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가 휘어지게 감이 열린 나무가 오래 뿌리내리고 사는, 볕이 잘 드는 이층집에서 작업하는 권기수와 만났다.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즈음, 개인전을 치르는 중인 작가와. 1부 전시는 진행 중이고, 2부의 시작을 앞둔, 독특한 형식의 개인전을 치르고 있는 그는, 새삼 알고 보면 늘 어떤 ‘사이’에 있었다. 그는, 이쪽과 저쪽의 경계에 눌린 심정을 이제는 좀 풀어놓으려 한다며 활짝 웃었다.
아! 저기 있었구나! 앙 다문 입매에 굳게 매어 단 의지도, 클클클 오기 서린 시니컬한 웃음도, 오늘 아침 활짝 핀 나팔꽃 같은 미소도, 그의 작업에서 중심이 되어온 ‘동구리’에게 모두 있어온 것이었다.
“은둔하던 작가 시대의 신화가 모두 붕괴된 오늘날, 사교적이지(sociable) 못한 작가로 살고 있다.” 역행하기에는 불가항력이므로 ‘극복’이 필요하다 한 작가 권기수는, 슬레이트를 치듯 박수를 “짝!” 친다. “2013년 연기자 한효주 씨와의 협업 프로젝트 이후 스튜디오에 전문 촬영 장비가 들어온 일은 처음이에요.” 한 동네 사람들도 정체를 잘 모른다는 연남동 작업실을 잠시 탐색했다. 전면부는 10여년 전 지은 현대식 공간이고, 뒤채는 반질반질한 나무 난간에서 연식이 짐작되는 1970년대 구가옥이다. 시간의 층위가 ‘다른 두 공간’이 권기수 작가를 통해 연결된 셈이다.
“공간이 가진 정서가 제 작업과도 매치되어 재미있어요. 완전히 현대적으로 보이지만 옛 것을 기반으로 갖고 있잖아요. 2011년 입주했는데, 그 사이 생활의 흔적이 많이 쌓였어요.” 그야말로, 초현실적이다. 이곳 2층에서 작가는 한창 ‘드로잉’을 하며 지냈다. 성수동 아틀리에 아키에서 치르고 있는 개인전의 2부 <Drawing>전이 이곳에서 발현되었다.
조선 화조화에서 희망을 의미하며 다양한 계층의 예술가들이 주목했던 소재인 파초를 재해석한 신작을 전시하는 1부 <파초(芭蕉)_Permanent Blue>와, 동구리의 원류에서 발전된 드로잉 작품을 내보이는 2부 <Drawing>. 특히, 기존 회화와 전혀 다른 매체의 특성으로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는, 즉흥적이고 자유롭고 역동적인 붓질에서 비롯된 해방감이 느껴지는 드로잉에서는 그야말로 에너지가 폭발한다. 싱싱한, 날것이다.


우리나라 사군자에서 ‘치다’는 행위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인 ‘드로잉’ 시리즈는, 수없이 단련된 붓질이 있어야만 즉석에서 한번에 작품을 완성해낼 수 있다. 즉흥성이란, 반복된 훈련과 연습을 통해 집약된 정신적 수양의 ‘해체’적 행위이다. 사군자의 연장선이자, 한국화의 정신과 본질을 극대화한 작품을 통해 작가는 ‘완벽한 원과 완벽한 직선’으로 꽉 짜인 화폭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풀어헤치는 짜릿한 ‘사생’을 즐겼다. 일탈했다. 이제껏 그가 보여줬던 원색의 배경과 깔끔한 선들을 지워버리고, 흩뿌린 물감 사이로 시니컬하게 웃고 있는 동구리는 오늘날 현대인들의 혼란스럽고 위축된 상황들을 함께 대변한다. 다양한 풍경을 배제하고 하나의 사물에 집중해 자유롭게 그려진 작품들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지’를 반영한다. 하하, 웃음 말의 음을 닮은 이미지 기호, 동구리는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라고 직설한다.

저도 좋아요. 드로잉을 할 때는 화면과 나, 둘만 존재하는 세계가 돼요. 오늘 동영상 촬영을 한다기에 걱정했는데 막상 붓을 드니까 뒤가 전혀 의식되지 않았어요. 더 업 되어서 더 튕기는 터치로, 붓을 더 치게 되었지만, 나쁘지 않아요. 약간 오버된 감정도. 사실 오늘 붙여둔 흰 종이에는 나팔꽃을 그리려고 했어요. 담아둔 나팔꽃이 있었거든요.
사실 주제는 늘 똑같아요. 결국은 ‘나’인데, 굳이 말을 빌리자면 과거에 선비들은 어떠했을까? 제가 학문을 한 사람은 아니지만 대학원까지는 나온 유사 지식인인데, 이 시대의 유사 지식인은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할까? 계급의 한계로 지식인 대열에 끼지 못했던 과거의 중인들은 억한 심정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이러한 생각들이 흘러 흘러 지금의 <파초> 시리즈에 다다랐어요.
다른 잎사귀보다 넓고 커서 떨어지는 빗소리도 우렁찬 ‘파초’는 선비들에게 낭만적인 대상이기도 했나 봐요. 비싸도 귀한 종이 대신 넓은 파초 잎에 글을 쓰기도 해서일까 특히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어요. 파초는 이국적인 대상이기도 했죠. 지금 과학자들이 화성 식민지를 꿈꾸듯이, 과거의 지식인들은 넓은 잎을 가진 아름다운 식물이 자라는 나라에 대하여 상상했을 거에요. 먼 이국, 제비가 사는 따뜻한 남쪽, 바다를 넘어간 희망, 미래로 뻗는 더 큰 성취까지도 이 식물을 통해 그렸을지 않았나 생각해요. 여유와 낭만과 희망, 실용까지 모두 겸비한 파초는 사군자만큼 철저하게 의미가 규정되지 않은 상상의 여지가 큰 대상이라서 더 이끌렸어요. 선비들이 좋아한 식물에 대한 궁금증에서 제 상상을 개입시킨 결과물이 다양한 느낌을 주니 재미있더군요.
실제 제가 그린 것보다 잎이 서너 배는 커요. 야자수 계열의 식물이 어떻게 한국의 겨울을 견디고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죽은 것처럼 보이다가도 이듬해 봄에는 더 큰 잎으로 태어나니 당대 지식인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었으리라고 짐작해요. 일제 시대에도 독립을 꿈꾸던 시에 파초가 등장하기도 해요. 정확한 내용은 저도 알 길이 없지만, 상상의 범위가 아주 넓죠. 사실 제가 그린 것은 엄밀히 따지면 파초는 아니에요.
스스로 조금씩 변해가는 가운데, 매년 곁가지 시리즈들을 한두 개씩 만들어요. 작업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자연스러운 아이디어를 굴리면서요. 답답한 부분을 보충하려고 만들어본 새로운 것, 갑작스러운 아이디어, 낯선 자극들로부터 새로운 시리즈로 전개되어 가요. 한 방에 드러나지 않거나 누군가가 그것에 대해 “오늘부터 이 작가가 바뀌었습니다” 소개하지 않을 뿐, 2~3년 마다 제 스스로는 시리즈들을 나누는 지점을 가져왔어요. 하지만 보는 쪽에서 만족하지 못하거나,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의 시리즈는 중간중간 빠져있기도 해요. 올해는 드로잉까지도 들어왔는데, 다음 시리즈 스케치는 이미 되어 있어요. 항상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발표하니까요.
간결해요.



20여년 작업하며 쌓인 감각적인 부분에 집중해 구도를 만들었어요. 구도를 정리하는 부분에서는 얘기하신 대위법과 같은 이론들도 조금씩 염두했지만, 애초의 작정은 아니고요. 기존의 리플렉션 시리즈도 현재에 실재라고 생각하는 모습을 어딘가에 비춰보는 형식을 취했었잖아요. ‘나’라는 대상을 청동거울에, 연못에, 달에, 상대방 눈에 비춰보았던 형식을 좀 더 확장시켜서 내가 비추인 것이 허상인가에 대한 질문을 한번 더 엮어봤어요. 나와 내가 관찰한 이 대상이 또 다른 관찰의 ‘눈’에 의해서는 또 다르게 비춰질 것이라는 점에서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저는 여기에 제 3자의눈, 혹은 제4자의 눈을 더 개입시켜 보려고 했어요. 색감과 화면 크기에도 변화를 꾀했는데, 더 자세히 보면 동일한 것들이 또한 반복 돼요.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러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점점 복잡해지는 세상에서 ‘진짜’라는 게 무얼까, 사실은? 팩트는? 오히려 그런 것에서 더 멀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작업도 그래 보여요. 예술이 무언지 몇 년만 더 하면 알겠다고 했는데, 몇 년 후에 와보니 더 멀어졌고. 내 손에 틀어쥔 것이 누추하고. 몇 년 더 지나면 아마도 지금 생각조차 껍데기 같아 보여서 또 부끄러워하겠지요.
아틀리에 아키 개인전 1부 <파초(芭蕉)_Permanent Blue>에서 나란히 건 <My Favoritea-a yellow boat-bronze>와 <My Favoritea-a yellow boat-red>가 이루는 대구의 방식은 의도한 설치인가요?
별도로 시작한 두 그림을 전시에서 보여준 형식적인 결과물 역시 오래 공부한 동양화의 영향에서 비롯됐네요. 두 개가 마주 보거나 비슷한 구도가 연결되는 형식은 동양화에서 사계나 팔경, 사시팔경(四時八景)에서 흔히 보이는데 화첩도 있지만 대부분 병풍을 위한 것이에요. 마주보게 되는 병풍 형식을 애초에 의도하지 않았지만 무심코 구도를 잡더라도 자연스럽게 연결이 돼요. 큰 경치 속에서 시간의 변화를 한 화면으로 요즘 동영상처럼 보여주는 기법에 굉장히 익숙해져 있는 거에요. 그래서 서양적인 시대에 서양적인 재료로 서양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지만, 그 형식에는 다분히 전통적인 형식과 철학과 은연중에 느껴지는 동양적인 미감들이 녹아있어요. 전통이라고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서양에서 보지 못한 형식이 부지불식간에 묻어있는데, 관람객들이 감상할 때 동양화라는 생각을 안 가졌으면 해요. 그래서 제목도 굳이 그렇게 티 내는 형식은 취하지 않거든요.

세 가지의 고려해야 할 점들이 있다: 그려져 있는 것, 그려져 있는 것이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 권기수의 회화 역시 이 세 가지 지점들을 다루고 있다.
유진상 (미술 비평가, 계원예술대학교 교수)

다양한 재료를 쓰게 된 이유도 전통이 무어냐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됐어요. 지필묵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미감으로 구현 가능하다면 무엇이든 제 손에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지만 철 작업, 애니메이션, 설치 작업을 시도했는데, 모르면 일일이 가게 아저씨들에게 물어가며 배웠어요. 제게 소용이 닿는다면 언제든 새로운 매체에 도전하려고 해요. 작업실 천장에 꽃들도 몇 년 전 실제로 어딘가의 건물에 2,500개를 알루미늄으로 제작해서 설치하는데 사용한 일종의 ‘스케치’에요. 어디든지 새로운 시도를 요구하거나 제 흥미를 끄는 재료가 발견되면 언제든지 해보고 싶어요. 굉장히 간단한데 대부분 작가들은 타이틀에 묶여서 시도하지 않죠. 화가는 자기가 손으로 그림을 그려야지 하는 생각들처럼요.
컴퓨터로 하는 밑그림 작업은 ‘완전한 원, 완전한 직선’을 구현하는 데에 엄청난 도움을 줬어요. 실제 캔버스와 동일한 사이즈로 데이터를 만드는 ‘디지털 스케치’는, 일일이 점 하나와 핀트까지 맞춰야 해요. 아이디어는 차치하고라도, 마우스를 쥐고 첫 커서를 움직일 때부터 완성까지 지난한 과정이에요. 사람들은 단순하다고 생각하지만, 쉬워 보이게 만드는 작업이 더 어려워요. 디지털 시대에 맞게끔 보이고 좀 더 객관적인 느낌이 되도록 만드는 매끈한 표면도, 붓 터치가 드러나거나 두꺼운 층을 만드는 것보다 더 힘들어요. 페인트와 다르게 수성 아크릴 물감은 한두 번 칠해서는 색이 나오지 않고요. 몇 십 번 색을 올려야 하는데, 원치 않는 두께가 나오면 일일이 갈아내야 해요. 지울 수 없는 먹인 동양화 재료는 되돌릴 수 없지만 서양화 재료는 지우거나 갈아내는 일이 가능해 좋고 편하고 쉬울 거라고 선택했는데 아니더군요


단순한 검은색 선으로 표현된 항상 웃고 있는 동구리를 탄생시킨 작가 권기수는 동구리를 통해 현대인들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감, 행복감을 담아낸다. 이른바, 동구리는 개별적인 동시에 ‘우리’인 대상이다.

그럼요. 처음에는 아크릴 물감의 물성을 제대로 모르고 동양화 채색화하듯 사용했어요. 몇 번 착오를 겪으며 재료의 물성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도 제가 십 년 이상 배웠던 동양화의 감성을 이질적인 재료를 사용해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죠. 서양적인 방식을 취하지만 결과물은 알게 모르게 동양적인 정신이 녹아있는 기법의 변형을 추구했죠.
주변 세계의 무엇에 관심을 갖나요?
작품별로 여러 가지 소주제들이 다양하게 있지만, 맥락을 꿴다면 무엇을 하든, 결국 모든 것의 주최자인 ‘나’. 너무나 진부하지만 제 관심은 ‘정체성’이에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적용되는, “너는 누구냐?” 라는 질문에요. 삶, 죽음, 사랑, 흔하고 예쁜 꽃, 혹은 무언지 모를 추상을 작업하든, 그 안에 존재하는 ‘나’에 대하여 말하는 행위를 하는 저에게, 남의 초상을 찍더라도 대상은 그의 것이지만 결과물은 ‘내 눈’으로 본 것이 되니까요. 너무나 단순한 질문인데, 해결은 어렵고, 내일도 찾아야 할 답을 안고 살아요.
층고가 탁 트인 전면부의 미술관식 작업 공간과 이층집 구조의 후면부 구가옥 공간이 연결된 작업실 구조가 독특하네요.
구가건축 조정구 소장님이 해주셨어요. 다른 한옥 프로젝트로 무척 바쁘셨는데, 원래 구가옥을 보시고는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되겠다고 흔쾌히 맡아 주셨어요. 구가옥이 조형적으로 아주 좋지는 않지만 너무 빠르게 없어진 1960-70년대의 정서를 남기면서 필요하게끔 고치는 부분에 매력을 느끼셨어요. 회의만 6개월정도 했어요. 스텝이 제 옛날 작업실에 와서 동선들을 관찰하며 어떤 벽이 필요하고, 층고나 환기, 빛은 어떠해야 하는지 조사를 하고 설계했어요. 앞은 미술관인데 뒤를 돌면 40년 전인, 초현실적인 공간이에요. 나무 난간도 고급 제품은 아니지만 요즘은 구하려고 해도 없거든요. 요즘도 개발업자들이 종종 비울 의향이 있으면 연락 달라고 명함을 주고 가요. 저도 언제까지 이 공간을 지켜낼지 모르겠지만, 조금 불편하지만 재미있어요. (촬영팀을 향해) 건물 외관은 찍지 않으셨으면 해요. 이 집 정체를 동네 사람들도 잘 몰라요. 일부러 작은 명패도 달지 않았어요. 은둔이 미덕이 되는 시대는 끝났지만,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요.

그러려면 조력자가 필요해요. AI가 저를 대신해 인터뷰도 하고 대중들 앞에 서주는 시대가 온다면 더 좋겠지요. 제가 미술에 관해 갖고 있는 생각 하나가 있어요. ‘흘러간 것은 다시 오지 않는다.’ 대체로 재료나 기법에 해당하는 이야기지만.
역시나 이미 오리지널이 대중들에게 충분히 노출되어야 효과가 있겠지요. 아니면 아예 태생부터 010101 존재로 데뷔하거나. AI의 도움을 받으면 좋겠지만 그것도 제 다음 다음 세대의 작가들이 적극적으로 누릴 것이 아닌가 싶어요. 나이 들어가며 느끼는 바가 있어요. 20-30대만 해도 시대와 사람이 일체 가능하다는 사실이요. 30여년 전 제가 컴퓨터를 사용하는 모습을 본 선배들은 “너 어떻게 컴퓨터로 그리니?” 했고, 저는 “저런 생각을 왜 하지? 마우스나 키보드나 태블릿 펜을 갖고 이렇게 휙 그으면 스케치북에 그리는 것과 똑같은데” 했듯. 하지만 지금의 유투브 포맷과 같은 매체에 대해서는 바로 흡수되지 못해요. 유명한 작가들도 사십, 오십, 육십이 되어서 스스로 온전히 그 시대의 첨단 기술을 자연스럽게 흡수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대부분 20-30대에 흡수했던 것들을 사십 대부터는 숙성하는데 시간을 쓰죠. 꼭 테크놀로지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필수조건은 아니에요. 겉절이 김치만 먹지 않듯 묵은지로 충분히 익히는 시간도 필요하니까. 물론 한쪽으로는 익히고 한쪽으로는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욕심이고요. 저는 지금 제 작업들을 좀 더 숙성할 필요로 있다고 봅니다. (휙 부는 바람에 드로잉 종이의 끝이 슬쩍 들린다. 오후의 볕이 바닥에 어지러운 물감 흔적 일부를 비춘다.) 아, 이제 여름이 가나 봐요. 올 여름 참 뜨거웠지요.

아침에 출근해서 화분에 물주기, 저녁에는 몇 년째 수영을 하고 있어요. 그 외에는 종일 느릿느릿 게으르게 살아요. 몸은 느린데 뇌만 빨라요. 그래서 학교 다닐 때 오해를 많이 받았어요. 그림은 안 그리고 고민만 한다고. 우리가 알고 있었던 전통에 대해, 학교에 다니는 동안 늘 의문이 들었어요. 김홍도 그림에서 가까운 대상의 선이 꼭 진하고 멀리 있는 것은 가늘고 연하던가요? 어떤 그림은 자기 마음대로 그렸던데요. 채색하는 선배들도 ‘신윤복 그림은 저렇게 채색 안 하던데, 왜 다르지? 이상하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릴 수가 없었죠. 일치되지 않으면 붓을 들기가 쉽지 않아요. 대학 4학년 때는 1주일에 100호 하나씩, 대학원 때는 누구보다 제가 가장 많이 그렸거든요. 지금 드로잉 작업 보세요. 일치가 되니 금방 끝나잖아요.
(권기수) 화선지를 우리가 언제부터 사용해 왔을까요? 채 100년도 안 되요. 구한말에 중국에서 대량생산한 종이가 화선지에요. 빨리 마르도록 얇게 떠서 만든 값싼 종이. 김홍도나 신윤복 작품 중 요즘처럼 먹이 촥 번진 그림 보셨어요? 찾을 수가 없죠. 원래 우리 종이는 딱딱한 닥지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멋지게 번지는 한 획, 서릿발 같은 일필(一筆)의 동양화 먹 빛은 거짓말이에요. 딱딱한 종이에는 그 먹빛이 나오질 않아요. 일부러 옅은 색을 내려고 물을 바른 다음에 그렸거든요. 조선말기와 일제시대 때 형성되어 왜곡된 전통을 최대한 배제시키려고 노력했더니 사람들이 “우리 거 아니네, 서양화가 돼버렸네” 말하더군요. 저는 전통을 찾거나 회복하겠다는 개념으로 접근하기 보다, 좀 더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는 미적인 것들을 지금부터 제가 만든다면 이게 먼 훗날에 전통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생각해요. 꼭 백 년, 이백 년, 천년 전 것을 여전히 열심히 연습한다고 전통이 되지 않아요. 사람들은 제 작업을 두고 전통의 재해석이라고들 말하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아요. 연구용으로 재해석 작업도 그리지만, 제 전체적인 작업에는 전통적인 부분적인 요소들이 담겨 있을 뿐이에요. 왜냐하면 그걸 아직도 매일 고민하고 있으니까.
아직도!
모르는 것은 아직도 많고, 이렇게 말하면서도 진짜 이 생각이 맞는지, 틀리지는 않은지, 혹 못 보지는 않았는지, 전혀 의미 없는 전통을 여전히 부여잡고 있는지, 그런 반성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해요. 작업은 그렇게 무겁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주 간단해요.



권기수 | KI-SOO KWON
1972년생 권기수는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홍익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한국화를 전공하였으며, 동양의 전통적인 사상과 기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표현법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 받아 2008년 ’구글 아티스트 테마 프로젝트’와 2015년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장학재단 중 하나인 풀브라이트 장학 프로그램(Fulbright Scholar-in-Residence) 등에 선정되었으며, 상하이 Long Museum, 샌프란시스코 Asian Art Museum 등 해외 주요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베니스 비엔날레, 상하이 Long Museum, 상하이 MOCA, 일본 MORI ART MUSUEM, 런던 Saatchi Gallery 등 다양한 국제 전시에 참여하였으며, 최근에는 중국, 홍콩, 유럽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매거진 <아트마인>에 게재된 기사의 모든 사진과 텍스트는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되는 아트마이닝㈜의 저작물입니다.
사전 동의 및 출처 표기 없는 무단 복제 및 전재를 금합니다.
작품 이미지 © 권기수 – ARTMINING, SEOUL, 2019
PHOTO © ARTMINING – magazine ARTMINE / 이주연, 권기수, 아틀리에 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