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나 때가 오기를 바라는 ‘기다리다’라는 동사에는 끈기 있는 다짐이 깃들어 있다. 배세진 작가는, 제한된 시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 반복적인 행위를 지속함으로써 얻는 성취감은 초시간적 경험을 통해 발견된다고 이야기한다. 수만 개의 작은 도자 편에 일련번호를 찍고 붙여나가는 반복적인 행위로 작품을 만들어온 그는, 우리가 함께 있는 순간에 대해 “23만 1000번째 숫자를 찍고 있네요”라고 말했다. 이 작은 조각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입체 작품에 ‘하나’로 붙여졌다. 이 숫자에 다다르기까지 축적해온 시간이 10여 년이다.
WRITE 박나리(매거진 아트마인 콘텐츠 디렉터) PHOTOGRAPH 박우진 VIDEO 황승헌(매거진 아트마인 영상 매니저)
흙의 본성을 시간이라고 생각해, 흙을 재료로 시간을 드러내는 작업을 하는 작가 배세진.
“기법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기술로 따져도 내세울 것 없는 작업을 5~6년간 이끌었고, 그다음부터는 동기부여를 해 지속한 것이 사실은 제 작업의 전부예요.” ‘시간을 기록하는 작업’을 통해 ‘나’를 발견해왔다는 뜻이다. 이러한 경험이 관람객에게 ‘유사한 경험’으로 전이될 때, 서로가 어떤시간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끝없이 일깨워주는, 같은 세상의 존재로서 마주하게 될 터다. 더불어 그 경험은 지나치게 빠르게 변화하고 지극히 결과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현대사회에서 “당장 내년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실전과 같은 게임을 하며 불안함과 스릴을 동시에 갖고 작업하는 작가”가 기다리는 ‘고도’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배세진 작가는 종종 자문한다. 작품 제목이자 작업 모티브로 차용해온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에 등장하는 늙고 가난한 2명의 광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우리는 꽁꽁 묶여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러다가도 작업 밀도가 좋은 날 자신도 모르게 물리적인 시간이 점핑하는 초시간적인 경험을 하는 그는 “배고픈 줄도 모르고 작업을 하다가 어느새 밤을 맞는 일이 종종 생겨요. 그렇게 생각하면 작은 도자 조각에 숫자를 기록하는 반복적인 작업이, 혹은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일치시키는 행위로서 흙을 다루는 작업 방식이 철학과 그렇게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 그렇다면 사는 게 결국은 예술인가 보구나, 생각하게 돼요”라며, “제 분신과도 같은 작업에 대한 호평이든 혹평이든 모두 제 몫인” 작가로서 살아가는 시간에 만족감을 느낀다. ‘생명이 싹트는 곳*’인 땅,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는*’ 흙을 다루는 작업자는 ‘필연적으로 자연의 시간에 자신을 일치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인 김소연이 펴낸 <한 글자 사전>의 산문적 해석에서 가져왔다.)
공예와 순수 미술의 경계 어딘가에 걸쳐 있는 작업을 해온 작가는 공간 어디에 놓이든 “작품 그 자체로 아름다워 보이기를 바란다.”
“The laps of time involves duration, repetition, transformation, circulation. It is continuous, repetitive and circular. The change always follows with the repetition and circulation. This time is along with nature as well as human. However, modern society increasingly separates it between human and nature, which has become the main cause of the alienation of human beings, and prevalent in modern society. In the boundary of art, a study of the laps of time is ultimately a study of the human. Samuel Beckett revealed the laps of time in nature in his play ‘Waiting for Godot’, by the two main characters repeatedly waiting for the Godot. Beckett’s plays become the motives of my work and title.
Working with the clay as a natural material is unifying the time of nature and human. The clay contains the time of duration, repetition, transformation and circulation. And the artist inevitably harmonize himself with the laps of time in nature. And the one who work with have to match the time with it inevitably, in order to work with. I think the essentiality of the clay material is the laps of time, and worked through with the clay to reveal the laps of time. The continuous repetition of labor would be inevitable in order to visualize infinite of time because human is mortal. Putting the serial numbers and attaching tens of thousands of small blocks leads me to the stage of impassivity and makes super temporal experience. I discover myself in super temporal experience. The experience of these can be passed through by the work made by constant repetition of labor, to the audience too.
I tried to visualize and record the laps of time in nature by working with it. The continuing repetition of labor helps me to overcome with alienation of human beings and to discover myself by the super temporal experience. Recording the laps of time gets its meaning only when performed repeatedly for a long time and it can deliver to audiences. So, I think the last three years of work experience is not me long. On the basis of what I have studied, I will try to get closer to the repetitive and circular time of nature by continuing repetition of labor.” _ BAE, SEJIN
<Waiting for the Godot 123840-125201>, 2015. 67x56x56 cm
2014년 메종 & 오브제와 미국의 대표적인 공예 예술 박람회 시카고 SOFA(Sculpture Objects Functional Art and Design), 2015년 영국 프리미어 공예 아트 페어 사치 갤러리 ‘컬렉트(Collect)’와 파리 ‘레벨라시옹(Révélations)’, 2016년 밀라노 트리엔날레 한국공예전, 그리고 전 세계 70개 국가에서 3900여 명의 지원자가 참여한 <로에베 크래프트 프라이즈(Loewe Craft Prize)> 최종 후보 11인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세계 무대에서 숨가쁘게 달려왔어요. 작년과 올해에만도 뉴욕, 스페인, 런던 전시에 참여했고요. 프랑스 공예 예술가 협회 ‘아틀리에 아르 드 프랑스(Ateliers d'Art de France: AAF)’ 국제 문화 프로젝트 매니저 로맹 줄라는 작가를 두고 단계적으로 프로모션이 잘된 경우라고 평가했어요.
KCDF(한국공예ㆍ디자인문화진흥원)를 통해 2014년 메종 & 오브제에 소개됐을 때 그가 제 작품 한 점을 샀어요! 저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한참 남았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겪은 과정을 종종 후배들에게 얘기해줘요. 100% 정답은 아니더라도 여러 방법론 중 하나라고 생각해서요. 저도 아직 그런데, 매일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이 작가예요. ‘페어에 보낸 작품이 팔렸을까?’, ‘내년에도 불러줄까?’, ‘지금은 일이 많아도 앞으로는 어떻게 하지?’ 등등의 생각을 안고 작업할 때, 이렇게 하면 어느 정도 높은 확률로 잘될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도움되거든요. 국내에서 제 작업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신인 때 국가 기관 프로젝트나 공모전에 열심히 참가했어요. 거기서 지원해주는 해외 전시에 참여해 해외로 영역을 넓혀갔고, 현재 신뢰 관계를 쌓으며 일하는 해외 갤러리들을 만났죠. 우열을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 공예 시장과 미술 시장 가운데 후자의 규모가 훨씬 크니 그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현실적인 고민도 해요. 저는 먹고사는 일을 터부시하지 않아요. 작품을 판매하기 위해 노력하는 비즈니스를 중요한 작가적 태도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작가 지원 프로그램 같은 기회가 중요하다기보다는, 그런 기회를 계기로 삼아 그다음 기회를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그러면 누군가 제 작품을 의미 있게 봐주는 때가 오고, 그 힘으로 작업에 동기부여를 더 하게 되니까요.
인간 삶에 내재된 보편적인 ‘기다림’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인 <고도를 기다리며>를 작업 모티브와 제목으로 차용해왔는데, 이 작품과의 첫 만남이 궁금해요.
미대에 가보면 특정 예고나 학원에서 온 아이들이 다수이고, 서로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어요. 저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학부에 입학하기 전까지 도자기가 뭔지도 몰랐어요. 고려청자, 조선백자, 분청사기, 딱 3개만 알고 있었거든요. 고등학교 미술 수준에서 더 이상 어떠한 발전도 없는 상태로요. 저처럼 ‘혼자’ 미대에 가면 주눅이 들어요. 제가 찾은 커뮤니티는 미대 연극 동아리였고, 오랫동안 열심히 극단 생활을 즐겼죠. 그 와중에 우연히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을 접했는데, 그저 희한한 연극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군대 문제 등을 해결하고 복학해 본격적으로 도자 작업을 배웠는데, 흙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작업이 이 연극의 맥락과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도자기 작업 자체의 본성을 희곡 주제에 연결해 풀어보자는 생각에 작품을 만들었는데, 굉장한 성취감이 느껴지더라고요. 휴학하는 사이 군 복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사에 오래 다니기도 했는데, 직장 생활은 뭘 하든 결국 내 것이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런데 스스로 결정하고 진행해 최종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에 대해 누군가가 잘했다고 얘기해주는 작업은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했을 때 얻는 성취감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값졌어요. 그때부터 이 작업을 계속하기 시작했죠.
‘고도’가 무엇을 혹은 누구를 의미하느냐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관객의 몫으로 논의되는데, 작가가 기다리는 ‘고도’는 무엇인가요?
저도 모르겠어요. 하하. 어쩌면 지속, 반복, 변화, 순환하는 시간을 담고 있는 자연 재료인 흙을 다루는 일 그 자체일지도요.
관람객의 한 사람으로서 작업을 보고 단번에 떠올린 텍스트는 카뮈의 <태양의 후예> 중 한 구절이에요. ‘돌은 거만한 바람에 저항하지만 참을성 있는 발걸음에는 못 이긴다. 인적이 없어도 계단은 초벽에 닿아 어깨에 흰 먼지가 묻은, 그네 발걸음 무거운 친구 이야기를 한다. 여러 해 전부터 저녁마다 그는 수프의 향연을 위하여 걸어 올라간다’는. 작가 스스로 ‘생계형 작가’라고 한 말의 맥락도 그런 의미로 읽히는데요.
작업만 따로 떼어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작가가 속한 사회의 구조나 배경 등을 종합해 작업을 평가하게 마련이니, 작가 또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관계’를 완전히 벗어나서 생각하지 못하죠. <고도를 기다리며>로 돌아가 얘기하자면, 저도 사실 고도가 누구인지 몰라요.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어느 날 갑자기 뒤도 안 돌아보고 이 일을 그만둘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작업하지만, 몰라요 저도. 그래서 그게 굉장히 재미있어요. 삶은 게임이 아니라 실전이거든요. 당장 내년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실전이요. 어느 날 갑자기 더 잘될 수도 있고, 아니면 잘 안될 수도 있지만, 실전처럼 대단히 스릴 넘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거죠. 소소하게는 오늘 만든 작품이 가마에서 제대로 나올지 갈라질지 모르듯이. 그런 삶 전부를 고도라고 상정하고 작업하면 짧은 순간도 기다림이 돼요. 여러 단계를 넘어가면서 뭔가가 누적되면 제 작품의 표현적인 요소가 될 수도 있고, 혹은 단순히 금전적인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고요. 저도 궁금해요. 쌓이고 쌓인 것들이 10년 후 작업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나는 어떤 성장 단계에서 끝나는 작가가 될까? 그때도 지금 그대로 하고 있을까? 전혀 다른 작업을 하고 있을까? 그래도 작업하는 삶이 여전히 즐겁고 행복하다면 괜찮지! 그런 궁금증을 갖고 사는 요즘, 기다리는 시간을 더 즐겁게 생각하려고 해요.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꾸준히 오래 하면 잘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라는 사실을 도자기를 배우며 깨달았다고 했어요.
즉흥적으로 표현해 감각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천재적인 재주는 없더라도, 일종의 노동적인 작업을 부지런히 오래 하는 것 역시 능력이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재주와 능력이 더 뛰어났다면 그릇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렸겠죠. 저는 그릇 작업을 하지 않지만, 오랫동안 사발이나 다완을 만들어온 분들은 거기에서 우주를 본다고 해요.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싶은데, 영 거짓말은 아니겠다고는 생각해요. 다완 하나를 빚으려면 직접 산에서 흙을 퍼 와서 정성스럽게 체 치고 말린 후 반죽해 숙성하고 물레를 차고 굽을 깎아 장작 가마에서 일주일 이상 굽는데, 그토록 정성을 들여도 그중 몇은 망가져서 못 쓰게 되는 과정을 40~50년 반복한 분이라면 “우주를 본다”고 얘기할 수 있겠더라고요. 기(器)의 형태란 것이 갖는 힘이겠지요.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가 흔히 보는 그릇을 만드는 작가들만 해도 사람들은 결과물만 보지만, 사실 컵 하나를 만들기 위해 10년 가까이 일해온 거거든요. 저는 그 기에 10년의 시간이 녹아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직접 만든 것에는. 저는 기가 아닌, 기의 형태를 닮은 작업을 하지만, 시간이 축적된 기록을 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봐요.
공예와 미술, 디자인 요소가 모두 섞여 있는 작업인데, 얘기를 나눌수록 기술적인 접근보다는 오히려 개념 미술처럼 철학적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공예를 기술적이나 재료적인 면으로 접근하는 게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기술을 담보하는 게 노동이고 재료를 이해하는 것도 노동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면 굽을 깎고, 직선으로 나오게 물레를 잘 차는 것은 기술의 영역이에요. 백자 흙을 다루고 유약을 만드는 것은 재료의 영역이죠. 도자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다루는 기술과 재료를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노동이 필수잖아요. 제가 도자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 그게 제일 먼저 보였어요. 하루 이틀 해서 되는 건 아니구나.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고, 모든 사람이 만든 물건에는 시간이 녹아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쪽으로 작업을 해보자. 조각을 1000개 2000개 붙이면 그게 좀 보이겠지. 아니, 그 정도로는 부족한 것 같으니, 번호를 1번부터 찍어서 계속 이어나가 10만 개 100만 개가 될 때쯤이면 사람들이 알아봐주겠지. 내 것을 알아봐주는 것뿐 아니라 사람이 손으로 만드는 것, 아니면 노래나 춤으로 표현되는 것들 모두 사실은 시간이 축적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좋겠다. 우리는 결과물만 보니까, 과정에 쌓인 시간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을 하자고 도자를 처음 시작했을 때 생각했던 것 같아요.
판 성형한 흙을 작은 도자 편 조각으로 만들어 사용하는데, 작업 주재료와 방식은 어떻게 정하게 되었는지요?
도자 기법으로 판 성형, 코일링, 핀칭을 기본으로 배워요. 복학 후 첫 과제의 주제가 판으로 만들기였는데, 그 작업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당시에는 손 밀대로 판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롤러 머신으로 일정하게 밀어 만든 판을 사용해요. 주재료는 흙에 신문지를 10% 비율로 섞은 페이퍼 클레이예요. 현재는 주로 백자토에 안료를 넣은 재료를 많이 쓰고, 가끔 분청도 사용해요. 종종 점토를 한번 소성한 샤모트에 색 알갱이를 넣어 만들기도 하는데, 앞으로는 다른 흙을 써볼 계획도 있어요. 작업 방법은 단순해요. 일정한 두께로 판을 밀어서 일정한 길이로 자른 후 꾸덕꾸덕 말려 비닐에 쭉 쌓아두고 필요할 때 커팅해 숫자를 찍어 흙물로 하나씩 붙여가며 형태를 만들어요. 기법적으로나 기술의 난도로나 내세울 것이 없어요. 물론 작업을 해오면서 디테일하게 쌓인 저만의 노하우가 있겠지만, 뻔한 거예요. 다만, 몸이 상당히 고단하기도 한 작업을 몇 년 이상 끌고 나가고 스스로 동기부여를 해가며 지속해온 시간이 제 작업의 전부죠. 제가 방금 설명한 것들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걸 정확하게 이해하고 작업에 반영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생각보다 길더라고요. 처음 작업했을 때와 비교하면 재료도 많이 바뀌었고, 재료를 어떻게 다뤄야 좀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을지 자연스레 얻은 경험이 쌓였는데, 오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작품의 형태가 제 뜻대로 잘 안 나오고 있어요. 이것과 비슷한 형태를 좀 오랜만에 만들었거든요. 그 사이 감이 떨어진 면이 있어요. 평소에 지키던 루틴 중 어떤 부분이 빠졌다는 사실을 작업 중간에 알아챘죠. 작업 과정이 몸에 익은 것 같아도 아직도 중간에 무언가를 놓치는 실수를 해요. 어젯밤에 문득 생각이 났어요. 하하.
두께 0.7~1cm 이내의 흙 판을 숙성시켜 일정한 길이로 잘라 적당히 말린다. 필요할 때마다 넘버링 머신으로 일련번호를 찍고 살짝 칼집을 내 손으로 부러뜨리는 방식으로 재료를 준비한다. 초콜릿을 부러뜨리듯이 뚝 끊어 만드는 도자 편은, 돌조각처럼 보이는 단면의 독특한 질감 자체로 특징적인 표현 방법 중 하나가 된다.
넘버링 머신은 작가의 주요한 작업 도구다. 현재 가장 작은 사이즈의 머신을 사용하는데, 어쩔 수 없이 도자편 사이즈에 한계가 생긴다. 이 한계는 다른 한편으로는 평면 작업으로 연결,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입체 작업 스케일을 더 키우거나 작게 변형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진행 중인 작가는, 자신만의 넘버링 머신을 제작해 사용해볼 계획을 갖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이 연결 고리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칼로 깨끗이 자른 단면보다, 모호하지만 어떤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 듯 보이는 도자 편의 질감을 좋아한다. ‘기다린다’는 행위로 끝없이 연속되는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런 의미에서 작가 작업에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돌조각처럼 보이는 도자 편의 질감은 결과물을 놓고 봐도 형태미에 영향을 끼치는 독특한 미감을 풍겨요.
칼로 딱 잘라버리면 거기서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부러뜨려 반으로 자르면 나머지 반쪽이 어딘가에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죠. 모든 것에 연결 고리가 있다는 생각에 처음부터 부러뜨렸던 것 같아요. 뭔가 끝을 확실히 맺는 게 아니라 어딘가의 한 부분이었겠구나, 싶도록. 전시 후 조각이 부분부분 깨지기도 하는데, 너무 큰 파손이 아니라면 크게 개의치 않아요. 조각이 떨어지면 다시 붙여 쓰기도 해요. 너무 느슨하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는데, 제 영역을 벗어난 일은 그냥 둬야 한다고 봐요. 지금 이렇게 얘기하지만, 5년 후에는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요. 하하.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게 사람이니까요. 작품도 어떤 것은 스스로 만족감이 넘치기도 하는데, 그러다가도 어느 날 펼쳐놓고 보면 왜 이런 걸 하고 있을까, 하거든요. 작업에 대한 생각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도 하루에도 몇 번씩 달라질 때가 있으니, 작업을 만드는 루틴 혹은 규칙도 언젠가는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죠. 지금은 정해진 규칙 안에서 정해진 작업을 하지만, 어느 순간 단번에 모든 것을 바꿔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닐 수도 있겠더라고요.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요?
붙이는 작업에만 몰입하면 일주일가량, 앞 단계에 준비해야 하는 부분까지 더하면 흙을 건조하는데 2주 이상 걸리니까, 보통 하나 만드는 데 3주 잡아요. 조각이 좀 더 많이 들어가면 건조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니 한 달 정도 필요하고요. 단순히 가만두면 마르는 게 아니라 비닐에 싸놓고 하루에 한 번씩 뒤집어 습기를 빼면서 천천히 말려야 하거든요. 상황에 따라서는 밑에 열 판을 깔고 온도를 올려가면서 고르게 말려야 할 때도 있어요.
자투리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살뜰히 모아두었어요.
다시 흙으로 만들어서 사용해요.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만들다가 주저앉거나 이동하다 깨뜨린 경우,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지 않았다면 그 번호부터 다시 찍어요. 그런데 완성된 작품을 이동 중 깨뜨렸다면 어쩔 수 없이 지나가죠. 번호 찍는 것도, 혹은 중간에 작품이 파손되는 것도 작업의 일부이고 항상 과정 중에 있다고 보거든요. 결과가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시작해서인지, 지금도 배운다고 하면 배우는 과정이고 연습이라고 보면 연습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니, 최선을 다하되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은 그대로 이해하고 인정하려고 노력해요.
세상에는 없는 번호인데 작가에게는 있는 번호라는 사실이 재미있네요.
그렇죠!
<Waiting for the Godot 138283-142299>, 2015. 65x65x60 cm
현대 도시를 연상시키는 회색 톤에서 달콤한 마시멜로 컬러 작업으로 확장되고 있어요.
처음에는 작업 이미지와 특정 뉘앙스를 제일 덜 풍기는 회색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한데 작업을 하다 보니 회색이 갖는 ‘색 이미지’도 여타 색만큼 강한 성격을 띠더라고요. 재료의 유지 관리 측면에서 효율적이기도 하고요. 회색 흙으로 만들면 자투리가 생겨도 밝든 어둡든 다시 사용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굳이 한 가지 색을 고집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붉은색 계열 작업도 시작했어요. 노랑, 빨강, 핑크로 톤만 조절해서 작업하는데, 그러다 갑자기 파란색을 쓰지 않는 이유는, 회색의 유지 관리 측면과 비슷하게 세 가지 흙 자투리를 모아서 또다시 흙을 만들면 비슷한 톤을 얻기 쉽고, 재료를 조금만 더해서 원하는 색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에요. 흙이라는 재료를 사용할 때는 고유의 특성이 많은 영향을 미쳐요. 빨간색을 쓰다가 파란색을 쓴다면 처리하지 못하는 재료가 쌓이고, 거기에 치여서 제대로 작업하기가 힘들어져요. 백자 작업만 하는 작가는 다른 작업을 할 수도 있지만, 백자로 어느 정도 작업하고 정리되면 다른 종류의 흙을 사용하지, 오늘 백자 했다가 내일 분청 했다가, 하는 식으로 작업을 하지는 못하거든요. 작업복이나 도구도 마찬가지죠. 그런 점에서 올해는 붉은 계열로 작업하고, 내년에는 녹색이나 푸른 계열로 넘어가볼 생각이에요.
<Waiting for the Godot 147911-151578>, 2017. 29x22x46 cm
<Waiting for the Godot 220855-221704>, 2018. 23x23x22cm
스케일에 대한 실험도 더 적극적으로 해나갈 계획인가요? 지난 5월 9일부터 13일까지 열린 런던 크래프트 위크(London Craft Week)에서 선보인 작업은 스케일에 대한 실험을 예고하는 전초전으로 보였어요.
가마 사이즈에 구애받지 않는 스케일이 아주 큰 작업에 대한 욕망은 있어요. 전체를 흙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구조나 프레임은 다른 재료로 만들고 조각만 붙이는 방법도 있겠지만, 언제쯤 여건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오히려 지금은 반대로 축소하는 쪽으로 옮겨 갔어요. 해외 일이 많아서 운송 비용과 이동 안전성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오히려 작은 작업으로 바꾼 것도 있어요. 입체 작품의 경우 공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판매와도 연관이 있고요. 재미있는 건, 큰 작업을 한 경험이 많으니 작은 건 금방 하겠다, 싶었는데 막상 해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크기 변화는 단순히 비율의 변용이 아니어서, 제 마음에 들 정도로 작은 작품을 만들기까지 거의 1년 정도 걸렸어요. 관람객은 잘 모를 수 있고, 알아도 큰 차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만드는 입장에서는 미묘한 변화지만 아직도 실험해야 하는 것들이 있어요. 익숙해지는 데 앞으로도 2~3년은 걸릴 것 같은데, 그런 다음 스케일을 눈에 띄게 확장하거나 축소하는 식으로 변화를 시도할 수 있으리라고 봐요.
우연성에 의존하기보다는 정확하게 설계하고 계산된 형태로 작업하나요?
예전에는 일러스트로 도면 비슷한 걸 그렸는데, 요즘에는 감으로 움직일 정도가 됐어요. 원하는 선을 만들기 위해 작업할 때마다 조절 가능한 오차는 방망이로 두드려 조정해요. 그래도 안 되면 조각을 다시 잘라 길이를 맞추고요. 그런 식으로 감과 산수를 섞어서 작업하죠. 산수적으로 길이를 재서 자르고, 붙여가지만 흙이 굉장히 희한한 게, 계산된 형태로 해도 어떨 때는 1mm 오차가 무척 이상해 보이기도 하거든요. 어떤 경우는 5mm 오차도 아무렇지 않고요. 지금 이 작업도 원형으로 붙여가지만 자세히 보면 간격이 미세하게 달라요. 간격이 조금 달라도 흙 작업이다 보니 좀 더 꾹 눌러 붙이거나 방망이로 탕탕 치면 커버 가능한 부분도 있어서, 치밀한 계산만으로 하는 작업은 아니에요.
‘방향성’이 있는 작업에도 작가적 의도가 담겨 있나요?
도자 편을 일정한 방향으로 비껴 붙인 형태가 시간과 관련된 이미지를 만드는 데는 더 효과적이기도 해요. 사선으로 배치하면 숫자가 더 잘 보이거든요. 너무 뻔하다고 여겨서 숨겼는데, 요즘은 더 잘 보이는 방향으로 의도해요. 작품 제목에 시작 번호부터 끝 번호까지 표기한 숫자가 관람객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죠.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방식 자체가 하나의 표현 방식이 되기도 하고요. 제가 충분히 설명하거나 표현하지 않아도 작업에 관심을 갖고 오래 보고 이해하려 애쓰는 관람객을 만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렇지 않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줘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가능하면 작업에 단서를 제시해요. 그럼에도 여전히 조각에 찍힌 숫자는 멀리서는 보이지 않아요. 평면 작품에 새긴 숫자도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이것이 연속된 일련번호인지 모르죠. 보는 사람들의 관심과 물리적인 거리도 중요하다고 봐요. 숫자의 조합에 대한 궁금증을 유도하는 측면에서 창작자의 태도와 의무도 중요하지만, 관람자의 의무도 사실은 거기 포함되어 있어요. 대강 보고 지나치면 아무것도 아닌 거죠. 관심을 가져야 달라 보이는 지점이 생길 테니까. 그런 차원에서 숫자를 좀 더 잘 보이게 찍으면 거리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Waiting for the Godot 164209-166027>, 2017. 55x40x28 cm
어떤 작품을 만드느냐를 결정하는 몫은 온전히 작가에게 있나요?
네. 갤러리에서 요구하는 형태가 있는 경우는 반영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으니까요. 그 외의 것들은 제가 원하는 대로 하고요. 지금은 닥친 일을 해결해야 하는 시점이에요. 전시를 몇 개 앞두었는데, 완성한 작업이 별로 없어요.
해외 거점 갤러리로 미국 J. 로만 갤러리(J. Lohmann Gallery), 프랑스 무브망 모데른 갤러리(Mouvements Modernes Galerie), 스위스 오베르-장상 갤러리(Aubert-Jansem Galerie)와 일하고 있어요. 예정된 전시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7월에 스코틀랜드 전시, 8월에 베이루트 전시, 9월에는 뉴욕. 일단 급한 세 가지는 그렇고, 올가을에 한국에서는 키아프(KIAF)에 참여해요.
활동량과 반경이 엄청나네요. 보통 1년에 전시를 몇 번이나 갖나요?
지금은 누군가 하자고 하면 따지지 않고 무조건 “예스” 해요. 일을 도와주는 아트 딜러가 이제는 좀 가려서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그저 작품에 호의를 갖고 저를 찾아주는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커요. 저는 자리도 잘 안 가려요. 카페에서도 하고, 가구 숍에서도 해요. 물론 좋은 가구 파는 곳이긴 하지만. 작년에 로에베 공모전 파이널에 진출했는데, 로에베가 어떤 브랜드인지도 몰랐어요. 거기서 여러 해외 갤러리와 전시를 연결해줬는데, 공간이 모두 좋더라고요. 산울림 같은 곳은 저와 인연이 된 후에는 언제든 불러주면 바로 가거든요. 작년에 레벨라시옹에서 작품 한 점이 팔렸는데, 공예 시장이 좁다고 느꼈어요. 작품을 구입한 분을 그해 9월 제네바 개인전에서 또 만났거든요. 작품 하나를 더 사고 싶어 했는데, 못 팔았어요. 가격의 문제였죠. 레벨라시옹은 진흥원을 통한 참가여서 상대적으로 가격을 낮게 책정했는데, 제네바는 갤러리 전시여서 가격이 좀 차이 났거든요. 그래서 요즘 가격을 조정하고 있어요. 세계 시장도 이렇게 좁을 수 있구나, 싶어서 국가 기관을 통해서든 갤러리를 통해서든 판매 가격에 차이가 크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이것도 실전에서 배운 점이에요. 그런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 시행착오를 겪게 되죠. 계속 배우고 있어요.
평면 작품과 입체 작품 비율은 어느 정도 되나요?
작업 수로 따지면 평면을 훨씬 많이 해요. 평면은 미리 만들지 않고 특별한 이슈가 생기면 시작하죠. 소요 시간이 짧은 편이라서요. 입체는 미리미리 해놓지 않으면 준비가 안 돼요.
<WFGF241 216428-216491>, 2018. 86x117 cm. 평면 작업의 기본 형태는 입체 작품을 바탕으로 한다. 입체를 위에서 바라본 평면도는 ‘원형’으로, 입체를 옆에서 바라본 측면도는 ‘반원’ 형태로 치환된다. 가로 직선이나 세로 직선 작업은 입체 작품을 부분적으로 발췌한 것이다. 평면 작업은 조각에 직접 숫자를 찍지 않고 종이 하단에 해당 숫자를 연속적으로 기록하는 방식을 취한다.
<WFG 101697-105173>, 2014. 75x104 cm. 숫자만으로 빼곡히 채운 평면 작업은,
2cm 미만의 조각으로 입체 작품을 만드는 경우 조각에 직접 숫자를 찍을 수 없는 ‘한계’에서 발현되었다.
작품 가격은 어떻게 결정하나요?
소요 시간으로 정해요. 평면이나 입체나 마찬가지인데, 특히 입체 작업에서 도자기는 재료비가 크게 작용하지 않아요. 그것이 다른 미술 분야와 다른 점이죠. 요새 미술 시장 갤러리들과 일하다 보니 평면 작품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더라고요. 회화는 캔버스 호수로 가격을 정하는데, 저는 같은 크기여도 들인 공에 따라 가격을 정하니까요. 기준점은 노동인 것 같아요. 그런데 시장 원리라는 게 있어서 마냥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굉장히 유명한 작가여야 가격을 뜻대로 정할 수 있죠. 국내와 해외 가격 편차에 절충점을 찾아가는 중이에요. 국내와 해외 가격이 거의 2배 정도 차이 나는데, 운송비 등 부대 비용이 발생한다는 게 문제예요. 같이 일하는 분과 상의해서 조정하고 있어요.
가장 기억에 남은 컬렉터는요?
미국 시카고 SOFA에서 제 작업을 구입한 분이 생각나네요. 유리와 도자기 쪽으로만 컬렉팅을 많이 하는 노인분이었는데, 당시 1만 달러를 지불하고 큰 작업을 사주셨죠. 그 후 그분과 여러 번 이메일을 주고받았어요. 한번은 작품을 받았는데 어떻게 운반하면 좋을지 묻기에 학교 후배들과 다른 작품으로 운반 방법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가이드해줬어요. 그분이 제 작업을 본인 집에 전시해놓은 모습을 담은 사진도 보내주셨는데, 무게가 상당한 작품 밑에 놔둬서 패턴이 생긴 포장재도 벽에 같이 걸어뒀더라고요. 평면 작업 같다고요. 그분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아, 제네바에서 만난 분도 기억나네요. 미국에서 가끔 한국을 방문하는데, 인테리어 일을 하시죠. 제 작업을 좋게 봐줘서 프로젝트 때마다 꼭 제 작업을 넣어주려고 해요. 작업실에 고객을 모시고 와서 집이나 사무실에 작품을 걸어보라고 설명도 해주고요. 덕분에 제 작품이 세계 곳곳에 진출했어요. 너무 감사해서 선물로 작품 한 점을 드리겠다고 하니, 젊은 작가들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치시더군요. 고마운 일이에요.
평범한 하루 일과가 궁금해요.
강의를 위해 비우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작업실에 있어요. 지금은 다른 취미도 없어요. 예전에는 공연을 보러 가기도 했는데, 지금은 집-작업실, 혹은 학교 정도 오가는 동선이 전부예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묶여 있죠. 아주 긍정적인 뉘앙스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이렇게 사는 게 과연 행복인가, 싶어요. 작업 외적인 부분에서요. 이렇게 작업으로 성취하는 것도 좋기는 한데, 요새는 그것만으로 내 삶이 행복해지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해요. 학교 가면 학생들한테 열심히 하라고 잘 안 해요. 행복하게 하라고 말하죠. 하하.
작품 할 때는 그 복잡다단한 생각들이 딱 멈춰지나요?
거의요. 스스로 예민한 사람이라고 여겨본 적이 한번도 없는데, 작업할 때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요즘 해요. 아무것도 간섭받지 않은 상태에서 밀도 있게 진도가 나가는데, 정신이 산란하면 못해요. 그래서 작업할 때는 다른 생각은 거의 안 하죠. 한 줄 쌓고 다음 한 줄을 쌓기 전에 어쩔 수 없이 쉬어야 하는 시간이 있어요. 마르는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어떨 때는 저도 모르게 물리적인 시간이 점핑해버리는 경험을 해요. 아침에 작업을 시작했는데 금세 저녁이 되어 있다든가 하는, 굉장히 초시간적인 경험을요.
주택 공간을 다른 작가들과 함께 작업실로 사용하고, 일반인 대상 도예 수업도 진행하는데, 작업에 도움되는 점이 있나요?
타인의 작업을 보는 경험이 주는 효과가 있어요. 잘하는 사람의 작업을 보는 것도 좋지만, 도자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흙을 다루는 전혀 다른 방식에서 배우는 점도 있어요. 편견에 사로잡혀 시도하지 못했던 것, 제가 배워온 것 중 폭이 좁아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 저런 것이었구나, 하고요.
<WFG 126078-127846>, 2015. 20x20x20 cm. 한 편의 희곡을 모티브로 삼아 출발한 배세진의 작업은 또 다른 방식의 ‘원고’ 형태로 묶이기도 한다. 한 작품에 해당하는 숫자가 A4 20매가량 된다. 어쩌면 그에 대해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는 평생 읽히지 않을 책처럼 의미 없어 보이는 기호로만 남을 수도 있을 터다. 작가는 “관심을 가져야만 달라 보이는 지점이 생기기도 한다”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오지 않는 저마다의 ‘고도’를 적극적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 전달될지 모른다.
배세진
BAE, SEJIN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도예전공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디자인학부 도예전공 졸업한 작가는 전형적인 한국의 소년이자 학생이자 남성의 삶을 살았다. 중학교 시절까지 평범했던 그는 실업계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반대에도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로 나아갔고, ‘결국 그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하며 작가의 삶을 지속하고 있다. 입시 미술에 매달리는 학생들 틈에서 배세진은 포토샵과 일러스트, 판화, 실크스크린 등을 활용해 만든 포트폴리오로 좋은 평가를 받아 대학에 진학한다. 학교생활은 때로 느슨한 듯했으나, 대학원 진학을 통해 좋은 동료와 스승을 만나 치열하게 매진하는 삶에 대해 깨닫는다. 또 그곳에서 평생의 작품인 <고도를 기다리며>를 만났고, 그 희곡에서 모티브와 제목을 가져온 도자 작업을 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https://www.baesej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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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미지 © 배세진 – ARTMINING, SEOUL, 2018
PHOTO © ARTMINING – magazine ARTMINE / 박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