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숙의 그릇은 자기 슬립 특유의 차가운 백색, 반질거리며 빛나는 유면,
소복히 쌓인 눈처럼 사각거리는 질감으로 진동한다.
기형과 색감이 깨끗하고 단정하여 인공적이나 그 간결함 때문에 상쾌하고 순수한 감성이 느껴진다.”
_홍지숙(미술학박사) / 출처 <월간 도예>)
WRITE 박나리(매거진 아트마인 콘텐츠 디렉터) PHOTOGRAPH 이주연 VIDEO 황승헌(매거진 아트마인 영상 매니저)
무릇 이름에 삶의 족적이 투영되고 작품에 작가의 성품이 담긴다면 고희숙은 이름과 작품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작가라 하겠다. ‘기쁘고 맑은(喜淑)’ 기운을 품은 작가는, 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무유백자로 널리 쓰임과 디자인 모두 충족하는 기쁨의 식기들을 선보여왔다. 흰 눈처럼 군더더기 없는 작품들에서 언뜻 대량 생산한 디자인 공산품이 연상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컵과 국그릇 주입부, 접시와 쟁반 테두리, 주전자 몸체마다 미세하게 다른 라인들이 돋보이는 수공예품이다. 미술학박사 홍지수의 말처럼 “수공의 맛을 자신의 그릇에 남김으로써 동일한 형태를 개별적이고 유일한 형태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대량생산 방식에 사용하는 슬립캐스팅으로 ‘형태’를 잡은 뒤, ‘손맛’을 가미한 물레 성형으로 작가적 디테일을 더하는 고희숙 도자의 역사는 일본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홍익대학교 도예과를 나온 작가는 ‘디자인’ 분야에 대한 열정을 안고 아이치현립예술대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널리 사용 가능한 도자를 만들고 싶었던 그녀는 이 시절을 일컬어 “공예가를 넘어 디자이너의 역할을 고민하던 시기였다"고 회상한다. 그 결과 스물 여섯의 작가는 1999년 <일본 크래프트>전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일약 일본 공예씬의 주목을 받게 된다. 총 678인, 2626점을 응모한 최고 권위의 공예전에서 외국인이 대상을 수상한 것은 처음이었다. 수상작 ‘White Vessel’은 식기 안쪽에만 푸른 유약을 시유하고, 겉면은 자기질 표면을 고스란히 드러내도록 처리한 식기. 심사위원장 타카하시 토시히코의 평은 간결 명료했다. “슬립캐스팅과 수작업의 좋은 점을 연결했다.” 당시 주제인 ‘연결하다’와 완벽하게 부합하는 작품이었던 셈이다. 이후 일본 최고급 백화점 이세탄 등에서 전시 기회를 얻으며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한 작가는 2002년 한국으로 돌아와 지금의 경기도 여주에 ‘고희숙 세라믹 스튜디오’를 열었다.
작업실은 크게 두 동. 제작 및 쇼룸 기능을 겸하는 메인동, 그 옆으로 가마터가 있다. 노출콘크리트 시공으로 지은 모던한 건물은 전면에 큰 창을 내어 늦은 오후까지 볕이 머문다. 인터뷰가 진행된 11월 말은 때마침 작업실 맨 안쪽 공간을 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길수 있는 응접실로 꾸민 직후였다. ‘화이트 모닝’ 티폿에 우린 차를 따라 잔의 밑단을 지그시 감싼다. 무광 백자가 주는 선입견과 달리, 보드라운 질감이 놀랍다. 정사각형 트레이, 군더더기 없는 머그에서는 둔탁하지 않는 비례미가 돋보인다. 라인이나 형태, 손성형으로 빚은 각기 다른 식기들을 한 자리에 모아도 세련된 균형감이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잔을 가만히 입술에 가져다 댄다. 작품이 봉인을 풀고 온전이 숨을 쉬는 순간이랄까.
작품을 보며 여느 도예가들과 달리 ‘디자이너’ 적인 성향이 깊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언뜻 정제된 디자인 아래 대량 생산한 디자인 식기를 보는 기분도 들고요. 이런 요소들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요?
일본 대학원 시절 ‘도자 디자인 코스’를 선택한 것이 여러모로 작업에 담기는 것 같아요. 당시 은사였던 일본 유명 세라믹 디자이너 마사히로 모리(Masahiro Mori)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하셨어요. “내가 죽어도 내가 만든 디자인만 있다면 제품은 계속 생산될 수 있다.” 그 말이 무척 기억에 남아요. 나도 무언가 생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널리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제품’ 같은 ‘작품’, 디자인이 가미된 식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실재로 마사히로 모리 교수가 디자인한 간장병 ‘G-type Soy Sauce Bottle’은 그의 사후 무인양품에서 지금까지도 생산되고 있죠.
젊은 시절 일본에서의 유학 생활은 현재의 ‘고희숙 도자’의 토대를 형성한 굉장히 의미 깊은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2년 간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그 뒤 작가 활동까지 7년 정도를 지냈어요. 나고야에 터를 잡고 살았지만 전시나 판매는 주로 도쿄에서 이뤄졌죠. 일본은 그릇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문화가 깊게 자리하고, 비전공자들도 유약과 같은 전문용어에 능할 만큼 기본 소양도 뛰어나요. 근래 우리나라도 요리 프로그램이 활성화 됐지만, 음식을 넘어 그릇까지 조명하는 단계는 아닌 것 같아요. 그 당시 일본에서는 요리와 그릇 문화가 굉장히 다양하고 풍부했죠. 도예가로서 자리 잡고 생활하기 좋은 환경이었고 실재로 작품 판매도 높았어요.
이십대 중반부터 삼십대 초반까지, 작가로서 뿌리 내리고자 열정적이던 시절이기도 한데, 힘든 순간은 없었나요?
대학원을 마치고 아이를 가지면서 심적으로 조바심이 났던 때가 있었어요. 선배들 가운데 결혼하며 도예를 그만두는 경우를 종종 접하다 보니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임신한 상태에서 개인전을 일부러 더 잡았죠. 출산 전까지 잔뜩 작업하고, 모자란 부분은 출산 뒤 작업을 보태서 전시를 열 정도였으니까요. 촉을 놓지 않고 이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돌아올 수 있는 분야인데, 그때는 절박했기 때문에 그런 여유도 없었던 것 같아요. 매 순간 일과 육아의 균형 잡는 게 힘들었어요. 전투 치르듯이 생활했죠.
1999년 <일본 크래프트>전 대상을 수상하며 일본 도예 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어요. 대회 역사상 외국인이 대상을 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요. 수상작 ‘White Vessel’은 어떤 배경 아래 완성됐는지 궁금해요.
당시 대학원에서 워크숍을 참여했는데 물레 두 개를 동시에 돌리며 순간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는 교수님이 계셨어요. 이쪽 물레를 쓰다, 저쪽 물레를 쓰며 순식간에 작품을 완성하는데 그걸 보면서 ‘캐스팅한 도자도 물레를 차서 붙일 수 있지 않을까?’ ‘틀과 물레를 같이 접합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죠. 당시 <일본 크래프트>전 주제가 ‘연결하다’ 였는데, 형태가 아닌 기법의 연결을 주제로 잡으면서 화이트라인 시리즈를 처음 디자인하게 됐어요. 수상 이후 일본에서 정말 많은 개인전 기회를 얻었어요. 한 해에도 몇 번씩 판매전 같은 느낌으로, 고급 백화점인 이세탄 등에서 식기를 소개했는데 판매결과가 꽤 좋았어요.
‘물레와 성형’을 접목한 기법은 이후 20년이 흐른 지금까지 고희숙 도자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해요. 지금은 많은 작가들이 차용하는 방식이라 새롭게 느껴지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였겠죠. 1999년 당시 일본 공예계의 반응은 어땠나요.
그때까지만 해도 ‘물레성형’, ‘캐스팅성형’으로 도자 작업이 명확하게 양분화 되어 있었어요. 생각조차 하지 않던 기법이다 보니 당시에는 굉장히 낯설어했죠. 다행히 일본에서 시작했던 작업이라 큰 거부감 없이 이어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제된 디자인 작업을 하지만 또 새로운 스타일은 받아들이는 문화가 형성돼 있거든요. 지금 제 작품의 물레선은 정제되어 있지만, 그때는 훨씬 과감했던 것 같아요. 물레선을 칼로 잘라 보고 비틀기도 하고요.
원형 홀에 손가락을 넣어 뚜껑을 오픈하도록 한 ‘White Line’ 시리즈의 티폿, 핑글핑글 돌아가는 팽이처럼 주입부의 물레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White flying’ 시리즈의 볼과 이중기, ‘White Morning’ 시리즈의 접시와 티컵··· 대표 라인들 모두 마무리 단계에서 작가의 터치를 더한 ‘손성형’을 고수하고 있어요. 물레 작업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나요?
캐스팅 작업으로 판성형을 마친 다음, 틀에서 제품을 분리해요. 가마에 넣기 전 겉면만 살짝 마른 상태에서 물레 작업으로 작가의 ‘손맛’을 더하죠. 물기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물레를 돌려 표면을 쓸어주는 건데 주로 양가죽을 사용했어요. 흙이 닿으면 의외로 쉽게 연마해 금방 닿는 문제가 있었는데 최근에는 이에 대한 방안으로 스포츠 타올을 잘라 사용하고 있어요. 물기를 오랜시간 머금기도 하고 훨씬 오래 사용할 수 있더라고요. 캐스팅으로 동일한 작품을 제작하는 게 아니라, 형태를 잡은 상태에서 일일이 제 수공이 들어가는 작업이라 체력과 섬세함이 요구되는 작업이에요. 그렇다고 외부의 힘을 빌리고 싶은 마음은 없기 때문에 혼자 모든 공정을 담당하죠. 매일같이 작업하는데, 보통 큰 가마를 다 채우는데 한 달 정도 소요 되요.
‘Untitled White’라인에서는 사각 접시, 물컵, 화병, 커틀러리 받침 개방부가 뜯긴 듯 거칠게 마감된 것을 볼 수 있어요. 정제된 물레라인과는 다른 느낌의 손맛인데요.
일반적으로 석고틀에서 작품을 꺼낼 때 불필요한 부분들을 떼어내는데, 이때 남는 자국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살린 작업입니다. 정제된 도자기를 사용하던 분들의 저항감이 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 라인들이 팔리는 게 너무 놀라웠어요. 자연스런 느낌을 선호하는 추세이기도 하고, 외국에서는 도자기가 깨진 느낌을 의도적으로 살린 작업물이 많아 익숙한 것 같아요. 사실 두 가지 공정을 생략하는 작품들이에요. 석고틀에서 작품을 꺼낼 때 주입구의 불필요한 부분을 뗄 수 밖에 없거든요. 보통은 칼로 정확하게 끊죠. 하지만 ‘언타이틀드 화이트’ 라인은 그 과정을 생략하고 뜯긴 부분을 그대로 둔 채 건조시켜 스폰지로 살짝 눌러주는 정도로 마무리합니다. 지난 20년 간 한번도 의문을 갖지 않고 해오던 공정 작업인데, 어느 날 문득 이 과정을 덜어내도 디자인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되도록 공정을 추가하지 않고도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제 작업 방향과도 일치했고요. 이 뜯는 방식이 그렇다고 모든 디자인에 어울리는 건 아니에요. 형태가 훨씬 단순해야 하기 때문에 손잡이가 있는 잔 같은 경우는 안 어울리더라고요.
긴 시간 백자 작업을 해오고 있는데요. 흰색이 갖는 미감은 무엇일까요?
색감을 넣으려 노력을 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하지만 결국 흰 것만큼 제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작업을 할수록 뭔가를 더하는 것보다 덜어내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아요. 그렇지만 블랙에는 관심이 있어요. 화이트라인 중 달항아리와 같은 오브제 피스를 검은색으로 빚었는데, 약간 푸른빛이 섞인 한정된 색소지라 아껴쓰고 있죠. 오브제 작업 시 화이트 & 블랙 컬러가 대비되게 쓰고 싶어요. ‘완전무결’ 해야 하는 백자는 일체의 결점을 용납하지 않아요. 모든 색이 균일해야 해요. 마음대로 되지 않아 더 매력적인 컬러 같아요. 늘 긴장 상태에서 구워내야 하다 보니 계속 긴장상태에서 작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요. 백자는 철 하나만 떠도 비품이 되잖아요. 그런 부분이 큰 스트레스죠.
‘화이트’도 전해지는 온도나 컬러에 조금씩 차이가 느껴져요.
맞아요. 흰색보다 더 흰 ‘차가운 화이트’와 아이보리 빛이 감도는 ‘따뜻한 화이트’가 있어요. 가마불에 따라 색감에 차이가 나는데, 제 작품은 차가운 빛감의 화이트인 만큼 환원불을 땝니다. 장작 가마의 문을 닫아 산소를 차단하고 장작을 계속 때면서 가스를 주입하는 방식이죠. 이렇게 되면 색이 색이 흙과 반응해 푸른 빛을 돌아요. 연료를 더 많이 때우기 때문에 흙의 입장에서는 더 괴롭겠죠. 가스를 조절하면서 가마 안에서 일어나는 불의 미묘함까지 작가가 컨트롤해야 하는 집중을 요해요.
식기 안쪽에만 유약을 바르거나, 푸른 빛을 가미하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요? 덕분에 표면은 도자 그대로의 텍스처를 느낄 수 있어요.
물레선을 어렵게 찼는데, 표면에 유약을 바르니 라인이 하나도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안에만 유약 처리를 했는데 초기에는 작품이 모두 깨지더라고요. 유악이 흙을 잡아 당기기 때문에 가마문을 열기만해도 미묘한 온도차이로 어려움이 컸죠. 유약을 안정적으로 바꾸면서 이 문제를 풀어갔어요. 안에 푸른빛이 감도는 것은 유약을 두껍게 바르고 환원불을 강하게 떼면 가능해요. 일본에서는 푸른빛이 훨씬 짙었는데 흰색과 대비가 커서 오래 두고 보기에는 좋지 않더라고요. 지금은 은은한 푸른빛이 도는 정도로 작품 일부에 색을 더하고 있습니다.
새하얀 백자로 만든 생활 식기의 실재 사용감은 어떤가요?
그릇류가 많다 보니 여러모로 요긴하게 쓰기 좋아요. 노영희 셰프가 제 접시를 오븐에 넣고 10년간 쓰고 계신다는데 그건 원형이라서 가능한 것 같아요. 제 작품이 온도에 견디는 힘이 좀 높다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편하게 쓰는 전문 식기류보다는 좀 더 관리를 필요로 하죠. 몇 년에 한번씩 개인전을 할 때 말고는 거의 생활기 위주로 제작하고 있어요. 밥그릇, 접시, 물잔 다들 모두 편하게 사용하세요. 주전자의 경우는 결국 사용하며 수정과정을 거치게 되더라고요. 손잡이가 길어지면 불에서 떼는 동안 미묘하게 틀어져 균형이 맞지 않고, 수구도 어려운 부위에요.
그릇을 만드는 도예가 입장에서 사용부분에 대한 개인적 아쉬움이 있다면요?
대부분 백자에 찻물 드는 걸 싫어하는데 자연스러운 부분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어요. 술병에 대한 선호도가 낮다는 것도 아쉬워요. 술잔은 사용하지만 술을 담아 마시지는 않아요. 샘플로 만든 식기들이 잘 나가지 않아 실재 생산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 아쉽죠.
캐스팅 작업을 접목하면 작품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이점이 있는데요. 실재로 캐스팅으로 생활 식기 작업을 하는 도예가들이 많지 않는 이유는 왜일까요?
캐스팅으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생활식기를 하기 더 힘들어요. 캐스팅은 공장처럼 틀을 50개씩 늘어 놓고 기계적으로 속도감 있게 작업해야 하는데, 작가 혼자서는 힘에 부치기 때문이에요. 거기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보다 변별력을 갖기 위해선 ‘손성형’이 가미 되야 하는데, 결국 물레 작업보다 시간과 비용대비 효율성이 떨어지는 거죠. 오브제 피스 작업은 100명 중 몇 명의 컬렉터만 만나도 지속할 수 있지만 식기류는 다양한 것들을 대량 생산하지 않으면 안 돼요. 접시도 ‘대·중·소’ 사이즈가 달라야 하고, 종지나 수저 받침까지 제작해야 하죠. 게다가 생산을 하는 도중 끊임없이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해야 하기 때문에 혼자 하기에는 힘에 부치는 부분이 많은 거죠.
새로운 작업의 방향이나 아이디어는 어떻게 찾아 가나요.
작업이 안 풀릴 땐 작업을 해요. 반복 생산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 과정 속에 손을 움직이며 맥을 잡아가죠. 손이 놀면 더 뭔가를 하기 힘들더라고요. 어렸을 때 할아버지의 손에 끌려 서예를 배웠었는데 느낌이 좋았어요. 손으로 만든 것의 특별함, 편안함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 막연히 디자이너를 꿈꿨던 것 같아요. 여전히 손으로 뭔가를 할 때 가장 많은 영감을 얻죠. 작업을 하며 다른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주제나 표현이 확장되는 부분이 있어요.
작은 사이즈의 식기류를 주로 작업하다 보니 큰 조형물 같은 오브제 작업에 대한 고민도 있을 것 같아요.
해외에 작품을 선보이기에는 오브제 작업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릇의 형태지만 곁에 두고 감상하는 용도의 ‘이중기’ 같은 오브제 피스를 제작했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 때인 것 같아요. 지난 몇 년간 그릇 제작에 집중했으니까요. 내년 4월 ‘노영희 그릇’에서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는데 그때 오브제 신작들을 선보일 계획이에요. 그릇을 지난 몇 년 했으니까 내년 4월 노영희 선생님 그릇가게에서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어서 그때 오브제 피스를 좀 더 만들 생각이에요. 그릇도 오브제가 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쓰임이 우선일 수밖에 없고, 오브제 도자는 작가의 생각이나 조형성을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죠. 이제는 제 조형 이야기를 좀 더 해도 많은 분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연륜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일본은 물론 독일 뮌헨, 미국 필라델피아, 파리 등 여러 나라에서 공예를 주제로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와 페어에 참여해왔어요. 그 중 인상적인 경험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미국은 공예의 쓰임을 중시하는 성향이 있다 보니 필라델피아 크래프트쇼에서는 준비해갔던 작은 그릇들이 거의 다 판매됐어요. 그곳에서 명상그룹을 운영하는 노신사 분께서 제 작품이 수련에 도움이 될 것 같다며 이중기를 구입해 가셨던 게 기억에 남아요. 그 뒤로 오브제 작업을 할 때마다 ‘그때처럼 누군가에게 사색할 수 있는 그릇을 과연 내가 만들었던가?’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정말 그런 멋진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다짐을 하곤 해요.
고희숙 | KO HEE SOOK
1994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도예과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7년 간 공부하며 작가로 활동했다. 1998년 세토요업기술센터 디자인과 연구생을 수료하고, 2000 년 아이치현립예술대학 대학원 도자디자인코스를 졸업했다. 1999년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크라프트전에 출품한 작품에서 대회 역사상 외국인 최초로 대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2000 일본 크라프트전 입선, 뮌헨 Talent 2000 금상, 2001 일본 크라프트전 입선, 제 1회 세계도자비엔날레 입선, 2002 제 6회 미노국제도자기 공모전 디자인부문 은상 등 수많은 공모전을 통해 그 실력을 인정 받았다. 2005년 한국으로 돌아와 개인전 <White Line>을 열며 지금의 작업실이 위치한 경기도 여주에서 작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13년 12월 서울 갤러리메종르베이지에서 열린 개인전 <고희숙 전> 외 프랑스 파리 갤러리 아틀리에의 <한국공예초대전>, 필라델피아 크래프트쇼 등 다수의 전시에 참여하며 작가적 역량을 쌓아왔다. 현재 작품 판매처로 정소영 식기장, 노영희 그릇이 있으며, 고희숙 세라믹 스튜디오(http://koheesook.com)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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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미지 © 고희숙 – ARTMINING, SEOUL, 2018
PHOTO © ARTMINING – magazine ARTMINE / 이주연