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내 속의 무한한 타자를 발굴하는 작업이다.”

불규칙한 형태와 크기의 숯 '한 점'을 규칙적인 간격으로 나열해 설치한 '조합체'는 마치 절대적인 존재가 만들어놓은 어떠한 규칙들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 종속되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기도 한다.
불규칙한 형태와 크기의 숯 '한 점'을 규칙적인 간격으로 나열해 설치한 '조합체'는 마치 절대적인 존재가 만들어놓은 어떠한 규칙들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 종속되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기도 한다.

숯 한 덩이로 시작되는 작업은 연속되며 선이 되고 부피를 가진 공간이 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와 하나의 점은 온 우주의 전부이기도 하다는 함의를, 박선기 작가는 생성과 소멸이라는 양면성을 내포한 숯 덩이로 엮어낸다. 단순 명료한 함축이다.

WRITE 장남미(매거진 <아트마인> 콘텐츠 디렉터) PHOTOGRAPH 최민석 COOPERATION 사비나미술관

“균형과 불균형에 대하여 생각하는 가운데 시작된 작품”이라 한 사비나미술관 설치작품 ‘조합체 201808’ 앞에서 선 작가는 “관람객들이 일상에서 한걸음 물러나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잠시 호흡을 돌려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가 가져온 근본적인 물음은 상호보완적인 ‘상대성(relativity)’임을 알게 되었다. 멀리서 보면 웅장하고 견고해 보이지만 작품 내부로 들어서면 부서질 듯한 숯과 얇은 나일론 줄을 마주하게 되는 조합체, 부분만 봐서는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는 대규모 3차원 공간조각, 앞에서 보면 입체 조각 같지만 옆에서 보면 평면 부조처럼 보이는 ‘시점(point of view)’ 시리즈 등을 보자. 입체와 평면, 부분과 전체, 멀고 가까움 등이 인지적 충돌을 일으킨다. 실재와 환영, 연약함과 견고함, 형태와 본질 등 배치(背馳)되는 개념들이 혼재한다. 그가 지속적으로 제시해온, 부정확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시지각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은, 다층적인 시각으로서 짚어야만 드러나는 ‘진실’과 논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주문인 셈이다.

‘나의 작업에서 모든 것은 존재 문제로 귀결(歸結)된다. 작품에 표현되어 나타나는 존재하는 의미는 참으로 광범위해 진다. 서구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따지자면 눈으로 보여지고, 감각되고, 한 공간을 확보 할 때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사고와, 우리의 눈으로 보여지지 않는 부분인, 하지만 항상 우리의 삶과 함께 공존하는 내적사고(內的思考), 즉 인간의 사고, 의식, 정신 등등 이러한 ‘무존재로서의 존재’까지도 포함하고 있다’고 한 작가 노트는 중요한 힌트이다. 설치 작업은 공간을 점유하며 실제(實際)한다. 전시라는 형식은 유한하다. 그렇다면 작품이 눈 앞에 보이지 않는 순간에는 실재(實在)하지 않는 존재일까? 이러한 고민에 대하여 작가는 ‘물질’이라는 개념을 넘어 ‘인간’의 의미론으로까지 확장시키는 작업을 해왔던 것이다. 반면 시간이 갈수록 그의 작품은 시각적으로 단순해져 왔다. 숯이나 크리스털 같은 소재에서 아크릴 구슬이나 탁구공, 유리와 같은 가벼운 소재로 전이되어 왔다. 그렇다고 “장인적인 몰입과 수도자의 엄격한 수행에 버금가는 노동의 수고”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짚어야 하는 지점은, 그가 영구 불멸하게 획득하려는 정체성이다.

전통적인 조각 개념을 탈피한 새로운 현대미술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온 박선기는 현재 새로운 ‘변화’를 계획 중이다. “요즘은 생각하는 일을 주 업으로 삼고 있다”는 한 마디가 깊게 박혔다. 작가는 어느 누구의 지원도 없이 밀라노 유학을 떠나 생계를 병행해야 했던 시절을 이야기했다. “한 순간 돈 버는 일을 그만두고 굶어 죽더라고 작업만 한다”고 결심하고 매진했고, 그 과정을 통해 작품을 팔아서 먹고 사는 전업 작가로 온전히 일어선 경험이다. 하지만 현재 겪는 격렬한 ‘과도기’는 과거와는 다르다. 그의 바람은 단순 명료하다. 더 깊이 있는 작품 세계에 다다르기 위한 이유 있는 침잠이다. 그 동안에도 바깥 세상에서 ‘박선기 작품’은 분명히 존재할 터이니.

박선기 작가의 작품은 현장에서 직접 대면해야 한다. 작품이 놓인 공간 역시 작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박선기 작가의 작품은 현장에서 직접 대면해야 한다. 작품이 놓인 공간 역시 작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사비나미술관 신축 재개관기념 특별전 <그리하여 마음이 깊어짐을 느낍니다 : 예술가의 명상법>에서 선보인 ‘조합체(An aggregation) 201808’은 어떠한 관점으로 장소를 재해석하고 설치한 작업인가요?
공간에 있는 기둥을 사이에 두고 제 작품에 건축물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접근법으로 설치했어요. 보통 ‘조합체’에는 통로를 만들어 관객이 직접 작품에 참여하게 만들었다면, 이번에는 사람을 대신하는 기둥을 넣은 셈이에요. 이 작품은 규칙과 불규칙에 대한 이야기에요. 불규칙적인 것들을 규칙적으로 나열하는 방식으로요. 그러고 보니 제가 존경하는 최병소 선생님 작품이 바로 앞에 있네요. 신문지 위에 볼펜과 연필로 자를 대고 선을 그어 글씨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지우는 작업을 40여년간 이어오고 있는 최병소 선생님은 근본적으로 작품에는 평생을 이어온 끈기가 보이고, 섬세함과 깊이감도 있어요.

작가가 작업을 통해 이뤄가고자 하는 방향성이 드러나는 키워드네요.
오랫동안 하면서 느끼는 점이에요. 저는 최병소 선생님 작품처럼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만들어진 깊이감이 있는 작품을 좋아해요. 요즘 디지털 프린트가 발달하면서 조각가들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어요. 10년만 더 지나면 기계가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일 정도에요. 오히려 아티스트의 역할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처럼 변화하고 있어요. 제 작업실에서도 작은 모형을 만들 때는 디지털 프린트를 사용해요. 대단히 편리해졌지만, 거기에선 늘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요. 그것이 바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체취, 느낌, 감정일 텐데, 이조차 커버 가능한 기술이 나타나겠지요. 어릴 때는 이렇게 노동집약적인 일을 하리라고 생각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더 간단한 일을 하고 싶어했죠. 그래도 시간을 쏟아 만드는 작업이 주는 성취감이 더 커요.

모든 작업을 꿰는, 가장 원천이 되는 원형적인 모티프는 무엇인지요.
미술을 시작하면서 어떤 길로 나아갈지 생각의 범위를 줄여갈수록, 제게 좋다고 남는 것은 인간의 힘을 더하지 않은 상태, 즉 우주의 섭리 그대로 저절로 이루어진 상태인 ‘자연’으로 함축됐어요. 특히 ‘바람’을 참 좋아해요. 산, 나무, 물 등 자연이라는 대상은 다 좋은데, 작품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당시에는 자연의 대표격으로 나무를 선택했어요. 그리고 표현 연구를 이어가며 인간 문화에 대한 주제를 접목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인간이 거주하고 활동하는 공간인 건축 문화에 닿았어요. 건축의 중심 요소인 기둥, 아치, 문, 계단을 모티프로 설치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개인적으로 구조적인 대상에 이끌려요. 제가 근본적으로 천착하는 사물은 이상하게도 자(ruler), 컴퍼스, 잘 깎인 연필 같은 거에요.

An aggregation 20170210, 2017. Installation. Acrylic beads, Nylon threads, etc. 360(h)cm.
An aggregation 20170210, 2017. Installation. Acrylic beads, Nylon threads, etc. 360(h)cm.
낱낱의 개체들이 하나의 집합체로 하모니를 이루는 단순 명료한 광경 앞에서 순간적으로 압도된다. 만져지지 않는 바람처럼, 늦은 오후의 마지막 햇살처럼, 찰나에도 충만하게 차오르는 아름다운 자연과 같이.
낱낱의 개체들이 하나의 집합체로 하모니를 이루는 단순 명료한 광경 앞에서 순간적으로 압도된다. 만져지지 않는 바람처럼, 늦은 오후의 마지막 햇살처럼, 찰나에도 충만하게 차오르는 아름다운 자연과 같이.
An aggregation 130121-c, 2016. Installation. Acrylic beads, Nylone threads, etc. 730(h)cm.
An aggregation 130121-c, 2016. Installation. Acrylic beads, Nylone threads, etc. 730(h)cm.

내제적인 면에서 작가가 천착하는 사물에서도 기하학적 성질을 가진 대칭성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요.
자와 같은 대상은 어떠한 면에서 대단히 이상적인 사물이죠. 반대로 나무와 같은 비이성적인 대상도 아주 좋아하거든요. 동시에 내제하는 것 같아요.

바람이 불면 자연스레 흔들리는 공간 조각은 ‘매다는’ 행위로서 표현 범위를 확장시킨 작업이에요.
밀라노 국립 미술원 재학 때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우연적인 발견이 있었어요. 조각과 나무를 모티프로 자연과 인간 문화에 대한 관점을 표현해보려는데 쉽지 않더군요. 젊은 작가일수록 백지 상태에서 자기 것을 찾아내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죠. 저는 우연히 나무 이야기를 하다가 숯을 쓰게 되었는데, 어느 날 순간적으로 매달아 계단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서도 매다는 기법을 시도했지만, 돌과 같은 소재는 무게에 문제가 있었어요. 하지만 숯은 가볍고, 바람에도 살랑살랑 움직이죠. 그렇게 매다는 작업이 시작됐어요. 숯에 대한 얘기를 덧붙이면, 사실 저는 검은색을 썩 좋아하지 않아요. 자연적인 검정은 좋아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물감이나 옷감의 검은색은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검다고 느껴지거든요. 잘 관찰해보면 세상에 검은색이 잘 없어요. 그렇지만 숯은 자연적인 검은색이고, 어떤 때는 빛을 받아서 새하얀 느낌도 들어요.

검은색에 대하여 짚어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어 보여요.
숯을 소재로 사용하는 작품을 두고 특히 외국 사람들은 동양의 수묵화에 빗대어 이야기하는데, 사실 제 작업에서 숯은 ‘점’의 요소에요. 점, 선, 면이라는 조형의 기초에 충실하게 만들어 왔고, 요즘은 좀 더 ‘선’적인 작업을 다양하게 실험하고 있어요.

A play of point of view 1101, 2010. Coloring on steel, stone, etc. 300(h) x 85 x 40cm.
A play of point of view 1101, 2010. Coloring on steel, stone, etc. 300(h) x 85 x 40cm.
Point of view 08-112, 2008. Pencil coloring on the mixed media. 75 x 38 x 120(h)cm.
Point of view 08-112, 2008. Pencil coloring on the mixed media. 75 x 38 x 120(h)cm.

전통적인 조각에서부터 공간 조각, 드로잉, 회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요.
대학 시절, 제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 이유부터 이야기가 필요하네요. 작가 혹은 학교 선생으로 살지 정말 오래 고민했어요. 병행할 수는 없으니 작가로서만 살기로 결정했고, 학교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먹고 살아갈 것인가? 일단 여러 가지를 해야 하고, 여러 나라와 일하며 시장을 넓혀야 한다고 봤어요. 그 생각들은 대부분 맞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어요. 여기서 제가 쉬고 있어도 여러 나라의 화랑들에서는 제 작품을 팔고 있거든요. 적어도 몇 년은 시간을 투자해 스스로 시장을 개척하는 노력이 필요해요. 먹고 사는 걱정이 없어져야 제대로 작업할 수 있거든요.

생계의 걱정을 털어낸 시기를 대단히 이르게 이뤄냈어요.
밀라노 유학을 가서 생계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어느 순간 한심해지더라고요. 이걸 하려고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닌데. 돈 버는 일을 모두 접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찾아 다녔어요. 그러다 밀라노 소재의 한 화랑과 일하게 되었죠. 그렇게 시작해서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전 세계에 작품 판매도 많이 됐고요. 개인 컬렉터들도 많이 알아요. 설치 작업의 특성상 직접 가야하니까요.

가장 기억에 남는 개인 컬렉터를 꼽으라면요.
오랜 기자 생활 후에 작은 신문사를 인수해 운영하던 분이에요. 작품을 사고 싶으니 작업실을 방문해도 되겠느냐 연락해왔어요. 그런데 작업실에 컬렉터 부부, 아들 부부, 손자까지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이 왔어요. 더욱 놀란 일은 작품 설치를 위해 방문해서예요. 로마에 스페인 광장이 보이는 대저택인데, 벽에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작품이 걸려있더라고요. 지오 폰티부터 루치오 폰타나, 코넬리우스 등 세계 유명 거장들 작품이 한데 있었어요. 이 가족은 작품을 구입할 때마다 아이들도 데려가서 하나씩 같이 사요. 처음 컬렉터는 기둥을, 다른 분은 대문을 사갔어요.

일찍부터 안목을 키우는 공부네요.
캔버스를 칼로 찢거나 구멍을 뚫어 ‘공간 개념’을 회화에 부여한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 작품은 현재 한 점이 몇 백 억을 호가 하는데, 없어서 못 팔죠. 그런 작품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월급 받아서 할부로도 사왔던 거에요. 안목은 볼수록 늘어요. 자신들이 좋아하는 작품만 샀는데도 위대한 컬렉션을 이루게 되었죠. 그 사람의 아버지 정도면 1960~70년대인데, 이탈리아 미술이 굉장히 강성했던 시대에요. 유명한 작가들이 많은 때라 시기도 잘 만났지만, 그 안목도 참 대단했다고 인정해야죠.

Exsitence, 2001. Installation. charcoal, nylon threads, plant, etc. 700(h)cm.
Exsitence, 2001. Installation. charcoal, nylon threads, plant, etc. 700(h)cm.
An aggregate-stair 2008, 2008. Istallation. charcoal, nylon threads, etc. 1250(h) x 300 x 300cm.
An aggregate-stair 2008, 2008. Istallation. charcoal, nylon threads, etc. 1250(h) x 300 x 300cm.

“작품에서 숯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인 나일론 줄은 한 올인 경우 그 존재가 시각적으로 미미할 수 있으나 수많은 줄로, 그것도 서로 중첩된 것으로 나타나면 단지 숯을 매달고 지탱하는 지지대의 기능을 넘어선 것이 된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검은 숯 덩어리와 조응하여 공간을 활성화시키는 요소가 된다. 어떤 경우 줄의 존재가 제시됨으로써 숯이 단지 허공에 부유하는 것이 아니라 견고한 구조 속에 고정된 것임을 지각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숯으로 만들어진 사각형이나 기둥과 같은 형태가 투과성이 높은 것이긴 하지만 매스와 볼륨을 지닌 것으로 지각되는 것이다.” _최태만 (미술평론가)

또 한 명의 인상적인 컬렉터를 만난 경험이 있다고요.
갤러리 313 개인전 <Reflection> 당시 발표한 11미터 크기의 숯 작품을 샀어요. 유럽 최고의 부자인 베르나르 아르노 (Bernard Arnault) 회장인데, 제 작품을 설치할 방을 새로 만들 계획이라고 하더군요. 설치작품은 보통 기업들이 컬렉션하고, 그마저도 분해되는 작품은 잘 구매하지 않는데 여섯 점을 한 번에 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어요. 다른 면에서, 보통 사람들은 드로잉 작품을 잘 컬렉션하지 않아요. 사실 모든 작업의 출발점이 되는 드로잉 가운데 좋은 작품이 많거든요. 그래서 제가 사려고요 하하하. 사놓은 작품이 80점 정도 있어요.

어떤 작품들을 수집해왔나요?
투자의 관점에서 판단한 컬렉팅도 있지만, 제 마음에 차는 작품이라는 점이 겸해지면 무리를 해서라도 사요. 반 정도는 젊은 작가들을 도우려고 작품을 샀어요. 하지만 40점 정도에서 그만뒀어요. 그보다 제 마음에 들어서 산 작품들은 시장 가치도 상승되더군요. 최병소 선생님 작품도 몇 점 있어요. 꾸준히 오래 작업해온 중견 이상 작가들 작품은 그 값어치가 쉽게 떨어지지 않아요. 자연스레 저도 컬렉터의 태도나 관점도 배우게 되더군요.

인생의 후반부를 보낼 새로운 작업실과 집, 그리고 미술관을 짓는 중이에요. 설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리라 짐작되네요.
많이 개입했어요. 재료와 물성만 가진 아주 단순한 형태의 ‘조용한 집’을 짓고 있어요. 도시를 보면 너무 복잡해서 정신을 잃을 정도잖아요. 최대한 모양 내지 않는 쪽이 좋아요. 제 집을 짓는 데에 절대 곡선을 지양하고 직선만 써달라고 주문했어요.

작가의 공간 조각은 건축적인 요소에서 가져온 모티프들이 다수에요. 저는 계단 형태를 좋아해요. 높이와 너비에 따라 보폭이 결정되고 속도성도 달라지는 계단은 시대의 문화를 닮는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지점이 있어요.
새로운 계단 작업을 대만 개인전에서 선보이게 될 텐데, 규모가 큰 구조물을 만드는 일은 재미있는 것 같아요. 올해 3월 예정되어 있는 부산시립미술관 설치 작품은 길이 30미터가 넘는 큰 공간에 설치하는 한 작업이에요. 한옥의 건축 구조를 이용한 행잉 작품으로, 제가 만들어온 단일 작품으로는 전시장에 들어가는 규모로 제일 큰 작업이에요. 샌프란시스코 디자인 페어 현장 중앙에 커미션 작품도 논의 중인데, 기둥 양식의 공간 조각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다시 건축가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건축의 역사를 풀어보면 로마 시대에는 조각가들이 집과 건물을 지었거든요.

An Aggreration 10-05, 2010. Installation. Charcoal, Nylone threads, etc. 70 x 70 x 270(h)cm.
An Aggreration 10-05, 2010. Installation. Charcoal, Nylone threads, etc. 70 x 70 x 270(h)cm.

“나는 우주섭리를 통 털어 모든 세상의 중심을 인간으로 이끌어가는 서구 물질문명사회를 그리 올바르다 생각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의 객체이며 자연 속에 존재하는 한 그루의 나무나 돌과도 같이 별반 다를 바 없음이 나의 생각이요 또한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 있게 공존하여야 함이 이 두 관계에서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또 한 가지 생각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 시대 인간이 만들어가는 화려한 인류문명의 역사 뒤에 가려진 자연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러한 전제를 바탕에 두고 나의 작업 속에서 기본 형태를 형성하며 강하게 제시하는 구조는 무척 예민하고 가벼운 그리고 거의 보이지 않는 나일론 줄로 자연 에너지로서 소멸의 상징적인 대표 격으로 숯을 공간 내에서 논리적으로 나열시켜 나타난다. 이러한 구조들은 인간이 사용하는 유용성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허상의 허구를 표현코자 함이며, 나에게 있어서 숯은 표면 가장 깊은 것으로부터 숨겨진, 그리고 지질학상으로 혹은 자연적인 연소로부터 나무가 타서 남은 그러한 자연의 한 장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엔 나의 존재 조건 속의 재료이며 제시된 형태에 부합되는 파생효과는 이 재료에서 시작된다. 결국 숯은 건축물의 한 형태의 벽돌과도 같은 것이다.” _박선기

이전에 건축가의 꿈을 가져보지는 않으셨나요?
인생을 두 번 살 수는 없으니까요. 하하하.

숯, 유리, 아크릴, 크리스털, 컬러풀한 탁구공까지 다양하게 재료를 확장해왔어요. 사용하는 재료가 작업의 모두를 함의하지 못하지만, 재료가 가진 물성이 작품 주제와 연결되는 지점이 분명히 있어요.
작가는 요리사와 비슷하게 여러 가지로 많은 재료를 다뤄볼수록 좋다고 봐요.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재료는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파생된 숯인데, 요즘은 거울에 관심이 커요. 깨졌든 완전한 면이든 거울은 무언가를 계속 함유하고 있거든요. 대상을 비춰주고 반사하는 속에 뭔가가 들어있다는 면에서 재미있는 재료에요. 앞으로 새롭게 해나갈 작업에서 적극적으로 실험해보려고요. 색채에도 관심 많아요. 색이 들어 있는 작품을 해보고 싶은데, 일테면 종이 작업으로 모형부터 만들어보려고요. 큰 사이즈가 아니니 혼자서 재미있게 만들기가 가능해요.

거울 작업은 작가의 자화상이 될 수 있겠다고도 보여요.
(크게 웃으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몇 번 거울을 소재로한 작업을 해봤는데, 가장. 흥미가. 진진해요. 역발상적으로 접근해 풀어보기에 좋은 재료라서 계속 끌고 가 보려고요. 무엇을 하든 좋은 작품이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단순한 문제인데, 계속되는 작업에서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하는 가운데 좋은 작품이 나오도록 만들어야만 진짜 좋은 작가라고 봐요.

An aggregation 20170207, 2017. Installation. Colored table tennis balls, Nylon threads, etc. 330(h) x 810 x 450cm.
An aggregation 20170207, 2017. Installation. Colored table tennis balls, Nylon threads, etc. 330(h) x 810 x 450cm.

매개되는 재료는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지만 투명성을 가진 나일론 줄은 조합체를 이루면서 공간성을 가져요. 어떻게 보면 건축에서 ‘기둥’과 같은 역할로서 계속 쓰여왔어요.
그렇죠. 매단다는 행위로서 꼭 필요한 재료니까 제 작품에서 기둥 같은 역할인데, 앞으로는 그런 것도 다 배제하고 새롭게 해보려고요. 과도기인 것 같아요. 머리 속은 복잡한데 문제는 바쁘다는 데 있어요. 지금 짓고 있는 안성 작업실에서 많은 작품을 하게 될 테지만, 저는 더 남쪽으로 내려가 남은 시간을 가지려고 해요. 저와 조수들의 작업을 이분화시키려고요. 작품도 외국 일을 7할, 한국 일을 3할 정도로 가져가려 하고, 전시도 대폭 줄이려고 해요. 일단은 제 자신에게 먼저 충실한 시간을 갖고 그 다음을 생각하려고요. 작품의 방향성도 많이 바뀌어야 해요. 예를 들면, 컴퓨터를 업그레이드 시켜야 하는 시기가 온 거죠. 절대적으로 혼자 있을 시간이 갈급해요. 하고 싶은 것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리 속에 너무 많이 오가요.

작가의 연대기에서 대단히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시기네요.
이제 뒤편을 보기 위한 중간과정이라고 봐야죠. 한 계단씩 올라가는 과정에서 바꿔가야 해요. 옛날처럼 시간에 쫓겨 하는 일들은 안 하려고요. 뭘 하더라도 좋은 작품이 되게, 걸작이 되는 것을 만들려고 싶어요. 큰 작품도 다양하게 시도하고 섬세하게 만들려고 해요.

“섬세하게”라는 부분이 귀에 박히네요. 시점에 관심을 두고 인간의 부정확한 시각에 대해 다룬 이전작, 그리고 균형과 불균형이라는 레이어의 작업인 근작과 같이, 앞으로의 작업을 키워드로 정리한다면요?
모든 것에 대하여 거두절미하고, 일단은 주제 없이 하고 싶은 것을 해보자. 모형을 여러 가지로 만들다 보면 뭔가가 일어날 거에요.

진심으로 노는 시간이 절실하다는 뜻이네요.
혼자서. 남들하고 상관 없이. 재미나게. 그래서 빠르게 주변 일들을 안정시키려고 노력 중이에요. 어쩌면 한꺼번에 이 모든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시간을 버는 일 같아서 한꺼번에 하고 있어요. 오랫동안 일하다 보니 작가로서 사회에 해야 될 일은 무언가 하는 생각도 늘어나요. 하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어요. 재미있어질 거에요.

주제를 찾고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토대가 되는 관심사들은 무언가요?
작가에게는 생각을 지속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저는 매직으로 쓰는 행위를 좋아해서 매일 무언가를 쓰고 또 봐요. 노트는 덮어 놓으면 안 보여 잊어버리니까, 매직으로 자유롭게 쓰고 지우기가 가능한 큰 거울이나 유리가 있는 공간이 좋아요. 항상 거기에 무언가를 쓰다가 어떤 공부가 필요해 보이면 그 순간부터 부단히 찾아요. 지속적으로 제 작업에 대해서 항상 생각하는데, 요즘은 정말 과도기에요. 확답을 못하겠어요.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떤 작품으로 끌고 가느냐가 관건이니까요. 지금 새롭게 변화해 끌고 가기 시작한다면, 제 인생에서 시도하는 마지막 변화이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10년은 금방 가거든요. 그 다음부터는 정리에요.

Slice of sensitivity 150713-Bycycle, 2015. Drawing. 265 x 456cm.
Slice of sensitivity 150713-Bycycle, 2015. Drawing. 265 x 456cm.
Slice of sensitivity 150714-Ruler, 2015. Drawing. 60 x 230cm.
Slice of sensitivity 150714-Ruler, 2015. Drawing. 60 x 230cm.

이전 시기에도 이렇듯 격렬한 과도기가 있었나요? 사건이나 계기가 된 한 순간을 꼽는다면요.
유학 가서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있더라고요. 생각이 나야 뭐든 하잖아요. 결단이 필요했어요.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돈을 보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거기서 스스로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돈 버는 일을 하루 아침에 치웠어요. 그리고 6개월동안 미친 듯이 작업만 했어요. 굶어 죽더라도 그냥 작업을 한다고 마음 먹으니 머리가 마구 돌아가더라고요. 그때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숯이라는 재료도 찾았고요. 제가 볼 때는 상황을 좀 극단적으로 몰고 가야 하나라는 생각도 있어요. 하지만 현재는 그때처럼 되지 않을 테니, 제 시간을 많이 가져야 분명한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사실만은 알아요. 요즘은 생각하는 일을 주 업으로 삼고 있어요. 생각에 생각, 하루 종일 생각만. 그게 제 하루 일과에요 요즘. 해왔던 일이 안 중요하게 됐어요. 새로운 일을 해야 하니까. 과도기 맞아요. 계단을 걸어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빨리 올라가야겠다는 생각만 들어요. 다른 곳으로 포지션 이동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재료부터 여러 가지가 바뀔 거에요. 그러면 필연적인 시간이 있어야 하니까 이것 저것 하다 보면 10년은 금방 가지 않을까요! 다른 짓 안 하려고, 만나는 사람도 점점 줄이고 전시고 없애고. 먼 곳으로 가는. 그런 시기에 닥쳐있네요.

마지막으로, 오는 4월 밀라노와 5월 파리에서 선보일 아트마이닝 글로벌 프로모션 출품작 ‘An Aggregation 190111’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이 작품의 소재는 숯이에요. 숯은 그 자체로도 실재이면서 동시에 그 원형이었던 식물의 부산물이기도 하죠. 작품 감상을 드나들며 견고성 저 너머에 있는 부서지기 쉬움 즉,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존재의 나약함을 발견하게 될 거에요. 그런가 하면 부서지기 쉬운 형태가 실재가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실재의 본질에 대해 사색할 수도 있어요. 작품은 단순하면서도 구조적인 형태와 설치된 장소를 이러한 생각하는 장소로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물리적 실재 너머의 개념적 실재까지 넘나들게 만드는 통로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An aggregation 20170106, 2017. Installation. charcoal, nylon threads, etc. 160 x 160 x 680(h)cm.
An aggregation 20170106, 2017. Installation. charcoal, nylon threads, etc. 160 x 160 x 680(h)cm.
An Aggregation 190111, 2019. Installation. 150 x 25 x 220(h)cm.
An Aggregation 190111, 2019. Installation. 150 x 25 x 220(h)cm.

“숯을 공간에 매달아 이 장소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과거와 현재, 존재와 무, 실재와 환영(illusion), 가변성과 영속성, 동양과 서양 등의 경계를 뛰어넘는 매력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숯은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에게 ‘정화(淨化)’란 상징적 의미를 지닌 물건으로 일상 속에 자리해 왔다. 최근 환경생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숯은 전자파의 차단, 정수, 공기정화, 무기질 섭취 등의 이유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숯이 지닌 효능에 대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할지라도 작품에서 중요한 재료이자 매체인 숯이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고려한 결과라고 볼 수는 없다. 일단 그의 작품이 건축물의 특정 부위나 혹은 건축적 구조의 재구성이란 측면이 두드러지는 만큼 불에 탄 식물이 남긴 탄소덩어리에 과도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일론 줄에 매달아 형태를 구성해가는 그의 작업방식은 그가 의식하였든 그렇지 않든 새끼줄에 매단 숯을 연상시킨다. 이때, 숯은 공간에 흑백의 드로잉을 하기 위한 도구의 차원을 넘어 이 공간 내부를 깨끗하게 만드는 심리적 위생처리의 역할도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숯이라는 재료가 가지는 정화기능, 시적 감수성을 이용한 작품이라 유동성이 많은 공공장소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작품이다. 어느새 감상자는 공간에 떠있는 원반의 형태를 통해 우주를 부유하는 물체처럼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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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기 | SEON-GHI BAHK
1966년 경북 선산 출생. 1994년 중앙대학교 조소과 졸업, 2002년 밀라노 국립 미술원 졸업. 2006년 제9회 김종영 조각상 수상. 유년의 기억은 거침 없이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뛰놀았던 시간에 깃들어 있다. 이탈리아 유학 기간을 포함하여 영국 런던, 독일 만하임 등에서 11년 동안 활동하다 귀국한 작가는, 1990년대 이후 미술의 다원화가 확산되며 나타난 새로운 경향인 설치미술에 전통적인 조각 장르의 개념을 뛰어넘는 3차원의 ‘공간 조각’을 통해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한다. 자연 소재인 ‘숯’을 매다는 방식으로 인간의 건축 문화에 대한 주제를 접목시켜온 작업은 동서양의 정서를 넘나든다. 작품 소장처로는 국립현대미술관, 김종영미술관, 제주 본태박물관, 포항시립미술관, 장흥 아트파크미술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서울 신라호텔, 서울 웨스틴조선 호텔, 안성 3.1운동 기념관, 홍콩 타임스퀘어, 파리 루이비통 파운데이션, 스위스 PKB 프라이빗 AG뱅크 외 전 세계 미술관과 기업 등이 있으며, 이탈리아 FIAT 그룹 움베르토 아넬리 회장, Buffetti 그룹 마시모 부페띠 회장, ㈜Dasassociati 클라우디오 라 비올라 대표, 프랑스 루이비통모엣헤네시(LVMH) 그룹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 등 세계 각지의 개인 컬렉터들로부터 꾸준히 컬렉션 되고 있다. www.bahkseongh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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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미지 © 박선기 – ARTMINING, SEOUL, 2019
PHOTO © ARTMINING – magazine ARTMINE / 최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