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에게 ‘빌딩’은 욕망의 집합체다. 뿌리 내린 지역의 부富와 결핍을 온 몸으로 발산하는 산물,
공간을 드나드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이야기’의 층위는 그 지역을 드러내는 상징물이자 ‘얼굴’이다.
WRITE 박나리(매거진 아트마인 콘텐츠 디렉터) PHOTOGRAPH 김동오 VIDEO 황승헌(매거진 아트마인 영상 매니저)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완성하는 빌딩은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이자 공간을 환기하는 기억의 요소다. 낯선 도시를 여행하며 마주하게 되는 역사驛舍, 근사한 뷰를 품은 전망대, 동네 모퉁이를 돌아 만나는 쇼핑몰, 산책길에 지나치던 옛 가옥과 고택···. 건축 양식과 규모, 용도를 떠나 누구나 마음에 자신 만의 특별한 공간 한 두 곳은 품기 마련이다.
회화 작가 이예림은 그 특별한 사연을 간직한 ‘장소들’을 건축물로 은유 한다.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훌쩍 뉴욕으로 떠난 여행에서 “건물들이 어느 순간 내게 말을 걸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는 작가는, 낯선 도시의 건축물로부터 마음의 위안과 삶의 방향성을 찾았던 특별한 경험을 간직한다. “도심의 빌딩은 위로와 위안의 개체”라고 말하는 그녀의 작품이 일관된 주제를 내포하는 이유다. 마음 속에 오랜 잔상으로 남아있는, 고요한 의식 속에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억 속의 ‘건물들’을 그리기 시작한지 십여 년. 예술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전통적인 회화’ 교육을 받은 작가는 ‘붓’ 대신 ‘주사기’를 들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날카로운 주사바늘을 눌러 가며 건물의 선과 면을 그린다.
작가는 2012년, 팔레 드 서울에서의 첫 전시를 시작으로 네이버 사옥, 갤러리써포먼트, art247 등 정통 갤러리와 복합문화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며 도심의 다양한 ‘얼굴’을 알려왔다. 그렇다고 모든 도시를 그려온 것은 아니다. 자신이 살고 머물며, 오랜 시간을 곁에 둔 도시, 그곳에서 경험했던 일상 속의 건물들을 화폭에 담아낸다. 건축도면처럼 정교하고 대칭을 이룬 건물이 아닌, 스스로가 머릿 속에서 도식화한 그림을 재건축하는 셈인데, 그렇다보니 보이는 것은 건물이나 작가의 마음이 담긴 건물들도 여럿 된다. 그녀가 아이를 키우며 오랜 시간 머물던 상하이 조계지의 건물을 담은 ‘상하이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빌딩’과 ‘주사기’라는 흥미로운 소재로 빚은 완결한 작품들은 어느 공간 속에 놓여도 조화를 이룬다.
전통적인 회화 도구인 붓이 아닌, ‘주사기’라는 의외의 회화 도구로 작업을 해오고 있어요. 어떤 계기로 주사기로 그림을 그리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주사기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작업을 소개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크게 강조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책 편집 디자이너로 직장생활을 하다 2011년 여름 뉴욕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펜화 작업이 시작됐죠. ‘종이와 펜’으로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당시 뉴욕 풍경을 스케치해 한국 지인에게 엽서처럼 보냈는데, 돌아와 그것들을 모아보니 제법 되더라고요. 갤러리에 선보였더니 '드로잉' 이 아닌 '페인팅'에 대한 요청이 있었고, 그러면서 펜처럼 명확한 드로잉 효과를 낼 수 있는 소재를 찾다 주사기를 떠올렸어요. 저는 펜으로 그린 드로잉 자체로도 작품으로서 완결성을 갖는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제 작품을 보고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채색이 들어간 ‘회화’였던 거죠. 그 때 대학시절부터 가끔 해오던 ‘주사기 작업’이 떠올랐어요.
주사기를 통해서만 구현할 수 있는 ‘선’의 느낌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제 작품은 소위 ‘선 맛’이 강해요. 건물의 외관을 채색보다는 오로지 선으로만 표현하다 보니 주사기 바늘로 그을 때의 꼿꼿한 느낌이 잘 표현되지 않더라고요. 주사기로 물감을 쏘아 그렸을 때, 견고한 물성이 그대로 나타나면서도 자유로운 선의 표현이 가능하고, 또한 생각치 못한 의외의 효과가 나오는 것 같아요. 2003년 경 그러한 시도들을 했고 과거 작업물을 찾으면서 지금 작품의 근간을 마련할 수 있었어요.
바늘 굵기에 따라 다양한 선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워요.
숫자가 높아질수록 얇은 선을 표현할 수 있어요. 21호 굵기로 주로 작업하고, 작은 그림을 그릴 땐 26호도 사용해요. 18-19호를 쓰려면 물감의 농도가 굉장히 짙어야 가능하죠. 지금은 주사 굵기, ‘게이지’가 중요하지 않아요. 초반에는 그런 환경들에 영향을 받았지만 많이 능숙해진 덕분이죠.
유화가 아닌 아크릴을 선택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주사기 바늘을 통과해야 하는 재료를 찾다 보니 좀 더 텍스처가 묽은 아크릴이 적합하더라고요. 마르는 과정에서 선과 라인이 납작해지며 입체적인 요소가 반감되다 보니 근래 들어 재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주사기 바늘을 투과한 직후의 ‘봉긋했던’ ‘선과 점이 평면적으로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 같아요. 유화는 좀 더 섬세한 텍스처 표현이 가능하다 보니 올해는 주사기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매체를 테스트 해볼 예정입니다.
주사기 바늘이 캔버스를 긁는 소리, 아크릴이 소모되며 주사기 내부에서 공기와 기포가 만나 파생되는 소리 같은 작업을 하면서 발생하는 ‘소음들’이 인상적이에요.
처음에는 주사기 피스톤을 누르며 작업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물감의 농도를 조절하며 엄지 손가락을 눌러내다 보니 관절에도 무리가 오고요. 아크릴이 굳으면서 주사 바늘 주입구가 막히기 때문에 수건으로 불순물을 훔쳐내는 작업도 필요하죠. 주사 바늘로 캔버스를 굉장히 힘있게 그어가며 작업하다 보니 소음이 꽤 커서 늦은 밤에는 피하는 편이에요. (웃음)
밑 작업으로 채색을 구역별로 한 다음에 주사기를 통해 디테일을 잡아가고 있어요. 그림을 그릴 때 아예 ‘어떻게 그리겠다’는 구상을 마치고 시작하나요.
시리즈마다 다른 것 같아요. 제가 근래 관심을 쏟는 ‘한옥 시리즈’는 말 그대로 ‘패턴의 연속’이라 할 만해요. 한옥의 주요 요소인 지붕의 경우, 어떤 정해진 형태가 아닌 패치워크처럼 기와를 잇는 작업이거든요. 그렇다 보니 머릿속에 큰 그림만 그린 채 계속 선을 채워가는 거에요. 뉴욕이나 상하이 시리즈처럼 ‘건물’ 하나가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경우, 머릿속에 형태가 정교하게 합의되어 있어야 해요. 머리에 건축물의 구조가 완벽하게 그려져 있어야 가능하죠.
‘건물과 나’ 사이의 대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그림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상하이, 방콕,서울과 같이 다양한 도시의 건물을 담고 있는데, 주로 작업을 위해 어떤 교감이 선행되는지 궁금합니다.
상하이 시리즈 경우, 제가 실재 그 도시에 오래 거주했었기 때문에 건물에 대한 교감을 많이 나눌 수 있었어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매일 산책하던 길 모퉁이에 자리하던 은행, 그 1층에 자리한 ATM 같은 요소들이 생생하죠. 그렇다고 그림을 통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선과 색, 조형요소만으로도 제 감정이 드러나도록, 약간은 ‘쿨 한’ 태도를 유지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건물을 그리지만,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건물과 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거든요. 제가 사람을 그리지 않고 건물만 그리는 것은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 같아요. 사람과도 결국 적당한 거리감이 있어야 편하더라고요.
‘적당한 거리감’을 원한다는 건, 어쩌면 일정하게 오랜 시간 관계를 유지하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여행을 떠나 몇몇 랜드마크를 통해 그 도시를 알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도시의 문화와 사람까지 제대로 알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잖아요.
맞아요. 그래서 건물도 사실은 저도 제가 건물을 왜 그리는지 물어보는 시간이 있었고, 2017년도에는 슬럼프가 굉장히 길게 찾아오기도 했어요. 지금은 그 답을 조금 찾아가고 있죠. 어떤 분은 ‘뉴욕 시리즈’의 경우 대상에 압도당하는 지배적인 기분이 있고, ‘상하이 시리즈’ 건물들에는 감정을 담은 ‘사람’ 같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언뜻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건물들이 몇 개월 뒤 다시 방문해보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다르게 지어져 있기도 하고, 굉장히 견고해 보이나 실상 그 안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 복잡한 마음들을 품은 채 오갈 테고요. 있고요. 평온해 보이지만 그 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감정은 다르니까요. 저는 건축물도 언뜻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 우직해 보이나 그 안에는 다양한 드라마를 품고 있는 감정의 개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복합적인 해석들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견고한 긴장감이 유지되어야 하고, 그런 측면에서 때로는 건물 내부를 경험하지 않고 멀리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경우도 많죠.
모든 작가분들이 그렇지만, 내적으로 많은 고민들을 한다는 인상을 받아요.
뉴욕에서 한국에 돌아와 작업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막상 바로 그림을 시작할 수 없었던 것도 생각이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게 의미가 있을까’란 생각이 지배적이었죠. ‘무의식적인 선의 흐름’을 그려가던 중 우연히 들른 겸재 정선의 전시를 보고 작업의 확신을 얻었던 것 같아요. 정선의 스케치와 제 작업의 선이 많은 부분 비슷했던 거죠.
예전에야 산의 능선을 담은 것이 '산수화'였다면, 21세기의 산수라 함은 도시의 빌딩이 만들어낸 '스카이라인'이 아닌가 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예림 작가의 작품을 정선의 산수화의 현대적 재현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선의 색감을 검정색 한 가지만 사용해 완성했다보니 동양화가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최근 작품들은 다양한 색상을 사용하다 보니 조금 평범해진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어요. 하지만 한가지에 갇히기 보다는 틀을 조금씩 깨가면서 제 작업 테두리 안에서 여러 요소들을 시도해보고 싶어요. 요새는 청록색이 많아요. 요즘은 부드러운 색에 빠져있어요.
최근 들어 색을 선택하는 데 훨씬 과감해진 것 같아요.
배경도 거의 화이트에 검정색으로 채색을 해서 완전 드로잉처럼 보이는 작품도 있어요. 초기 작업이 거의 그런 작품이죠. 최근 작들은 컬러감이 두드러지죠. 좋게 말하면 부드러워지고 색이 풍부해졌는데, 다른 면에서는 좀 더 용감해진 것 같아요. 초창기에는 건물 하나 딱 그린 것은 피해갈 구석이 없는데 지금은 조금 여유롭게 즐길 수도 있고요.
앞으로의 작업에 대해서도 소개해 주세요.
최근에는 한옥에 빠져있는데 기와가 재미있는게 패치워크가 가능해요. 서양식 건물은 완벽한 계획 아래 짓는 건데 기와는 한 칸 집부터 99칸 집도 있잖아요. 지붕도 규칙이 있는 듯 없는 듯 자유로워요. 패치워크 식으로 이어나가듯 기와를 작업해요. 우리나라 집이 그런 면에서 재미있는 것 같아요. 시멘트도 섞여있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가운데 옷 기워 입듯이 지은 한옥을 좋아해요. 한국의 대표적인 주거 빌딩인 ‘아파트’에 대한 고민도 하고 있는데, 아직 그림으로 풀어내기에는 주저되는 부분이 있죠. 꿈속의 아파트는 삭막한 곳이 아니라 어린시절 잠자리를 그리던 곳인데 그림으로 그려보니 그저 ‘아파트’인 거죠. 아직은 아이디어가 막 오지 않아서 더 담금질 중이에요. 4월 9일부터 14일까지 밀라노에서 열리는 <아트마이닝-밀라노> 전시에도 참여하게 됐어요. 외국 컬렉터들은 한옥을 그린 '빌리지' 시리즈에 관심이 많더라고요. 한옥 기와의 선이나 그들과는 다른 건축양식을 흥미롭게 보는 것 같아요.
YE-RIM LEE | WESTERN PAINTING
홍익대학교 회화과, 동대학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했다. 출판사에서 아이들 책을 만드는 편집 디자이너로 근무하던 중 작업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뉴욕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만난 마천루 빌딩을 펜으로 드로잉하며 서울에 돌아와 도시의 건축물을 그리고 있다. 2012년 대안공각 충정각에서 연 개인전 <도심발견:NY展>을 시작으로 유중 아트센터, 팔레 드 서울 갤러리 등에서 20여 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2012 아트아시아, 2013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열린 Affordable art fair, 2018 Affordable art fair 암스테르담에 참여하며 해외에도 꾸준히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