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구도와 절제된 조형미 안에 숨어있는 색조와 층층이 쌓인 구조의 향연이 관람자를 끌어당긴다. 그림의 잔상이 길게 남는 작품이다." _ 이 필 (미술평론가)

WRITE 장남미 (매거진 <아트마인> 콘텐츠 디렉터)  PHOTOGRAPH 이주연  VIDEO 황승헌 (매거진 <아트마인> 비디오 매니저)

완벽에 가까운 계획을 세우고 치밀하계 계산되고 통제된 과정과 정제된 감정으로 이루어지는 작업 과정은 작가의 내면 깊이 잠재된 이야기들을 꺼내 놓는 무의식의 작용과 함께 쌓아 올려지는 형상들이 ‘겹(layer)’을 이룬다.
완벽에 가까운 계획을 세우고 치밀하계 계산되고 통제된 과정과 정제된 감정으로 이루어지는 작업 과정은 작가의 내면 깊이 잠재된 이야기들을 꺼내 놓는 무의식의 작용과 함께 쌓아 올려지는 형상들이 ‘겹(layer)’을 이룬다.

구상작업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작가는 홍대 대학원시절 ‘오토마티즘(automatism)’에 매료되어 캔버스를 눕혀놓고 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붓질보다는 물감을 떨어뜨리고 흘려 속도와 각도, 밀도를 조율해가며 방향성을 만들어 형상을 빚는 형식도 그때부터 다져온 방식이다. 하지만 무의식에서 솟구쳐 오르는 이미지를 그대로 기록하는 자동기술법과, “모든 것을 제어하려는 일종의 강박적인 행위 속에서 다져진 작업”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마술 같은 공간과 같이 캔버스라는 프레임을 다루며, 매일 밤 꿈에서 다른 세계로 들어가듯 어디에도 없는 공간에서 조물주가 되는 홍수연. “터무니없는 꿈을 찾는 일종의 괴짜스러움은 작가가 이 시대에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믿는 작가는, 상상으로도 믿기 힘든 9.11 테러를 목도하며 뉴욕 생활을 접고 2002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바다에 빠지며 겪은 유년기의 호흡정지 사고처럼 “작업에는 삶의 경험과 기억이 투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얼마나 구체적으로 드러나는지의 차이라고 봐요. 완벽하게 동일하다고 믿었던 것들도 상황에 따라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니까요. 저는 가려지거나, 허물어진 후 다시 만들어지는 지층의 형성과 같은 작업과정을 은유적으로 받아들여온” 작가는, “사유가 발생할 때 그것을 소환할 줄 아는 것이 예술이다”는 생각을 담담히 놓아둔다.

캔버스를 기울여가며 색을 입히고 형상을 만드는 독특한 방식으로 유명한 홍수연은 아크릴 물감과 피그먼트, 
여러 종류의 미디엄을 자신만의 레시피로 배합한 안료를 그리고 붓고 기울이고 흘리고 말려가며 형상을 창조한다.
캔버스를 기울여가며 색을 입히고 형상을 만드는 독특한 방식으로 유명한 홍수연은 아크릴 물감과 피그먼트, 여러 종류의 미디엄을 자신만의 레시피로 배합한 안료를 그리고 붓고 기울이고 흘리고 말려가며 형상을 창조한다.
간결한 선으로 유기체적 형상의 윤곽을 잡은 후 안료를 붓고 말리고 갈아내는 등의 과정을 반복해
형태를 완성하는 작업은 미세한 입체적 효과로 구축되며 조각과 같은 형상의 양감으로 다가온다.
간결한 선으로 유기체적 형상의 윤곽을 잡은 후 안료를 붓고 말리고 갈아내는 등의 과정을 반복해 형태를 완성하는 작업은 미세한 입체적 효과로 구축되며 조각과 같은 형상의 양감으로 다가온다.
캔버스 위에 표현되는 여러 기법과 색의 표현방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형상의 이미지들은 모호하고 잘 쓰이지 않는 단어로 세상을 구성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캔버스 위에 표현되는 여러 기법과 색의 표현방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형상의 이미지들은 모호하고 잘 쓰이지 않는 단어로 세상을 구성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에 부합하는 언어를 찾으며 20여년간 추상회화에 천착해온 홍수연은, 재현적인 주제보다는 형태, 공간, 색채 등의 형식적인 면을 실험한 연작들을 발표해왔다. 극도로 색채를 제한하고 정련해 형상과 공간의 관계를 극대화시킨 2014-2017 <Equilibrium> 연작을 보자. 안전한 거리감과 묘한 소외감 사이에 미끄러지듯 끼어드는 형상들이 중첩되거나 흩어지고 폭발하며 빚어내는 리듬은 격렬하게 들끓는 감정조차 안으로 삼켜버리고 고르고 벼린 시어(詩語)처럼 단단하게 빛나는 형태를 보여준다. 뉴욕 프랫대학원 재학 시절 잦은 이사와 짐, 작업 공간의 부재와 같은 스트레스를 가볍게 줄여보고자 시도한 작품인 ‘껍질 연작’에서부터 최근 스페이스 소 개인전을 통해 발표한 <Tonal Dialogue>와 <Oxymoron> 연작 등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변화를 모색해온 작가는, 자기복제가 습관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애써 구축한 세계조차 다시 들쑤시며 전진해왔다. “작업 외에 다른 부분들은 삶 안에서 제대로 성숙되고 소통되지 못한 미숙아와 같다”고 할 만큼 자신이 가진 ‘호기심’ 에너지를 온전히 작품에 쏟아, 매 순간 연대기의 한 페이지를 날것으로 변주하려 분투하는 중이다.
미술평론가 이선영은 “강도 높은 몰입이 필요한 홍수연의 작업은 무엇보다 육신을 혹사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청소년 시절에 미술을 할 것인가 무용을 할 것인가 고민했을 정도라고 하니, 심신의 균형에 대한 감각은 체질화되어 있을 것이다. 작품의 콘셉트에 이미 포함되어 있듯이 삶에 있어서의 평형과 균형도 필요하다. 작업에 있어서 육신의 혹사는 정신력으로 받쳐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 점이 보통의 노동과 예술노동의 차이일 것이다. 홍수연의 작업은 추상화라고 해서 정신만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했다. 추상회화가 현실과 완전히 무관한 세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프레임은 주문 제작하지만 캔버스를 씌우는 기본 단계부터는 모두 직접해요.
제 작업에서는 캔버스의 텐션이 중요해요. 캔버스를 세우거나 눕혀 작업할 때 마치 북의 울림처럼 텐션이 있고 없음에 따라 붓이 눌려지는 감각도 다르거든요. 특히나 눕혀 작업할 때는 조제한 물감이 고착되고 침전되며 만들어지는 형태가 흩어지거나 단번에 잡히기도 해요. 작업 초기에는 이러한 부분까지는 컨트롤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평균치가 생겼어요. 캔버스를 얼마만큼 당겼을 때 형태의 모양이 잘 잡히는지 저만의 감각으로 아는 거에요. 성격상 제가 다 컨트롤해야 직성이 풀려서 여태껏 다 해오긴 했는데요, 저도 이젠 무한체력이 보장되지 않는 시점이라 이 정도 베이스 작업은 도움을 받아야겠다 생각을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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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릴 물감과 피그먼트, 여러 종류의 미디엄을 배합해 작가만의 레서피로 만드는 재료도, 캔버스를 짜는 일도, 모두 작가의 감각으로 쌓이는 작업이네요.
작업의 경험치가 쌓이면서 손으로 해석하고 익힌 감각이에요. 특히 회화 작업의 경우는 회화의 기술적 요소가 구축되어야 하고, 개인적으로 작업에 몰입하기까지 워밍업 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기에 캔버스를 짜고 아교와 젯소를 칠하는 일련의 과정이 제게는 어떤 의미에서는 명상(meditation)과 같아요. 본격적으로 그리기 이전에 밑칠도 얇게 여러 번 혹은 두껍게 몇 번 하느냐에 따라 이후 작업이 전혀 달라지니까요. 사포질 강도와 개입 순서 등도 형태의 모양, 두께, 흐름에 영향을 끼쳐요. 작업 과정에서 빚어지는 디테일한 변수를 낱낱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경우의 수가 다양하죠. 제가 경험하며 습득하는 일종의 지식을 체험하는 희열이 분명히 있어요.

어떻게 작업을 하는가는 어떤 느낌을 주고 어떻게 보여주고 싶은지의 의도와 맞물려 색과 형 그리고 이를 가지고 만들어지는 회화의 기술적인 요소들이 적절하게 선택되고 컨트롤되며, 캔버스라는 공간에 형과 색은 서로 맞물리고 부딪히기도 하면서 팽팽한 힘을 만들어내며 다른 감각의 세계로 들어간다.” _홍수연

긴장과 대립, 유기체적 형태와 해체적인 폭발 등 캔버스 안팎에서 벌어지고 느껴지는 작업의 화두는 ‘균형’이라고 읽혀요. 왜 이 화두 자체를 작업 안에서 부단히 끌고 가는지요?
저라는 사람 자체가 양극단의 성질을 가진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떠한 ‘중간’에서 무언가를 컨트롤하듯 붙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대단히 즐기는 타입이지만, 어느덧 단단하게 형상화된 유기체적 형태들을 펑 터트리듯 풀어놓는 신작을 하며 시원한 해방감을 느낀 이유도 그 때문일 거에요. 두 가지가 공존되며 나아가지 않을까 싶은데요, 어떤 때는 제 자아가 두 개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해요. (웃음) 하나의 사람이라도 유년기와 현재가 다를 수 있듯, 이러한 변화는 당연하지 않은가 싶은 요즘은 제 작업의 변화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도 생각하게 되네요. 그렇듯 ‘균형’의 문제는 항상 어느 쪽으로 잡아당기거나 끌어당기고 싶어지는 가운데 생겨나는 지점이니까요.

Acrobats#1, 2010, acrylic on canvas, 116.5 X 142cm
Acrobats#1, 2010, acrylic on canvas, 116.5 X 142cm
Crouching toward #2, 2010, acrylic on canvas, 70 X 70cm
Crouching toward #2, 2010, acrylic on canvas, 70 X 70cm
Invisible hands #4, 2012, acrylic on canvas, 120 X 150cm
Invisible hands #4, 2012, acrylic on canvas, 120 X 150cm
Equilibrium explosion#4, 2014~2015, acrylic on canvas, 80 X 65cm
Equilibrium explosion#4, 2014~2015, acrylic on canvas, 80 X 65cm
Equilibrium Acrobat #6, 2015, acrylic on canvas
Equilibrium Acrobat #6, 2015, acrylic on canvas

그녀의 작업은 언제나 부유와 점착이 서로 흔들리는 감성의 경계면을 지시하고 있다. 그것이 흐르는 것인지 고정된 것이지 알 수 없는 서로서로의 형상들이 혼재된 부정의 양상은 색조의 서틀(subtle)한 차이에 의해 그 틈새(between)의 모호함을 화면 위로 선명하게 드러낸다. 화면의 형태와 형태 사이에는 견고함과 유연함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화면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은 이 둘 사이의 어떤 규정하기 어려운 지점에서 스치듯 발화되고 있는데, 화면이 주는 전체적인 느낌에서 풍기는 이지적인 양상과는 전혀 다르게, 부분 부분의 디테일의 섬세한 결들을 통해 예민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심리적 뉘앙스가 언뜻언뜻 드러나고 있음을 문득 발견하게 된다.” _ 김동화(정신과 전문의)

비정형성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떨어진다는 특징이 있으나 움직임이 느껴지는 흔적들이 미묘하게 경계 속에서 존재하는 유기체적 형태들은 화폭에서 ‘공간성’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해요. 이전과 다르게 이미지가 전면을 덮는 해체적 분위기가 완연한 신작 <Tonal Dialogue> 연작에서도 공간감은 전복되지만 특유의 ‘긴장감’은 유지되고요.
화면을 공간적으로 보았을 때 형상들이 전면적으로 얹어지면 보통은 편안한 감각으로 다가와요. 그러한 느낌을 재미없어 하는 편인데, 전면을 덮는 올 오버(allover)로 작업해도 이전 작들에서 이뤄왔던 긴장감의 포인트를 제 방식대로 어떻게 풀어낼 수 있는가 하는 호기심이 일었어요. 일례로, 캔버스를 단색의 회색으로 칠한 그레이 시리즈 <still life in space> & <shadows of winter>는 그 이전까지 다채롭게 사용한 ‘색’을 묶어놓으면 다른 어떤 것들이 극대화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듯. 제가 생각지 못한 우연의 접점들이 나왔고, 예민한 긴장감과 균형감도 더더욱 극대화되었어. 어떤 우연적인 것, 필연적인 것, 여러 가지 미묘한 붓질들이 섞였을 때 나오는 어떠한 ‘찰나’들이 비집고 들어오는 경험을 하나 더 이룬 셈이지요. 이것이 회화의 묘미일 거에요. 논리적으로든 감성적으로든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화폭에서 작용하면서 형들이 생명체처럼 다가오는 마술 같은 일이 벌어지는.

홍수연의 작품에서 해체(구성)는 부정적이기 보다는 긍정적이다. 우연적이기 보다는 필연적이다. 알이 깨져야 새는 날 수 있고, 피막이 벗겨져야 번데기는 성충이 될 수 있다. ‘소리가 나지 않는 폭발’이라는 작가의 비유에 걸맞는 꽃봉오리의 개화 순간도 그 예가 될 수 있다. 봄이 되어 피는 꽃들은 폭발적이다. 이러한 폭발에서는 어떤 소리도 안 날 것이다. 대신 색의 폭발이 있을 것이다. 생물학이 아니라 물리학적 차원으로 보자면 폭발은 상전이(phase transition)의 순간과 비교될 수 있다.” _이선영(미술평론가)

Tonal dialogue #7, 2018, acrylic on canvas, 205 x 162cm
Tonal dialogue #7, 2018, acrylic on canvas, 205 x 162cm

2010년 삼청동 갤러리 플랜트 개인전 <Still Life In Space>에서 무채색 시리즈 <아크로바트(Acrobats)>를 보며 시인 허수경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의 떨림을 느꼈어요. 연장된 맥락으로 신작에서는 어쩌면 이 심장에 피가 돌고 다시 뜨겁게 뛴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요. 지난 10월 14일까지 열린 스페이스 소 개인전 <내제된 추상(ABSTRACT : INTRINSIC)>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Flash-forward #2’는 배경에 붓질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어요. 작업 과정을 직접 보니 ‘붓질’ 작업이 분명히 개입되는데 그간 작품에서는 눈에 띄게 드러나 보이지 않았거든요.
색이 주는 매력적인 포만감 때문에 다른 요소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플랜트 전시 때 변화를 모색했어요. 혹은 색을 자제하고 나면 공간이나 형의 관계의 예민함이 극도화 되어 다른 서술적 요소들이 생겨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함에 한 손을 묶고 작업하듯 시작한 것이 회색 시리즈에요. 화면에 흩뿌려지는 듯 얹혀지던 레이어들의 이미지들을 좀 더 명확하고 단순하게 표현하고, 기하학적 형태와 유기적 형태들의 기묘한 결합으로 무언가 일어날 듯 한 암시적 느낌을 최대한 고조시키려 했어요. 이는 조화로울 수 없을 것 같은 이질적인 형상과 구체적인 형태들을 같은 공간에 묘하게 섞어 논리적인 것과 그와 대조적 감각을 공존하는 반 이상향의 세계에 대한 또 다른 변증법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요. 지금은 없어진 갤러리 플랜트는 상업 화랑이지만 좋은 전시를 기획했던 젊은 갤러리스트가 이끌던 곳으로, 제가 원하는 작업을 하라고 흔쾌히 동의해줬어요. 그 작업이 제게는 아주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어요. 스페이스 소 전시 역시 그랬고요. 지나치게 단단해져서 박제화되는 생각을 풀어보는 변화의 지점이 작가들에게는 필요해요. 몇 년 전부터 자로 잰듯한 원형에 인위적이지 않은 형상들을 결부시키며 이상한 긴장감을 만들며 진행해오던 작업이 심장의 떨림 없이 견고해진다는 걸 느끼게 되었어요. 처음의 변화의 의도와는 다르게 또 익숙해짐을 느끼는 시점에 그 동안의 스스로에게 강박적 통제의식을 버리고 자유로운 내적 폭발이 필요한 시점이 된 듯 해요. 작가에게 작업의 과정은 매 순간 모든 붓질이 선택되고 제어되는 시간이에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 마술처럼 새로운 세계로의 호기심이며 지속적인 탐구이고요. 작가가 세상을 대하는 자세나 철학적 사상을 몰라도 독자적인 느낌을 일으키는 것이 작품의 힘이라 생각하거든요. 제게 작업이란 무한의 호기심의 반로이며 그 탐구에요. 인적, 혹은 지리적 관계 속에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며 소통을 통해 세계를 지각하고 인지하는 과정 모두가 작업이요. 스페이스 소 개인전을 통해 보여준 <tonal dialogue> 시리즈 작업은 그간의 강박적 모습을 탈피하여 새로운 조형언어로의 확장을 위한 시작인 셈이에요. 스스로 사각의 프레임 속 다른 문을 통과하는 긴장과 떨림으로 마주하길 기대한.

Oxymoron #4, 2018, acrylic on canvas, 194 x 145cm
Oxymoron #4, 2018, acrylic on canvas, 194 x 145cm

절묘하게 변화하고 연계하며 지속해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해요.
고되긴 하지만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흥미로운 과정이고 시간이에요. 철저하게 혼자 작업하는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떤 의지만으로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삶을 이루는 일상적인 부분들조차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고 느낄 만큼, 작업에 전부를 쏟아왔는데 이제는 조금 작업을 삶의 부분으로서 소통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초기작인 <none irony> & <sashay> 시리즈 대표작 두 점이 김환기 작가 작품과 나란히 서울웨스틴조선호텔 로비에 걸리며 더욱 알려졌고 여러 개인 컬렉터를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고요.
2005년 3층 공간에 걸렸던 작품이 호텔 리노베이션 후 1층 로비에 걸렸어요. 지인들로부터 축하 연락을 받고 알았죠. 골드만삭스 대표인 마이클 셔우드(Michael S. Sherwood)가 한국 출장 때 조선호텔에서 작품을 보고 대표작 세 점을 컬렉션 했고, 최근 신작 한 점을 더 소장했어요. 조선호텔은 여러 가지로 제게 고마운 공간이죠. 그곳에서 작품을 본 컬렉터 몇 분이 이후 로얄갤러리 개인전 때 일부러 찾아오시기도 하셨어요. 이번에 새롭게 만든 조선호텔 비즈니스 리셉션 로비로 그 작품들이 이동했더라고요. 인터뷰도 거의 하지 않을 만큼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아온 사람인데, 그런 면에 비하면 컬렉터 층에서 지속적으로 제 작업을 눈 여겨 봐온 것 같기도 하고요.

white rush#1, 2006, acrylic on canvas,165 X 165cm
white rush#1, 2006, acrylic on canvas,165 X 165cm

작가가 보관 중인 작품들이 궁금해요.
뉴욕시절 그림들은 운송료를 절감하려고 둘둘 말아온 그대로 아직도 많이 갖고 있고요, 여유가 될 때 마다 몇 점씩 다시 프레임을 맞춰서 짜놓고 있어요. 실험하듯 작업한 아이디어 드로잉 이나 껍질작업들은 거의 다 갖고 있고, 제게 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나 새로운 작업을 파생시켜준 역할을 한 뿌리가 되는 작품들은 갖고 있으려는 편이에요. 헌데 간혹 눈썰미 좋은 컬렉터를 만나 제 품을 떠난 작품도 많지만요.

 

현재의 작업에까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껍질 작업’은 여행가듯 가방에 포개어 갖고 다니며
전시장 벽면이나 천정 등에 붙이고 떼는 방식의 설치작업이다.
현재의 작업에까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껍질 작업’은 여행가듯 가방에 포개어 갖고 다니며 전시장 벽면이나 천정 등에 붙이고 떼는 방식의 설치작업이다.

“작가의 초창기 작품은 식물의 생태에서 포착되는 유기적 이미지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식물의 껍질을 벗기거나 모으다 보면, 어느 듯 손 끝에서 실체가 사라지고, 미묘하게 전달되는 알 수 없는 느낌들. 감지될 수 없는 미세한 부피와 끝없이 모습을 바꾸는 진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작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형태들도 명료한 감각으로 감지할 수 없지만 끊임없이 움직이고 진화하는 시간과 공간의 이미지들이다. 작가의 작품들은 반투명하고 불안정하기에 더 촉각적으로 다가온다.” _ 古 이동석(부산시립미술관 학예사)

Arario gallery Cheonan, Sporadic Positioning Exhibition install view, 2012
Arario gallery Cheonan, Sporadic Positioning Exhibition install view, 2012

2012년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 <간헐적 위치선정>전에 출품한 ‘드로잉 시리즈(Drawing for Invisible Hand)’ 10점을 전시 당시 김창일 회장이 컬렉팅했어요. 드로잉 시리즈에서는 석판화 제작에 사용되기도 하는 해먹(tusche)을 주재료로 사용했는데요.
기획과 구성이 좋았던 전시에요. 새로운 시도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물감도 새로 나오면 다 써봐요. 먹도 사용하고. 그런 면에서는 도전 정신이 강해요. 드로잉을 제작하는 방식은 회화를 제작하는 방식과 유사하면서도 일면 달라요. 해먹을 물에 갈아서 트레팔지(trepal paper) 위에 빠르게 그리고 기울기를 주어 흐르게 하면 경사면을 따라 해먹의 진행 과정이 종이 위에 흔적으로 남아요.

Island within Island #1, 2018, acrylic, tusche on trepal paper, 78x54cm
Island within Island #1, 2018, acrylic, tusche on trepal paper, 78x54cm

“빨리 흘러가버린 자리는 엷은 색조를, 흘러서 고인 자리는 진한 색조를 띠게 된다. 이러한 과정, 특히 기울여서 물감을 흐르게 하는 과정 자체란 작가의 회화에서와 다름없으되 드로잉에서의 해먹 드로잉 작업의 경우 완성에 소요되는 전체 시간은 작가의 회화에 비하면 대단히 짧지만, 그럼에도 그 바탕 위로 어떤 변천과 그 변천의 흔적들을 생생하게 남긴다. 이것은 찰나와도 같은 인생의 시간들 속에 수많은 우여곡절을 주름처럼 품게 되는 인생사의 그것과도 방불하다." _ 김동화(정신과 전문의)

오래된 이야기를 해보려고요. 2002년 다시 한국에 돌아오기 이전까지 머물렀던 뉴욕에 대해서요.
다른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하며 소중한 기억으로 남은 도시지요. 하지만 뉴욕에서 혼자 일하고 작업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어요. 종종 전시도 열고, 좋은 기회를 만나기도 했지만, 모든 측면에서 과도한 ‘인파’에 지치게 되더라고요. 뉴욕 프랫 대학원 이후 어렵게 받은 3년의 아티스트 비자가 끝나갈 무렵,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주관하는 제1기 창동스튜디오 입주작가로 선정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9.11 테러를 보았어요. 잠시나마 컨트롤이 되지 않는 뉴욕이라는 괴물 같은 도시를 보았어요. 이미 문 닫힌 은행으로 현금을 찾으러 몰려가는 사람들, 맨하튼으로 연결되는 다리까지 막혀버리니 마켓 진열대에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어요. 지하철과 버스도 다니지 않는 뉴욕에서 유리가루가 섞인 공기의 매캐한 냄새, 텅 빈 큰 대로로 걸으며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목격했어요. 도저히 현실로 와 닿지 않는 시간이었어요. 창동 레지던스 때문에 잠시 들어올 생각을 했지만, 9.11이 큰 계기가 되어 뉴욕 생활에 미련을 버리고 들어오게 되었어요. 귀국 이후 작업은 오랫동안 대략적인 각본대로 차곡차곡 쌓아가는 과정으로 가져왔어요. 시공간의 프레임 속에 갇힌 듯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한 화면 안에 부유하는 듯한 형상들, 여러 층의 형상의 표피들이 가지고 있는 방향성을 조율해 프레임 안의 그림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듯한 잔상이 느껴지도록 만들었어요. 마치 슬로우 모션을 볼 때 다른 시간적 관점에서 형태가 변화하듯, 머물러 있는 듯, 아주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진화해왔어요. 제 작업에서 여백처럼 보이는 캔버스의 배경 면은 인위적으로 설정 된 공간인 동시에 오브제예요. 매끄럽게 만들어진 이 색면으로 인해 형상들을 안착시킬 때 극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이것은 조금 더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빠져들도록 유도하지요. 소름이 돋듯, 시계 태엽이 초단위로 틱탁 거리듯, 아슬아슬한 순간적인 느낌을 좋아해요.

BK gallery, 2013
BK gallery, 2013
Between Forms Exhibition, Song art Gallery, Seoul, 2018
Between Forms Exhibition, Song art Gallery, Seoul, 2018
Abstract : Intrinsic Exhibition, Space So, Seoul ,2018
Abstract : Intrinsic Exhibition, Space So, Seoul ,2018

전시 제안을 받으면 우선적으로 고민하는 포인트는 무언가요?
전시기획의 내용, 사람, 화랑의 레퓨테이션, 그리고 전시 공간이에요. 어떻게 기획이 되어 어떤 작품과 놓여지게 되는지 또는 공간에 따라 작품이 달라 보이기 때문에, 전시를 통해 새롭게 보여줄 수 있는 효과가 있는지 고민해요.

회화를 인터넷으로 보는 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어요. 하지만 세상은 바뀌는 중이죠.
그렇죠. 사진이 회화를 표현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점이 있는 거 같아요. 사진 기술이 이렇게 발전하는데도 작품사진 촬영은 여전히 어렵네요. 제 작업을 촬영하면 수십 개의 심연한 레이어층은 평면적으로 나오기 다반사라서요. 그래도 작품 사진이 안 나오고 실제로 보면 훨씬 좋다는 말을 듣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작품 사진이 더 괜찮아 보이는 작품도 생각보다 많거든요. 앞으로 그 간극은 좀 더 좁혀지겠죠.

작업에서 궁극적으로 이루려는 바가 있다면요.
제 작업이 가진 개별적인 회화의 스타일을 확장시키며 일종의 회화의 언어를 조금 더 단단하게 구축하고 싶어요.

홍수연 작가는 스케일이 큰 작업을 시작하기 이전 여러 형태와 캔버스와 피그먼트의 특성을 실험하는 드로잉 작업을 거듭하기도 한다.
홍수연 작가는 스케일이 큰 작업을 시작하기 이전 여러 형태와 캔버스와 피그먼트의 특성을 실험하는 드로잉 작업을 거듭하기도 한다.

연대기적으로 나열해보니 시리즈의 제목들이 많은 편이예요. 제목은 어떠한 의도로 붙여지나요?
생각이 스칠 때마다 의도했던 작업의 느낌과 비슷한 단어들을 골라놔요. 필요할 때 이미지들과 가장 느낌이 닿는 것들을 선별하고 다시 종합하죠. 하지만 단순히 제목만으로 작품을 읽어내려는 태도는 무리가 있다고 봐요. 어떻게 보면 추상은 어떤 색과 형이 매치되어 나타났을 때의 총체적 느낌이잖아요. 그런 것으로 네이밍이 가능하지만, 꼭 그렇게 봐야 한다고 얘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요.

독일 레지던스 시절 방문했던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의 작은 기도원과 같이 영적인 경험을 주는 건축물을 찾아 다니는 여행도 좋아한다고요.
자연도 어떻게 프레이밍해 보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의 차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페터 춤토르의 건축물에 매력을 느꼈어요. 사람들은 너무 위대한 자연을 보고 나면 작업을 못 한다고들 하는데, 저는 그렇게 믿지 않아요. 보지 못했던 세계를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작업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일종의 창이나 문과 같은 역할을 해주는 ‘캔버스’를 탐구하는 작업도 일종의 여행과 같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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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캔버스를 뒤집어 사용하거나 프레임이 비추도록 투명도를 부여해 캔버스 자체가 문이자 창이 되는 형식을 보여줬죠. 단순한 평면을 뛰어넘는 회화로서 실험적으로 캔버스를 다루는 작가들이 많은데요.
평면은 가장 제한적인 매체이죠. 예전에는 저도 일부러 부정형(unshaped) 캔버스를 만들기도 했는데, 도리어 ‘사각’이라는 형태가 더 매력적이더라고요. 가장 기본적이기도 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이기도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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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의 흠집이나 붓질 자국도 없는 밑칠로 다져지는 바탕색은 그 자체만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시공간으로 탄생한다. 대자연을 하나의 색으로 일괄해놓은 풍경처럼 초현실주의적이다.
한치의 흠집이나 붓질 자국도 없는 밑칠로 다져지는 바탕색은 그 자체만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시공간으로 탄생한다. 대자연을 하나의 색으로 일괄해놓은 풍경처럼 초현실주의적이다.

홍수연 | SOO-YEON HONG
1967년 서울 출생으로 동양화를 전공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림 그리는 일에 재미를 일찍부터 경험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동대학원 졸업 후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대학원을 졸업했다. 뉴욕을 베이스로 활동하다 9.11 테러가 일어난 2002년부터 서울로 거주지를 옮기고 활발히 활동 중이다. 1992년 서울에서의 첫 개인전,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 졸업 후 뉴욕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포스코미술관, 금호미술관, 갤러리 인, 분도 갤러리, 토탈미술관 the room, 갤러리 플랜트, 갤러리 로얄, 스페이스 소 등에서 16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뉴욕 Flowers 갤러리 <Small is Beautiful>, 독일 LWL industiemuseum <Vessels>, 런던 사치갤러리 <Korean Eye>, 일민미술관 <Wonderful Pictures>, 서울대학교 미술관 Moa <MoA Picks: 매체의 기억-’후기-’증후군>, 금호미술관 <한국모더니즘 미술>, 부산시립미술관 <센스&센스빌리티> 등 다수의 국내외 기획전에 참여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미술창작스튜디오, 독일 쾰른 Opekta 스튜디오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가하였다. 작가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대학교미술관, 금호미술관, 우민아트센터, 연세대학교 박물관, 광양 포스코센터, 서울 삼성 서초사옥,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제주 해비치호텔, 중국 상하이 한국 총영사관, 헤이그 네덜란드 한국대사관, 뉴델리 인도 한국대사관 등에 영구 소장 및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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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미지 © 홍수연 – ARTMINING, SEOUL, 2018
PHOTO © ARTMINING – magazine ARTMINE /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