가 함께했어요. 자기 PR 시대라고 시끄러운 요즘 세상에서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저력을 가진 이들과 함께 ‘끝까지 작가로서 버티며 작업해 나아가는 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어요. 부단히 밀어 나아가려면 호흡을 가다듬는 순간도 필요하다는 의미를 담아 <긴 호흡>을 주제로 세웠는데, 제가 생각하는 작가의 덕목은 작업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서 진지함을 갖추는 ‘태도’예요. 이번 전시에서 아쉬운 하나라면, 장신구를 선보이는 전형적인 방식의 지루함을 깨보려고 협업을 제안했던 한 설치미술가의 부재였죠. 작가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함께하지 못했지만 다음 번을 약속했어요. 2~3년에 한번씩 <긴 호흡> 전시를 끌고 가는 것이 제 바람이에요.

하얀 잎 1. 2016. Sterling Silver. 121 x 124 x 30 mm.
하얀 잎 1. 2016. Sterling Silver. 121 x 124 x 30 mm.

예술가들에게는 그들 각자의 개성적 미감이 있지만 긴 여정 속에서 비슷하게 경험하는 몇 가지가 있다. 예술가의 삶을 시작하던 시기는 열정과 새로움으로 풍성하다. 일상의 시간을 지나 그들 대부분은 지치고, 실망하며 좌절감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다 의외의 낯선 경험도 하고, 새로운 성취를 꿈꾸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들의 작품은 감각의 깊이를 더하고 인생의 이야기가 덧입혀져 멋스럽고 의미 있는 사물로 자리해간다. 그 과정은 자유로움과 풍요라기 보다는 두려움, 불안, 새로운 도전, 고독한 고립의 현실과의 투쟁에 가깝다. 주변을 돌아보면 같은 길을 걸어가던 이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외로운 걸음을 옮기는 것이 예술가의 여정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쩌면 천재의 재능도 놀라운 언변이나 찰나의 행운도 아닌 ‘긴 호흡’, 예술가의 오솔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긴 호흡일 것이다. _신혜정, ‘6인의 장신구 작가 전시, ‘긴 호흡’을 준비하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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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돌려가며 두들겨주는 망치질을 잘 할수록 ‘빛’ 표현과 텍스처가 달라진다.
천천히 돌려가며 두들겨주는 망치질을 잘 할수록 ‘빛’ 표현과 텍스처가 달라진다.
열을 가하면 찰흙처럼 변하고 식으면 딱딱하게 굳는 감탕은 송진에 토분을 섞은 것으로, 여기에 기물을 붙여 고정한 후 돋을새김 작업을 한다.
열을 가하면 찰흙처럼 변하고 식으면 딱딱하게 굳는 감탕은 송진에 토분을 섞은 것으로, 여기에 기물을 붙여 고정한 후 돋을새김 작업을 한다.

주로 사용하는 도구들을 직접 만들어 사용해왔어요. 15년간 손에 익은 체이싱 망치는 자루를 직접 깎아 만들고, 40여 개의 돋을새김정도 스승의 것을 참고해 직접 만들었다고요.
톱, 줄, 사포, 체이싱 망치, 정, 땜을 위한 토치가 제 도구의 전부에요. 아주 간소하게 도구를 사용하는 편이에요. 자연물로 머리가 꽉 차있는, 용량이 정해진 사람인지라 도구가 너무 많으면 정신이 산란해지고 도구가 너무 화려하면 작품 구현 과정이 지연되더라고요. 다양한 기법을 구사하는데 있어서 도구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망치로 텍스처를 내고 플래니싱도 하고 형태 성형도 가능하니까. 하지만 정은 형태에 따라서 다양하게 필요하기에 그때그때 추가로 만들어 사용하고요. 그냥 손이 모든 도구라고 생각하는 스타일이에요.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네요. 주로 사용하는 평면가공기법은 돋을새김이에요. 기법과 만들고 싶은 작업 중에 어느 쪽을 우선에 두었었나요?
만들고 싶은 것이 먼저였어요. 텍스처를 표현하려면 돋을새김이 필요했는데, 제가 이 기법을 아주 재미있어 하더라고요.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게 작업할 수 있어서 좋아요. 만약 제게 엄유진 작가와 같이 하라면 못할 거에요. 저와 정 반대에 있는 스타일인데, 너무 신기하고 대단해요. 그렇게 자신에게 맞는 기법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세계가 또 금속공예에요.

작가로서 본인 것을 만들지만 다른 사람 것을 보기도 해요. 어떤 작품에 매력을 느끼나요?
첫 번째는 독창성. 자기만의 분명한 색깔이 있는 작업. 두 번째는, 작가와 작품이 하나를 이루는 작업. 작가의 본질에서 비롯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작업이죠. 세 번째는, 조금은 진지한 작가. 작품의 성향에서도 드러나는데, 기법이 조금 서툴거나 다듬어지지 않았어도 순수성을 가진 작가들의 작업을 좋아해요.

작가의 예술 장신구를 소장한 컬렉터들은 어떤 성향을 가진 분들인가요?
착용하는 장신구이지만, 보는 그 자체로도 즐거움이 큰 예술 작품으로서 의미를 두고 소장해주시는 분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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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정 | HYE-JUNG SIN
1977년 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금속조형디자인과 및 동대학원 졸업 후 유학을 떠나 2006년 M.F.A 미국 로체스터공과대학 주얼리디자인&금속공예(Rochester Institute of Technology MetalCraft & Jewelry)를 전공했다. 졸업 후 미국에서 경험한 5년간의 상업 주얼리 디자이너로서의 생활은 도리어 ‘자기 작업’을 만들어가는 작가로서의 삶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바쁜 일상의 틈에서 벗어나 자연 안에서 자연을 관찰할 때 느끼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통해 창의적인 영감을 받는 작가는,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며, 금속이 지닌 고유한 속성에 주목해 명상적이고 관조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미국 Babara Heinrich Studio 좋은 디자인상, 최우수 창의적인 작업상, 미국 여성주얼리협회(WJA) 최우수학생수상, 미국 NICHE AWARD 패션주얼리 부분 대상, 한국공예대전 특선, 일본 이타미 주얼리 공모전 등에서 수상한바 있다. 2013-2014년 서울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신당창작아케이드 4, 5기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미국 로체스터공과대학 박물관,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폴란드 레그니차 미술관(The Gallery of Art in Legnica, Poland)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공예과 조교수를 겸임하고 있으며, 한 해에 10회가 넘는 전시에 참여하며 왕성한 작가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9 연희동 아트페어 공예특별전 및 서울문화재단 지원 전시 <긴 호흡>을 기획하고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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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미지 © 신혜정 – ARTMINING, SEOUL, 2019
PHOTO © ARTMINING – magazine ARTMINE /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